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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상으로 돌아가라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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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돌아가라 (눅 9:28-36)
 
 
꽤 긴 설명절 연휴가 오늘로서 끝이 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한 주간 황홀한 페스티발이 끝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차를 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쉽고 섭섭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 사람들은 오히려 명절연휴가 끝나는 것이 시원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이제 일상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명절기분을 정리하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영화배우나 연극배우가 연기중의 신분을 마치 자신의 실재 신분으로 착각을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연기자의 연기는 지속적으로 가지는 자기 자신의 신분은 아닌 것입니다. 연기자는 연기의 순간을 떠나면 재빨리 일상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잠깐의 그 연기상의 황홀한 경험을 떨쳐내버리지 못하고 방황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이 망가질 뿐입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전두환역을 했던 연기자가 폭력을 행사해서 문제꺼리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소설속에 영화속에 주인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놓는 순간, 영화관을 벗어나는 순간 소설속의 주인공도 아니며 영화속의 주인공도 아닌 것입니다. 일상의 자신의 모습으로 가능한 한 빨리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생긴 두 가지 일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는 29절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30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변화되셨고,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깊이 졸다가 깨어나 '죽었던 옛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된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베드로 자신이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보고 체면을 따지고 절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무의식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본성이 들어난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보기를 원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 산위에서 영광 중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고난 받고 죽으러 가지 마시옵소서"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특별한 경험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경험이 계속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원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런운 모습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고 능력과 권세로 나타나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경험하게 된 때를 누가복음 기자가 특별하게 기록해주고 있는데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팔일 후, 언제부터 팔일 후라고 했습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난 후 팔일동안 제자들은 어떤 상태였겠습니까? 패닉상태, 공황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산상에 올라와서도 그들은 깊이 잠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바로 뒷부분에 보면 다른 9명의 제자들도 평소와는 다르게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놓고도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 영적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신임하는 3제자가 저 정도이니 다른 제자들의 상태야 말할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 일상적인 경험으로 수없이 많이 해왔던 경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이 특별한 경험이 계속해서 지속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러 있으십시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이는 나의 아들이니 곧 나의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산을 내려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산 골짜기와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일상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와 엘이야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도 바로 이런 내용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안됩니다. 여기에 머무릅시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특별한 경험 속에 빠져 거기서 헤어나오기 싫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으나 일상생활의 지속적인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회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경험에 무게를 두고 지속적인 삶을 흔들어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별한 순간적인 경험에 집착해서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일상을 소홀리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연휴나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를 치르고 나면 그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탈력을 잃은 고무줄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제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설명절을 맞아서 모두가 다 특별한 경험들을 하셨습니다. 헤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오랫만에 고향의 친척들 친구들을 만나고 과도한 지출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이 끝나고도 여러날 동안 그 휴유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예로 참 많습니다. 명절의 기분, 절기의 경험은 일회성의 특별한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고 하셨습니다. 귀에 담아두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일상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변화산상의 특별한 경험에서 빠져 헤어나오기 싫어했을 때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강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의 외아들인 한 소년이 귀신들려 입에 거품을 품고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에 함께 올라가지 않은 9명의 제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고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지가 영광스러운 산위가 아닌 문제투성이인 산 아래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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