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1-7)

첨부 1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1-7)  

 
최근 리더십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의 탁월한 리더인 세종대왕에 대한 책이 여러 권 출판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지도력의 탁월성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 가장 큰 업적은 한글창제입니다.
21세기 컴퓨터 사용에 가장 적합한 글자, 소리글자로 되어있어서 말만 할 줄 알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쉬운 글자.
서기1436년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반포의 뜻을 훈민정음 어지()라고 하여 임금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사이 말로하면 이렇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동기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큰 인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정한 것’입니다. 
딤후 3:1,3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롬 1:31절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정이 메마른 시대, 눈물이 메마른 시대, 감정이 메마른 시대에 우리는 무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식학생, 지하철역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의 얘기가 익숙해져가는 이 시대야말로 긍휼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시인 도정환은 ‘누구나 꽃이다’라는 시집에서 ‘따뜻하게 안아 주세요’라는 시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여자만 그렇게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도 누군가 나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고, 늙고 쇠잔해져가는 사람들도 /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사랑받기를 갈구합니다.
우린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먼저 안아 줘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1. 산상수훈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엘레에몬’으로서 ‘몸의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즉 긍휼이란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은 생명이 잉태되는 자리입니다.
즉 긍휼히 여길 때 생명의 회복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타인에 대하여 긍휼히 여긴다는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과 자비를 잃어버리고, 무섭게 경색된 비판과 정죄에 갇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인에 대한 긍휼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5:38-42절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2. 그러면 어떻게 긍휼을 베풀까요?

잘 들으시고 삶에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1) 받는 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베풀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베풀면 오히려 그것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감을 주고, 괴로움을 끼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① 동정(sympathy)- 윗자리에서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동정이란 베푸는 자의 입장만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동정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② 공감(empathy)- 아랫자리로 내려와서 같은 자리에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이란 받는 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쌍방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긍휼은 공감이 되어야 합니다.
공감이 되면 감동을 줍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고아원방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성탄절에 고아원을 방문하여 위문품을 앞에 놓고 고아들과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아원을 방문했다는 증거로 삼으려고 하는지, 아니면 신문에 내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사진을 찍습니다. 

위문품을 전달하는 것은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위문품을 앞에 놓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고아원에 관하여 쓴 책들을 보면, 고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위문품을 앞에 놓고 사진 찍는 거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입을 비죽거리면서 ‘야, 사진 박아주러 가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동정은 상처를 주고 모욕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보십시오! 
우리가 왜 그렇게 예수님을 좋아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자리인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저 천상에서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시고 야단이나 치시고, 책망이나 하셨다면 저는 예수님에 대하여 크게 매력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셔서 일찍 여윈 아버지 대신 가족을 거느려 보셨고,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받아보셨고, 채찍도 맞아보셨고, 문둥병자의 손도 잡아보셨고, 눈물도 흘려보셨고, 백성들의 하릴없는 삶에 답답해하시기도 하셨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공포도 겪으셨고.........
복음서를 읽노라면 그냥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삶이 통합니다.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긍휼은 받는 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베푸는 것입니다. 

2) 즉각적으로 베풀자.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은 도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도를 나중에 따르겠다고 미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하겠다.’,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때 하겠다.’, ‘아이들이 다 크면 하겠다.’, ‘집을 산후에 하겠다.’는 이유로 긍휼 베푸는 것을 미루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평화하면 평안하다.’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믿지 않는 집안으로 시집을 간 어느 며느리가 제사 때문에 많은 신앙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문제를 덕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다가 롬 12:1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 구절을 보다가 ‘제사’라는 말이 눈에 번쩍 뜨였습니다. 

이 믿음이 좋은 며느리는 앞 뒤 구절은 생각지 않고 그저 ‘산제사’라는 단어만 보고 ‘아 기독교의 제사는 살아계실 때 드리는 것이구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생신 때, 결혼기념일 때, 윤순회갑 때, 은혼식 때…아무튼 기념될만한 때만 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을 차리고,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시부모님들이 감복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네가 믿는 예수, 나도 믿을 란다.”하시더랍니다. 
꾸며낸 얘긴지 아니면 진짜로 있었던 얘긴지는 모르지만, 효도도 살아계실 때, 즉각적으로 베풀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3) 주님으로부터 한없는 긍휼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베풀자.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긍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긍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요한1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요한이 한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먼저 목숨을 버리신 한없는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계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두렵고, 떨렸으면 차라리 ‘산들아 나를 덮으라. 바위야 나를 덮으라.’ 했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저는 정말 그래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다윗이 언제 행복감을 느꼈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권을 장악했을 때입니까? 배추속잎 같은 말쑥한 자식들을 낳았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그때에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때는 허물의 사함을 받을 때, 자신의 죄가 가려질 때,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이런 긍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좀스럽고 너무 배은망덕하고 너무 답답해요.

3. 이제 긍휼을 베풀 때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마5:7)

1) 이웃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여수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영광김씨 고택인 봉소당(鳳巢堂)이란 집이 자리잡고 있답니다. 
대지 5,000평에 한옥으로 된 사랑채·행랑채·본채가 위풍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집은 몇 년 전에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에도 등장했습니다. 
이 저택이 건립된 시기는 구한말입니다. 
현재 12대 후손 김재호(66)의 증조부인 김한영이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지은 집입니다.
당시 김한영은 1만2,000석 부자로 유명했다고 합니다.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평소 소작인들에게 후대했다고 합니다. 

평소에 쌓아둔 이런 긍휼이 난리가 났을 때 그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이층집에서 취조를 받는데 위원장이 보초 서는 두 사람을 아래층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더랍니다. 
그리고 위원장은 얼굴을 가리고 신문을 보더라는 거지요. 
한참 신문을 보더니 아예 뒤돌아 앉아 신문을 보더라는 거지요.
그때까지 김한영은 “왜 심문을 하지 않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 신문을 보자, ‘아, 도망치라고 기회를 주는구나.’하고 창문을 열고 도망쳤답니다.

그 위원장이 바로 평소 이 집의 도움을 받았던 바로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의 주인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줌으로써 보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난리통에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집은 현재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랍니다.
긍휼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약 2: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우리가 그날에 하나님을 뵈면 무엇을 사정하게 될까요? 
그때 가서도 잘 살게 해달라고 하겠어요? 
그때 가서도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겠어요? 
먼저,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천주교의 죽은 자를 위한 연도에 제일 많이 나오는 구절이 ‘긍휼이 여기소서.’입니다.

라틴어로 ‘엘레이 에메’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되묻는 말씀은 '너는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느냐?'라는 것이랍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는 동안 긍휼을 많이 베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길 바랍니다. 
꼭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