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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원리 (시 136:1-9, 히 12:9-11,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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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원리 (시 136:1-9, 히 12:9-11, 눅 17:11-19)


지난 구역모임 때 나누었던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열려고 합니다. 

시를 쓰시는 어떤 집사님이 암 판정을 받고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입원 첫날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암 선고를 받은 환자가 썼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내가 암이라면 모든 환자들의 친구가 되니 좋습니다.”
“내가 치료된다면 그들에게 또한 희망이 되니 좋습니다.”
“또한 치료되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어 좋습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으니 저는 좋습니다.”

암을 감사하는, 한마디로 암에 대한 감사의 시였습니다.
이 시에는 대부분의 암환자들이 처음에 겪게 되는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원망과 탓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심성이 배어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예 감사가 무엇인지 또 감사를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 좋을 뿐 거기에 대한 감사의 정은 본성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사는 다른 감정과는 다르게 학습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감사가 무엇인지 배우고 감사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고마움’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남이 베푼 호의나 도움’에 대한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그 어떤 것만이 호의요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까 그 암에 걸린 집사님처럼 그 이상의 무엇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법을 다르게 배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어떤 조건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상황에 처해서도 어떤 사람은 불평과 원망을 캐어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결국 우리 각자가 어떤 해석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범사에 감사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감사에도 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매년 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차원 높은 감사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그리고 우리도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새로운 차원의 감사가, 과연 특출한 신앙인의 몫으로만 남겨져 있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어 그리 대단하냐? 이방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는 사랑한다’(마 5:46~4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감사에 있어서도 신앙인들의 감사는 믿지 않는 이들과는 달라야 함을 내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만 감사한다면 그것을 어찌 감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원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잘 배우고 익힌다면 우리도 새로운 차원의 감사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구약성서를 통하여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다운 감사에 대한 원리를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감사의 원리는 감사자의 해석을 태어나게 하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만 바라보이는 이 마음의 창문에 대하여, 이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은 전형적인 감사의 노래이자, 믿는 이들의 감사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사는 해석이라고 했는데, 믿는 이들은 어떤 창문을 통하여 세상을 보아야 불평 아닌 감사의 그림만 그려낼 수 있는가? 오늘 시편 노래는 잘 깨닫도록 합니다.

시편 136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10-22;23-26)
먼저는 1절에서 9절의 창조세계에 대한 감사, 그리고 10절부터 22절까지 구원사역에 대한 감사, 마지막으로 23절 이하에서 내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감사가 그것입니다.

1절에서 9절까지의 첫 노래에서 우리는 감사의 첫째 원리를 배웁니다. 이 첫 노래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잘 스며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한다면 존재론적인 인식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시편 136편의 첫째 노래는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에 의해 지어져있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부분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서로에게 긴밀하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창조되었다는 깨달음이 시의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화엄적 구조’ 혹은 ‘인드라망’이라는 유비를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늘과 땅과 물과 바람과 빛은 물론이요, 나무와 숲과 풀과 벌레와 곡식과 과일들이 모두 서로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끈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서로 불가분의 도움을 주는 사랑의 관계로 창조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장에 피해를 주는 원수같은 이들조차 알고보면 모두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여정에 세워주신 스승같은 이들이요 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부대끼는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혜택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피조물이 다 그물망처럼 짜여져 서로를 위하여 살고있습니다.

이 관계의 틀을 깨닫는 것이 감사에 이르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우리가 다일의 진지알아차리기를 할 때 하는 일이 바로 이 감사의 원리를 우리 마음의 창에 가져다 거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이 땀이 담겨 있는바, 내 인생과 주변에 있는 삼라만상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삼라만상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사랑, 곧 삼라만상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존재론적 원리는 우리 인생사에서 맞게 되는 모든 인간과 사물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바꾸게 합니다. 오늘 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은 예사로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구경꾼들이 아니라,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선물이라는 것 - 이 원리를 잘 깨닫는 것이 감사함에 이르는 첫째 관문인 것입니다.

감사의 두번째 원리는 오늘 시편 10절이하에서 발견됩니다. 시편기자는 10절에서 22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민족의 장엄한 엑소더스를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더불어 23절이하에서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났던 구원의 사건들을 회상하며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의 첫째 원리가 정적인 관계에 대한 통찰이었다면 두번째 원리는 동적관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나와 우리 가족과 우리 민족과 세계가 겪고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통찰입니다. 첫째 원리에서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제 우리는 두번째 원리에서 모든 사건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 포함됩니다. 세계역사와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회피하고 싶은 시련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엑소더스의 과정일 뿐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분쟁에서 참된 평화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넘어가기 위한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께서 참된 구원을 위하여 지금도 역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 또한 내 인생 한 복판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리하여 우리가 걸림돌이라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구원을 위한 디딤돌들이라는 것 - 이와같은 구원사적 사건해석이 바로 두번째 감사의 원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이 구원의 원리는 우리를 참된 소망으로 붙들어줍니다. 오늘 서신서를 통하여 듣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시련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사랑의 징계, 사랑의 매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히 12:10) 이와같은 구원사적 해석은 우리 시대의 역겨운 모순과 인생여정에서의 모진 시련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용하시는 방편의 하나로 해석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먼저 감사의 기본원리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구원사적 해석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세상을 섭리하셔서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이라면 우리는 이미 감사의 원리를 늘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은 이 감사의 원리를 우리 마음의 창으로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감사의 원리가 언제나 내 마음을 지배함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지난 한 해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성찰해 보자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감사의 원리에 비추어 지난 해를 되돌아보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때론 빨리 벗어나고 싶고 짜증나는 시기처럼 느껴졌던 일들도 창조세계의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관계의 원리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의 원리에 따르면, 감사의 제목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추수감사헌금봉투에 소중한 봉헌물인 감사의 기록을 넣으셨을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이 정리했던 정성된 봉헌물 - 곧  감사의 원리에 따라 해석된 지난 한 해의 일들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주보에 실은 감사의 기도를 같은 마음으로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처럼 감사의 원리에 비추었을 때 감사하지 않을 일은 없습니다. 일체가 은혜요 감사일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더 깊이 명심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감사는 육화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감사의 세번째 원리입니다. 앞의 두 원리가 해석의 원리, 기초적 원리라면 이제 만나는 세번째 원리는 실천과 관련된 원리입니다.

오늘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는 감사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안내받습니다. 감사함을 깨달았으면 그에 마땅한 감사의 표현이 따라야 한다는 자명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의 도구, 사랑의 통로가 된 이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드러내지 않는 한 그 믿음과 구원은 완성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명의 환자가 치유를 받았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를 드린 이는 하나뿐이었습니다. 

마음속에 만 가지 생각을 품고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법입니다. 무릇 모든 신앙행위와 마찬가지로 감사도 구체적인 대상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반쪽 감사만도 못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하나님과 직통교류만을 생각한 나머지 감사의 첫째 원리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놓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통로들 - 곧 우리의 은인이 되고 스승되어 주는 모든 사람들과 삼라만상에게 감사드린다는 것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과 피조물들에게 감사하는 구체적 행위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치유받은 아홉 환자들은 이점을 놓친 것입니다. 뛸 듯이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된 인간예수에게 감사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표현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구원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땅에서 풀지 못하면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감사도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관계하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행위로만 완성된다는 진리를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감사의 표현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를 드릴 당사자에게 직접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감사는 늘 고백되고 표현됨으로써 훈련되는 학습과정이며 우리 믿음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사의 원리를 되새기고 감사를 표현하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듯이 우리의 감사 또한 꾸준한 훈련을 통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것을 매 주일마다 예배를 통하여 지속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공동체적인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세계에 대한 것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응답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감사의 시간이요 감사의 훈련이요 감사가 몸에 배이게 하는 반복학습입니다. 특별히 성찬식을 통하여 이 감사의 훈련은 공동체적인 축제로 승화됩니다.

성찬식이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유카리스트’인데, 이것은 직역하면 ‘감사’라는 뜻입니다. 일체가 은헤임을 거듭 되새기며 한 마음과 한 입술로 찬양을 드리는 행위가 성찬식 안에 녹아있습니다. 성찬식 서두에 우리는 ‘유카리스틱 프레어’라는 대감사송을 바칩니다. 
“언제어디서나 감사드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요 도리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열거하며 인류역사와 우리 인생을 감사의 원리에 입각하여 거시적으로 되돌아봅니다. 이처럼 예배때마다 반복하는 감사의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감사의 원리에 젖어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생활로 완성되듯이 우리의 감사도 삶 안에서 구체적 행위를 통하여 드러날 때 완성되는 법입니다. 
방금 우리는 감사의 원리에 비추어 지난 한 해를 반추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모여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치유받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처럼 감사의 대상이 되는 분들에게 나아가 구체적인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고 추수감사절의 의미도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봉헌함에 한 해 감사의 제목들을 써서 주님께 올리는데, 이제는 그 감사제목들을 탄생시켜준 대상들 - 하나님 사랑의 통로들에게로 우리의 정성을 직접 전달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 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지금 마음속으로 결단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 생활예배를 통하여 실천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감사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학습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조세계의 관계의 원리와 사건들에 대한 구원사적 해석의 원리, 그리고 이 원리를 구체적 행위로 실천하여야 완성된다는 완성의 원리,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일상화되고 훈련되어야 성장한다는 훈련성장의 원리까지 - 감사의 원리들을 종합해 보았습니다.
 
이 원리들은 감사가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해석이요 학습의 결과라는 사실로 연결됩니다. 어느 장소 어느 때를 막론하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나오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오는 법입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풍요나 결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필경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려면 이처럼 감사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고 바르게 실천(훈련)하여야 합니다. 감사의 원리는 믿음과도 직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감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감사는 결국 우리를 바른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온유함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에 기쁨으로 드리는 이 예배는 감사의 축제가 되고 감사하는 열정을 촉발하는,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감사의 영안이 열리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치유받고 되돌아온 한 사마리아인처럼,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입양했던 손양원목사님처럼, 감사의 원리를 온전히 깨닫고 실천하는 감사의 완성자, 믿음의 완성자 되시는 축복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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