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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시 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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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시 141:1-5)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매우 헌신적인 남편이었고,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목사님은 복음사역에 있어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을 만큼 귀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든 목사님이 외도를 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고 칭찬과 칭송을 듣는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는 깨지고, 마음은 어느새 메말라 버렸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기 꽃병이 단단한 바닥에 떨어져 깨져서는 회복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두 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영화 ‘불의 전차’의 한 장면입니다. 이것은 1920년 주인공인 에릭 리들의 실재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에릭 리들이 여러 선수들과 함께 열심히 달려갑니다.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서 달려 나가는 순간 트랙 안쪽 잔디밭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영화는 멀어져 가는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는 에릭 리들의 실망하고 좌절한 표정을 클로즈업시켜 줍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렸고 우승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또 한 장면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육상경기였습니다. 경주자들과 함께 1000m를 달렸습니다. 전략상 중요한 지점에서 선수들이 박차고 달려 나가는 순간 한 선수가 트랙 안쪽으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카메라가 이 사람의 얼굴을 비춥니다. 그 얼굴에 고통과 실망, 낙심이 지나가고 그는 주저앉고 맙니다. 두 장면에서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요즘 인생의 트랙에서 이와 같이 나가 떨어져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경기를 중단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떠올렸던 두 사람과 같이 트랙안쪽으로 튕겨져 나가 다시 일어설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의 말년에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의 지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 시를 깊이 살펴보면서 놀라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억울한 일에 피해를 당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면초가와 같은 자리에서 다윗은 정말 냉정하리만큼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 8절에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말아달라”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절박성이 2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 이 표현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 자리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기도가 속히 응답이 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녁에 드려지는 제단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세요? 이 제단 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낮에는 작렬하는 햇빛에 가리워서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석양의 햇빛이 서서히 사라지면 햇빛에 가리웠던 제단의 불길이 멀리서도 보여지지 않습니까? 그 불길이 어두움을 가르고 온 땅에 비춰지는 것처럼 자신의 절박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불길처럼 타올라 상달되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년도에 들어서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라는 표어 앞에 섰습니다. 지난 1월 한 달은 말씀에 대해 함께 묵상을 했고 이제 2월 한 달 동안 기도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의 환경 속에서도 3가지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1. 자기의 입을 지켜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3절)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루에 얼마정도의 말을 하고 사는 줄 아십니까? 우주비행사인 니카엘 콜린스의 위트 있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25000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한편 여자는 남자보다 조금 더 많은 수치로 하루에 평균 30000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남편이 하루종일 직장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그는 이미 25000 마디의 말을 다 해버린 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각, 아내는 겨우 몇 마디의 말을 했을 뿐입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를 연구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성대 길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금 옆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성대의 길이가 다릅니다. 우선 남자의 성대는 여자보다 길이가 3배나 더 깁니다. 그 말은 곧 남자가 말을 하려면 여자보다 3배 정도의 산소가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의 공기가 있어야 성대가 채워집니다. 그러니 남자가 말을 잘 하고 많이 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말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공기도 많이 필요치 않고 어휘력도 남자보다 훨씬 풍부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전화기에 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수다를 떨고도 이렇게 전화를 끊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다시 하자." 그러니 이것이 보통 문제입니까? 남편이 말을 할 기운이 없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아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잔소리를 합니다. 그래도 남편이 받아주지 않으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급기야는 남편을 향해서 쌓였던 온갖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말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의 대부분의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하루 동안도 수없이 뱉어냅니다. 

그래서인지 말이 적은 사람, 침묵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신뢰가 갑니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말은 거의 소음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입니다. 각종 공해로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습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흉보고 헐뜯는 말, 우리의 마음과 삶은 온갖 오염물질이 가득차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언어의 폭력으로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고식’의 폭력성 글을 보면 섬뜻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윗 역시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하겠습니까? 그것도 자식이 자신을 짓밟고 왕권을 찬탈한 것도 아픔이었지만, 자기에게 한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의 배신 앞에 어떤 말이든 쏟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채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며 도망하는데 그 피난길에서 베냐민 지파인 시므이가 줄곳 따라오면서 저주의 말을 쏟아냅니다. 그의 부하가 그를 죽일려고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삼하16: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내버려두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안 나가도록 애를 쓴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갈 줄을 모르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입술을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4절)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한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여기 이 기도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한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이 기도는 누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 하는 기도가 아닙니까? 그러나 두 번째 기도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은 사기꾼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사기로 얻는 그 부는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악으로 자기 인생을 승리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은 부러워 합니다. 다윗은 그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의 진수를 먹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극동방송국에 부사장으로 계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4개월만에 이 나라에 8. 15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족과 교회는 돌아가신 목사님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가며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을 하며 “주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 뿐이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신은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고 합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는 그런 자기를 의식하였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답니다. 시37:25-26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사실 주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다고 가르치기를 했습니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라고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그 집문서를 뿌리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예요. 실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에 가려져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른 게 없습니다. 

여기 다윗을 보십시오. “내 인생이 악인들과 함께 걷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진수도 먹지 말게 하옵소서.” 다윗의 다윗 된 것은 이처럼 위대한 마음의 결정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나쁘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만, 그런 이익을 준다면 거기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는 참 쉽게 잘합니다. 그래놓고 자기 삶은 바르지 못한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도 연약했습니다. 다윗은 “주여! 내 인생이 연약합니다. 내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악인들의 악행의 그 길을 내가 가게 하지 마옵시고, 그들의 소득에도 눈을 돌리지 말게 하옵소서” 다윗의 기도였습니다. 

3. 다윗은 의인의 책망도 달게 받아야 하며 또한 책임을 질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5절)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좋아합니다. 오죽하면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책망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책임을 지라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자기 합리화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백성인 우리는 자신이 한 말과 글,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입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기도하며 구했던 지혜는 다름 아닌 듣는 마음입니다. 잘 듣는 게 지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큰 실수를 합니다. 그게 밧세바와의 불륜입니다. 이 사실을 나단 선지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얼마든지 자기의 권력으로 나단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윗은 겸손하게 그의 책망을 달게 받습니다. 시51편과 32편에 보면 나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 메달리는 다윗을 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면 내가 정하리이다. 내가 내 눈물로 내 침상을 띄웁니다. 내 뼈가 심히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신랄하게 책망을 했던 나단 선지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보세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의 스승을 바로 나단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신약을 통독했지만, 마태복음의 가계는 요셉의 가계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입니다. 거기는 다윗 다음에 누가 나오는가하면 나단이 나옵니다. 이 나단이 다윗의 아들입니다. 오죽 나단을 좋아했으면 자신의 아들에게 나단이라는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다윗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행13:22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 일에 다윗의 혈통을 통해 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그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며, 비밀의 세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들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들은 기도라는 비밀의 통로를 통해 하늘의 온갖 신령한 능력을 공급받았으며 그 능력으로 개인의 숙명적인 문제와 가정의 환란과 국가의 엄청난 재앙들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기도로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하늘에 태양을 잡아 두기도 했으며, 기도로 185,000명의 대군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천사를 움직여 하룻밤 사이에 송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려 제물을 태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기도로 3년 6개월의 한발로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게도 했으며,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이가 기도로 땅을 진동시키고, 착고를 풀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기도의 사람은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의 내면을 주의 말씀으로 채우기 때문에, 다윗처럼 극한 절망의 자리에서도 세상 앞에 굴복하거나 세상의 힘을 빌려 다시 정권을 되찾으려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은 그 절박한 순간에도 그는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질까봐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수치를 당해도, 책망을 달게 받고, 책임을 감당케 해달라고 합니다. 고난의 한 복판에 있어도 쓸데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살다가 가는 인생, 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다가 끝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으신 것들을 사용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도록 내 몸, 내 시간, 내 달란트, 내 재물, 내 모든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드리고 그분 앞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기도가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드려지는 성숙한 기도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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