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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케 하시는 예수님 (막 5: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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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케 하시는 예수님 (막 5:24-34)


열 두해 혈루증 걸린 여인의 상처와 아픔
오늘 우리는 12년동안 자궁에서 피가 흐르는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본문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이 병은 여인들에게 생기는 병인데, 이 병에 걸리면, 하혈을 하므로 몸 속에서 피가 빠져 나가 심한 빈혈히 생기기도 하고 피가 모자라 온몸이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 더 힘든 것은 이 병 자체가 부정한 병으로 인식되어 그 병에 걸린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혀 그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기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녀를 향해 부정한 여인이라 하며 조롱하기도 하고 돌을 던지거나 재수 없다고 소금을 뿌리기도 합니다. 이 여인은 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버려진 존재,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이런 고독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존재인 인간은 누군가에게 버림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갖게 되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요, 공통의 상처입니다. 

질병으로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부정한 사람으로 몰려 가정과 사회에서 버려진 존재로 산다는 것만큼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 경쟁사회를 사는 우리들에서 능력이 조금 모자라거나 실력과 배경이 부족하여도 가차 없이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핸디캡이 우리를 사회에서 격리하고, 버려진 자로 살게 만든다는 겁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 여성의 수가 늘어나는 한국사회에서 이들이 겪는 소외의 아픔 또한 클 것입니다. 조금만 우리랑 피부색이나 모습이 달라도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고, 부정한 사람 대하듯이 합니다. 열 두해 혈루증에 고생한 이 여인에 손가락질 하며 그를 외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열 두해 혈루증 여인의 상태를 이렇게 그려 주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전국의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재산도 다 잃고 가정도 잃고 건강도 도리어 나빠졌다고 합니다. 이 병에 처음 걸렸을 때 그녀는 어느 정도 가진 재산이면, 그리고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쉽게 고치리라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가정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의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한 해, 두 해가 흐르면서 그 모든 소망이 끊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칠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것은 죽을 것 밖에 없구나!” 

세상을 기대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비정함과 세상의 삭막함 뿐입니다. 물질만능의 사회는 가진 물질이나 능력, 배경이 없으면 도리어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기대고 살고 계십니다. 이 여인에게 세상은 그저 괴로움을 주고 소망을 잃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에게 복된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어떤 불치병도 고치실 뿐 아니라 돈도 안 받고 무료로 치료하여 주신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여인에게 이 소식은 곧 복음이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1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출발은 하늘보물 창고를 찢어서 우리에게 그 하늘의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출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땅에서 보여 주신 말씀과 치유사역은 하늘의 능력이요. 하늘을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소외되고, 버려지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사 55:1-2)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믿음이 하늘의 능력을 맛보게 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뚫고 바다 건너 거라사 지방에 있는 군대귀신에 들려 고통 받고 있었던 사람을 치유하고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위급하니 고쳐달라는 간곡한 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청을 듣고 위급한 딸을 고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주위에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막 5: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막 5:27-28)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12년 동안 그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지긋지긋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어떠한 의사에게도 고치지 못했던 자신의 병을 하늘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늘의 능력을 맛보는 통로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늘의 능력을 우리 인생에 끌어 들일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막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야이로의 딸을 구하러 가는 길에 이 여인을 고치시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케 했다는 거지요.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이 여인의 믿음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믿음은 자석과 같아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 곁으로 가면 믿음이 바로 하늘의 능력을 끌어 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그저 바라만 보는 믿음이 아닌 믿고 믿음대로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사람들에게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주위에 오기만 해도 부정탈까봐 돌을 던져 멀리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사람들 사이에 들어갑니다. 큰 무리로 에워싸 밀치는 곳을 말입니다. 자칫 사람들이 알아보면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불사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야 산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여인 가진 믿음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초청하시고, 모두를 향한 놀라운 하늘의 선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리에 많은 방해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며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관계입니다. 
목사인 저도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을 꼽으라면 그것도 인간관계입니다. 교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며,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사람이 방해요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이 듭니다. 사람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장벽이 있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을 만나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방해한다 할지라도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에게는 이만큼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자신을 위협하던 모든 조건을 뚫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행동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그 병에서 놓임 받게 했습니다.

저는 소원하기는 질병 때문에 고통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믿음이 주어져 병에서 놓임을 받는 은혜가 있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방해한다 해도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믿음으로 승리하길 바랍니다.
그런데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 여인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무리가 둘러 싸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처럼 (막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을 찾으시려고 합니다. (막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이때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막 5: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사실 이 여인은 불쌍한 여인입니다. 사람에게 치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서 이 여인을 불러 세웁니다. 굳이 이 여인을 찾아 불러 세우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되는 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센스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예수님
조`해리의 창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 네 가지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영역, 두 번째는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 영역, 세 번째는 너는 아는데 나는 모르는 영역, 네 번째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영역입니다.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일수록 첫 번째 영역인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영역이 넓습니다. 마음속에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네 번째 영역인 너도 나도 모르는 영역이 많아지는 것이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영역~

김국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타타타(Tathata)는 산스크리트어(語)로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그런데 우리 자신을 보면 가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사실 우리 자신도 내가 누군지, 지금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나도 모르는 영역을 알고 계십니다. 내 속에 감춰진 문제와 상처들을 주님은 알고 계시는 거지요. 

오늘 열 두해 혈루증 걸린 여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배우는 치유의 원리는 
우리가 밖에서 볼 수 있는 외상이나 질병 속에는 더 깊은 상처와 치유 받아야 할 부분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혈루증을 고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함께 그 상처를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혈루증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아픔입니다. 버려진 자의 아픔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혈루증을 고침을 받았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음의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사람들과의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워 할지 모릅니다. 아니 아직도 이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받으며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어도 엄청난 병고침을 받고도 예수님께 나아가 감사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죄책감에 빠져 살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 여인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찾아서 세웁니다. 그동안 그녀를 아프게 하고 죄가 많아 부정한 여인이라며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앞에 말입니다. 그러고는 선포하십니다. 

(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네 병을 고쳤다 라고 말입니다. 그 많은 군중 앞에서 그동안 잃었던 지위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여인은 믿음의 여인이라고 그녀를 세워주셨던 겁니다. 그래야 그녀가 세상 속에서 자신 있게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도 이 여인을 믿음의 여인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가슴 속 숨겨진 상처를 주님은 보고 계셨던 겁니다. 아니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던 아픔과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은 보고 계셨던 겁니다. 외로움과 버려짐으로 아파하고 골방에서 눈물 흘리며 고통 했던 모든 것을 주님은 보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는 실패의 자리요. 지긋지긋한 운명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고통하던 자리요.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상처의 자리를 예수님께서 믿음의 자리요, 인정받는 자리요. 치유의 자리요, 승리의 자리로 바꿔 놓으십니다. 

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혼자서 상처를 보게 될 때에는 그것이 실패요, 두려움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 상처를 보게 될 때에는 그 자리가 승리의 자리요, 인정받는 자리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이 아프고 쓰라린 상처의 장소가 은총의 장소요, 승리의 장소가 됩니다. 

베드로도 같은 모닥불 앞에서 실패도 하고 승리도 하였습니다. 혼자 있었을 때에는 작은 계집종의 물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는 실패를 경험했지만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다시 찾아오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에서 치유하시고 순교자의 사명을 받는 승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우리의 아픔을 내어 드릴 때, 주님의 우리의 숨겨진 상처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를 온전히 회복케 하시는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주님이 치유하십니다. 

올해도 회복케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의 아픔의 장소가 회복의 장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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