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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여쭙기를 잊지 말라 (대하 35: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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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여쭙기를 잊지 말라 (대하 35:20-25)


오늘 본문은 남왕국 유다의 왕 요시야에 관한 기록입니다. 요시야는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 왕국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뉜 후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더불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주목받는 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모두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성전에서의 예배를 회복시키며 백성의 신앙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개혁운동을 벌인 왕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시야의 개혁이 아마도 가장 철저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역대하에 따르면 요시야는 여덟 살 때 왕위에 올라 삼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하나님 보시기에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34:1-2). 그는 왕위에 있은 지 팔 년밖에 되지 않은 아직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개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34:3). 그는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온갖 우상들을 제거하였고 바알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태양상들을 찍어버렸습니다(34:3-4). 

요시야는 이러한 신앙정화운동을 예루살렘과 유다뿐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지역에서까지 행했하고 돌아왔습니다(34:6-7).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 이미 멸망한 옛 이스라엘의 땅에서 앗수르의 종교적 영향의 흔적을 지우려 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 즉 그가 스물여섯 살 되는 해에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다가 거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율법책을 통해 그간 유다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는지를 깨닫고는 자기 옷을 찢으며 통곡을 했습니다(34:8-28). 그는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었습니다(34:29-30).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는 백성도 따르게 했습니다(34:31-32). 역대하 기자는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요약정리하며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34:33) 

역대하 기자는 특히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철저하게 복원시켜 지킨 일을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35:1-17). 요시야의 증조부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규례대로 준비하여 성대하게 지켜서 솔로몬 이래로 본 적이 없는 기쁨이 예루살렘에 넘치게 했고 백성을 축복하는 소리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게 했다(대하30:26-27)고 하지만 요시야 때 지킨 유월절은 히스기야 때 지킨 유월절을 능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하35:18의 증언입니다: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유월절을 규례대로 회복한 일을 비롯하여 신앙개혁 전반에 걸친 요시야의 업적을 평가하는 글을 우리는 왕하23:25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경건하고 훌륭한 왕이었던 요시야이었기에 오늘 본문이 전하는 그의 죽음은 우리를 무척 당혹하게 합니다. 요시야가 유다의 왕이었을 시기는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절대강자였던 앗수르의 세력이 쇠하여지고 바벨론이 신흥강국으로 부상했을 때입니다. 바벨론의 거센 공세에 밀리며 희망 없는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던 앗수르를 돕기 위해 이집트의 바로 느고가 군대를 거느리고 원정을 온 것입니다. 

이집트는 바벨론이 새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고는 바벨론 군대와 앗수르 군대가 대치하고 있던 유프라데스 강 서북단 지역에 위치한 갈그미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이집트가 앗수르를 돕는 일을 저지하기 위하여 갈그미스로 향하고 있던 바로 느고의 군대와 므깃도에서 싸웠습니다. 므깃도는 갈릴리에 못 미치는 요단강 북쪽에서 서쪽 지역에 있습니다. 느고는 유다와 싸우고자 하는 뜻이 없었고 다만 앗수르를 도우려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유다를 지나가고자 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1절을 봅니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그러나 요시야는 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그와 싸우다가 활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그로 인해 결국 죽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대체로 전쟁에서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충성되며 순종적인 왕이 전쟁에서 적에게 맞아 죽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의식으로는 이해되기 힘든 일입니다. 요시야는 다른 왕들처럼 잘한 면도 있고 잘못한 면도 있는 그런 왕도 아니었습니다. 열왕기 기자건 역대기 기자건 요시야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면을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전쟁에서 적의 활에 맞아 죽고 말았다는 사실은 더더욱 충격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은 일로 여겨집니다. 

요시야는 그의 할아버지인 므낫세 왕 때 쳐들어와 므낫세를 짐승처럼 비참하게 쇠사슬로 결박하여 사로잡아갔던 앗수르에 대한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원한이 맺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위협하던 앗수르가 망해가는 것을 기뻐하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벨론이 강성하여져서 앗수르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에게는 바람직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집트가 그 일에 방해요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로서는 방관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가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길을 차단하려 했을 것입니다. 요시야의 판단과 결단은 유다 왕국을 위한 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할 때 요시야의 전사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로 남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판단은 근시안적이었고 국제정세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간파하지 못했으며 그의 죽음은 그의 그런 잘못된 판단이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도 가능할 것입니다. 사실 바벨론은 훗날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에게 더 큰 치욕과 고통을 안겨줄 바벨론을 미리 내다보지 못하고 바벨론과 맞서 싸워 그 야욕과 정복을 저지시킬 이집트와 싸워 결과적으로 훗날의 큰 원수를 돕고 자기 나라와 민족에게 해가 될 일을 했으니 스스로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문제를 좌우하는 것은 국제정세이기 이전에 늘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국제관계나 군사적 상항으로 보아 절대 불리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에게 신실할 때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승리를 주시곤 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경건했을 뿐이고 그 어느 왕보다도 신실했던 요시야를 전장에서 적군의 손에 죽게 하신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집트의 바로 느고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 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인데 요시야가 하나님을 거슬려 행한 것이 요시야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이 아마도 가장 수용할만한 대답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느고는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한 자가 이방나라 이집트의 바로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는지를 요시야가 어찌 알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느고가 요시야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는 것이며 요시야가 믿는 하나님께서 느고와 함께하시는 줄로 요시야가 알았더라면 그는 느고와 맞서 싸우려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이집트 왕 느고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 적국의 왕의 말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따라서 요시야가 느고가 주장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일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가능한 답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요시야가 이집트와 맞서 싸워야 할지 여부를 하나님께 여쭙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요시야의 유일한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느고가 요시야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였다면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느고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여겨졌다 할지라도 대국에 맞서 전쟁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지도 않고 혼자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그가 잠시 하나님을 잊어버렸거나 교만해졌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전쟁을 하려고 할 때 먼저 하나님께 뜻을 여쭙고 확실한 응답을 받고서 전쟁을 한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럴 때는 백전백승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전쟁을 했을 때는 늘 뼈아픈 패전을 하곤 했음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교훈을 요시야는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과 또는 소말리아 해적에 의한 우리 선박과 선원들의 피납 사건 등 그 대응에 있어서 간단하지 않고 매우 신중해야 할 일들을 겪었습니다. 언제 또 그런 일들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그런 때 우리 대통령의 결단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사건 관련 지휘책임자의 판단과 결심이 우리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 되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그 믿음의 양식을 따라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해도 되는 사소한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어떤 넥타이를 맬까, 점심을 뭘로 먹을까 등등의 문제까지도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행동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결정하며 실행에 옮기는 것이 꼭 필요하고 또 지혜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크고 작은 우리의 결정과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행동하기를 잊지 않는 믿음의 삶. 기도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늘 승리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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