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 궁극이
  • 679
  • 0

첨부 1


13장 13절-16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환난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진리본질의 살아있는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 환난 핍박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의 출처는 진리본질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는 깨달음이 오고, 또 신앙생활에 힘이 있다.


환난 핍박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어떤 사건 환경 이런 저런 사람이 와서 흔들어도 요동치 않는 것은 어디에 속한 것이냐? 신령계에 속한 것, 하나님의 것이다.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것을 붙잡지 않은 것은 물질에 시간에 다 요동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물질의 요소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속에 있는 것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없어지거나 환경에 따라서 자리 이동이 되게 되면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신앙이 주격 된 사람이 본다면 사람이 넘어진 이런 사람은 비참하다. 그 인격 면에서 사람이 비참하다.


우리는 요동치 않고 변질되지 않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시간 속에 든 것은 전부는 지나가는 것이다. 환난 핍박도 다 지나간다. 자기가 받는 고통도 다 지나간다. 몸 밖에서 주는 고통도 순간적으로 다 지나간다. 예를 들면 자기가 죽으면 그 고통은 못 따라온다. 그러나 영원히 가는 것은 자기가 죽어도 자기의 뒤를 따라온다. 영원히 가는 것은 변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러냐? 시간 속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 들지 않는 것은 영원히 가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가는 것은 그 질이 변질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 주시는 것은 시간 속에 든 것을 주려는 게 아니라 영원히 값진 것을 주시려고 한다.


인간세상에서 사람 못된 사람은 못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꾸 영향력을 끼친다. 사람의 수준이 그렇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일반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신앙적으로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준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주신다. 환난 핍박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을 주신다. 이걸 주신다는 게 무슨 물건처럼 주는 것이 아니고 자체화 되는 것을 말한다. 정신에 속하는 것, 사상에 속하는 것, 인격과 성품에 속하는 것, 진리 자체화 되는 것. 사람이 그렇게 될수록 환난 핍박을 다 이길 수 있다. 이게 없으면 사람이 환난 핍박을 통과하며 만들어지는 게 없으니 끝까지 참고 견뎌봐야 무슨 소용이냐? 끝까지 참고 견딜 때 뭔가 열매가 나와야지 열매 없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4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냐? 시간 속에 속한 것, 물질에 속한 것, 변질이 되는 것, 임시성적인 것, 세상에 속한 것 등등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이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들랑.’ 지음을 받은 어떤 피조물도 존재도 설 수 없는 그 곳, 어떤 피조물이라도 동등적으로 같이 할 수 없는 그 분만이 오직 완전하시고 독존자시요 만능의 능력자요 즉, 창조하신 그 분의 위치적 그 자리,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만능의 능력자요 독존자요 영원히 살아계신 이 분이 앉을 자리에는 그 분밖에 앉을 분이 없다. 만일 딴 것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이게 교회에 주는 말씀으로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썩어지고 불타고 뭉그러질 그것이, 그러니까 이런 시간 속에 속한 거, 변질 변동성이 있는 이건 물질성이다. 이것이 서지 못할 곳에 즉, 하나님 자리에 앉거들랑 그 말이요. 바꿔치기가 된 것이다. 이건 교회보고 하는 말이다.


세상물질 돈 경제 사회적 존귀 영광성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으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왜냐?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의 날이 온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디도당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불바다가 되었다.


그 어떤 피조물도 그 분의 자리에 하나님처럼 대치해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설교나 기도로 뭘 세워야 하느냐?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다. 교회의 모든 명령은 의사단일성의 그 분의 말씀에 일치적으로 돼 나와야 한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만들어 놓고 ‘이 일을 성공리에 끝마칩시다’ 하는 건 하나님이 앉을 자리에 세상을 세워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훈적으로나 존귀적으로나 우리의 소원 목적이나 하나님 자리에 그 무엇도 세울 수 없다. 설교의 질적 면에서도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거나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다. 하나님의 온전이다. 어떤 성경을 들고 와도, 어떤 사건을 들고 와도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것이다. 온전이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선 사랑 거룩 진실의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 최고의 옳음, 하나님의 능력성이다. 모든 사건 속에서 이걸 빼내서 자기 자체화 시키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이다. 어떤 성경구절에도 이게 다 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세계적인 교회 전체적으로나 하나님 자리에 뭘 앉혔나를 봐라. 어느 교회의 무슨 집회나, 테레비로 어떤 설교를 듣든지 하나님 자리에 뭘 세웠나를 봐라. 그걸 볼 줄 모르면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거다.


사람이던 건물이던 재산이던 사업이던 물질이던 그 무엇이던 하나님 자리에 세워놓으면 이걸 십계명적으로 보면 제 1계명부터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하나님-->인간-->물질’인데 물질을 하나님 자리에 놓거나 인간을 하나님 자리에 놓거나 하면 순서 위치 존귀적 영광적 자리가 다 바뀐다. 그러면 창조의 목적도 없애버리는 셈이 되고, 이렇게 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과 멸망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도 예수 믿는 자가 자기의 마음속에 뭘 세워놓고 있는 건지? 자칫 잘못하면 속기 쉽다. 자기 속에서 자식을 세워놓을 수도 있고, 아내나 남편이나 직장을 세워놓을 수도 있다. 그걸 세워놓고 자꾸 예수이름으로 그게 안 넘어지도록, 그게 이뤄지도록 기도로 구하는 것은 벌써 하나님 자리에 딴 게 세워진 거다. 기도를 들어보면 알고, 설교를 들어보면 안다. 그 다음은 형벌이다.


산으로 도망을 가라는 것은 도의 봉우리로, 말씀의 봉우리로 올라가라는 건데,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세계적으로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 자리에 딴 것이 세워진 것을 보이거들랑 너는 산으로, 말씀의 봉우리로 올라가라. 낮은 자리에 있으면 형벌이라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신앙사상은 형벌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는 성경을 보면서 안 믿는 사람처럼 ‘무슨 죄를 지었네’ 그걸 보는 게 아니라, 그걸 기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신앙정신을 보는 거다. 이 신앙기준을 바로 잡으면 행동적으로는 아무 죄를 안 지었다고 해도 멸망일 수도 있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이 공자와 대화를 한다면 대화가 통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순전히 신령한 말씀이치의 도덕성을 말하는 거고, 공자는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자기의 양심에서 나온 삼강오륜의 도덕성을 말하는 거다. 예수님이 공자를 보고 ‘당신, 고치시오’ 하면 공자는 고칠 게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공자를 만들었느냐? 주님이 만들었다. 사람을 만드신 주님이 사람의 속을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달으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기준이 어디 있는지 다 아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는 건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넘어지도록 가르치면 그 다음 것은 쓰레기로 다 통하는 거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고 타락된 인간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모른다. 그 지식을 가지고는 모른다. 그 지식의 기준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것 눈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시감성에서 기준을 찾는 고로 그게 벌써 멸망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하나님을 세우는 게 아니라 세상을 세우게 된다. 사람이 이런 상태라면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교만해서 사는 것이고, 기독교 교인들이 이런 상태라면 하나님 자리에 자기의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을 세운 것이다.


이걸 개인적으로 보면 구약시대처럼 그건 산당이다. 산당은 숲속에 있어서 잘 안 보인다. 그런 것처럼 자기 개인적인 소원 목적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못 본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소원 목적이나 가치판단의 지식이 입으로 통해서 나오는 것이니, 이는 그런 것이 자기 마음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므로 성령의 눈으로 보면 그게 산당인지 주상인지가 나오는 거다. 그래서 고치라고 하는 것이다.


예배당 건축을 할 때는 남의 돈을 빌려서 하는 것보다 다 준비해서 하면 된다. 교인들은 하나도 준비가 안 돼 있는데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예배당 건축을 하면 교인들이 다 갚아지느냐? 교인들마다 사업이 잘 돼서 헌금이 나오느냐? 세상의 물질바람이 불어서 은행에서 빌린 돈이 제 때 안 갚아지면 무슨 꼴이 되겠느냐?


예배당 건축이나 부요 사업 취직자리 교회부흥 등등 이런 걸 목표로 삼고 믿는 거는 그런 걸 하나님 자리에 세운 거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없다. 불붙고 불타고 썩을 거, 변질되고 변동될 걸 목적으로 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걸 역사적으로 보면 이방인들이 성전 안의 번제단에 돼지를 올렸는데 그런 짓을 하는 사람 속의 정신 사상이 세상이더라. 세상이니까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런 짓을 하는 거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한 걸 단순히 돼지를 번제단에 올렸다고 하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올려서 조롱하고 하는 그 사상을 봐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상 즉, 세상 것을 갖다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없어진다.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이 성전에서 돼지를 바친 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요 우리에게 보여주는 보조계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가 멸망의 가증한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기도로 올릴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하는 것은 자기의 신체라도 하나님의 기본 구속을 받은 신체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드려질 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기가 술이나 담배를 먹거나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님은 나가버린다.


우리 마음 가운데에 앞서 말한 그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면 자기는 멸망이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 육신적으로 오는 것도 멸망이 된다. 일반적으로도 마음이 근심 걱정이 되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음이 편하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연관성이 그렇게 돼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오면 되겠느냐?


사람이 생각이 발라야 마음도 바르고 편해지고 하는 거지 생각이 비뚤어져 놓으면 그 사람 속에는 항상 귀신의 감화성이 들어있어서 기회를 타서 푹푹 튀어나오려고 한다.


일반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느낌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 속의 정신 사상이 질적으로 어떤 거다’ 하는 걸 모른다. 믿는 자기는 멸망될 것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것처럼 자기 마음 가운데 무엇이 턱 앉아있는 건지를 심사해 봐라. 자기 몸을 만드신 이는 주님이시다. 그러니 깨끗하고 거룩하고 좋은 것만 들어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더러우면 누가 그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느냐? 귀한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자기 성질대로 살면 자기 스스로가 옛사람이 주격이 돼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네가 그러냐?’ 하고 함부로 취급을 한다.


만약에 교회적으로 가르침이 세상이 주격으로 들어가 있다면 거기서 탈출해야 한다. 이건 뭣과 같은가 하니 바로 왕이, 세상성이 통치하는 교회와 같으니 그런 교회는 바로 왕의 교회이므로 거기서 탈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광야로, 하나님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신앙의 자리로 탈출해야 한다. 안 그러면 열 가지 재앙을 다 맞는다. 열 가지 재앙을 영의 눈으로 보면 자기 몸 안팎에서 다 일어난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하여 그 관할 안에서 낮은 곳에서 통치를 받는 자들인데, 낮은 사상의 통치를 받는 자들인데, 세상적으로 흐르는 걸 보고 느낄 때는 생명의 말씀의 봉우리로 빨리 올라가라는 말씀이다. 자기가 그 곳 그런 신앙의 수준에 있으면 너는 재앙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신앙이 낮은 차원의 수준에서 살지 말고 높은 수준을 찾아 올라가라는 것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 말고.’ ‘지붕 위에 있는 자’란 의식주를 초월한 신앙수준을 말한다. 지붕에서 내려가게 되면 집안에 있는 소유성을 생각하게 된다. 뭘 가질러 가고 뭘 가질러 가고. 기도하면서 자꾸 뭘 이뤄달라는 게 자꾸 뭘 가질러 가는 식이다


그러니까 물질의 소유욕을 가지면 이건 지붕에서 내려가는 것인데, 내려가면 붙잡혀서 못 올라온다. 집안에서 누가 불러도, 뭘 준다고 해도 그 신앙의 수준이 본질의 위치나 신분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 소원 목적적으로. 내려가면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 신앙의 성장이 안 된다.


기도 중에 집안의 소유욕을 찾는 것도 지붕에서 내려오는 거다. 그러니까 네가 살고 죽는 거, 너의 보호대책이 물질의 소유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16절: 밭에 있는 자는 자기의 백배 천배의 소득을 위해 일하는 자다. 그런데 일을 하다 말고 뒤의 겉옷을 가지러 간다는 것은 앞으로 안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밭에서 일을 하게 되면 일을 다 끝내고 뒤로 돌이켜야 하는 것인데 본문을 보면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했으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을 하다 말고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뒤의 겉옷을 가지러 간다’는 것은 앞으로 안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밭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두었으니 미래적으로 소출이 없다. 생산이 없다. 열매가 없다. 이걸 영적으로 보면 좋은 밭을 만들기가 힘들어서 그만 두고 자기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 자기의 결실은 없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열매를 보려고 하시는데 그게 없다. 자기 속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듣고 그 이치대로 된 사상 정신이 속에서 여문 그게 자기 열매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자기 열매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것은 자기의 보호대책은 물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는 급하니까 시간적 생각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