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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01

소명의 확장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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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확장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낯선 자로 살아가라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얼마 전부터 날이 착해지더니 立春 무렵이 되자 꽤 포근해졌습니다. 해가 잘 들지 않아 빙판으로 변했던 이면도로도 이제 거의 다 녹았습니다. 계곡에는 벌써 눈석임물이 졸졸졸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아직 머뭇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봄은 벌써 저만치에 와 대기 중입니다. 이제 기지개를 펼 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떠십니까? 설날 인사를 건네온 후배에게 제가 덕담이랍시고 한 말은 “세상에서 늘 낯선 자로 살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덕담치고는 좀 세다는 느낌이 들지만 저는 진리를 구하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이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뭔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학자의 말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자신의 고국을 여전히 달콤하다고 느끼는 이는 아직 마음이 여린 초보자다. 어디를 가나 다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낯선 나라처럼 느끼는 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

설명이 좀 필요한 말이긴 합니다만, 여린 영혼일수록 자기에게 익숙한 세계에 집착한다는 말일 겁니다. 아기는 엄마가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면 금세 울음을 터뜨립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이 불안함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 제집인양 편안합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이드는 그런 이들보다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으면서 늘 새로운 가치와 세계를 찾아가는 이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해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한 후에 그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히11:13)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었습니다.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신산스런 삶을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는 말로 가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보고 안 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당신을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시인 윤동주가 주님을 가리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던 것도 그런 뜻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의 인간적 외로움에 깊이 감응하고 있습니다.

• 물러난 자리에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경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곳은 갈릴리 북부의 해안 지대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레바논의 베이루트 지역입니다. 주님이 그곳에 가신 까닭은 휴식을 겸해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힘겨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감히 육체노동만큼이나 힘든 것이 정신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시간만 들어주어도 아주 힘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힘겨운 사역을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엎드림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조금 심각하십니다. 치유하고 돌보는 일이 힘겨워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고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전통과 관습은 때로는 생명력을 잃고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곤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알짬이 빠져나간 종교적 규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사람들에게 일깨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했지만 기득권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위선자’라 하셨고,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발이고 선전포고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가 그른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감지하셨기에 잠시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잠시 물러나 쉬면서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침묵(silence)과 홀로 있음(solitude)은 영적인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분주한 삶을 살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월요일을 묵언黙言의 날로 정해놓고 그대로 지켰습니다. 주님이 굳이 두로와 시돈까지 가신 것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 머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님의 바람은 한 가나안 여인의 출현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달려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22)하고 외쳤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이 절박한 외침을 못 들은 척 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은 입을 다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이 귀찮은 방해꾼을 어찌하든지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은 불편합니다. 주님이 여인의 절박한 상황을 긍휼히 여기시어 뜸들이지 말고 여인의 어린 딸을 고쳐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으신 듯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 차가운 말씀입니다. 귀신들린 딸로 인해 삶의 희망이 끊어져 버린 한 여인, 사회적 편견과 냉대를 견디다 못해 자기들의 고향 땅을 떠나 살 수밖에 없는 여인의 아픔에 주님은 어찌 이리도 무정한 반응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예수님도 나라와 인종과 문화적 배경이라는 틀 속에 갇혀 계신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과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 절박한 모성

지금 우리는 두 종류의 절박함이 마주친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주님은 심각한 적대감에 직면하여 자신의 소명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시점에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비참함을 잊을 수 없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딸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적의에 찬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여인 말입니다. 문제의 크기가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주님의 고민은 역사 전체와 관련되는 문제이니 크고, 여인의 경우는 개인의 문제이니 작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문제의 크기가 다르다고 절박함조차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전쟁과 테러와 부정의의 현실을 다루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괴로움을 겪고 있는 한 개인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냉정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여인은 예수 앞에 달려 나와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만 보아도 여인의 절박함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비정합니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개’라는 단어가 애완용 강아지를 뜻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님의 어조가 경멸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석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인의 믿음을 떠보기 위해 그랬다고 해석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 예수님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홀로 있는 시간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어떤 일에도 연루되고 싶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완벽한 인간으로, 모든 상황에 적합한 답을 갖고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실수하실 수 있고, 문화적 종교적 편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도 영적인 발전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발전 과정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낯선 타자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매우 중대한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인들에게 국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딸을 사랑하는 한 어머니로서, 곤경에 처한 한 인간으로서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는 말을 듣고도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 ‘개’로 취급 받으면 어떻습니까? 딸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모욕이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여인의 심정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 소명의 심화

여인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접속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과의 갈등,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염려는 불현듯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지금 여기’로 돌아왔고, 현실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자각하셨습니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28) 마침내 여인은 바라던 것을 얻었습니다. 고통의 연대가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도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한 여인을 통해 주님은 자신의 소명을 더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종, 민족, 문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절박한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 만남은 예수님께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이 여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소명을 확고하게 만든 이 역설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영적인 성장 혹은 변화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은 어쩌면 우리를 참 인간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전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소중한 중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쓰고 남은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동정이나 시혜 행위가 아닙니다. 그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안전한 삶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사서 고생하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사서 고생할 때 우리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우리 속에 있는 선의 씨앗들이 싹이 트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연휴 기간 중에 읽은 책 가운데 나오는 한 이야기가 내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법무부에서 일하던 게리 하우겐이 쓴 책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라는 단체를 조직해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성적 착취, 노예, 억압의 희생자들을 구조하는 일이 그와 동료들의 일입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에서 믿는다는 것은 위험을 선택하는 거라면서 자기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난생처음 미식축구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엄마에게 이 정도면 됐다면서 이제는 연습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반짝이는 헬멧, 널찍한 어깨 보호대, 새 유니폼을 받아들고는 우쭐한 기분에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지만, 며칠 연습을 해보니 보통 고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몸싸움이 싫어서 그는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아홉 살짜리 아들을 대충 파악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미련이 남아 망설이는 아들을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유니폼과 장비는 내일 감독님께 돌려 드리면 되겠구나.” 게리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유니폼만 입고 몸싸움은 별로 안 해도 되는 그런 선수가 될 길은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몸싸움이야말로 미식축구의 핵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몇 번의 충돌을 잘 견딘 후 그는 미식축구를 아주 즐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정의를 위한 용기>> 중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멋진 유니폼과 장비를 챙겨 입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넘치는 불의에 항의하고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영생의 길입니다. 겨울의 한복판에 봄이 들어선 것처럼, 우리는 공평함이 없는 세상을 치유하는 하늘의 사람으로 세움 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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