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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려야 합니다 (창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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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야 합니다 (창 12:1-16)


인간들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위대한 교과서인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대단히 미련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한 예로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을 때, 다른 사람이 복 받는 그 까닭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습니다. 나만 특별한 이유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던 그 이유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받은 복은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어쩌다 한두 번 실수를 해서 겪었을지라도 그 다음은 겪지 않아도 되는데 되풀이 됩니다. 받은 복은 잠시로 그쳐버리고, 잃어버리고 난 다음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그런데 복을 누리는 것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인생들을 보고 위대한 교과서인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미련한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이라는 멋진 동산에게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 누가 어떻게 애를 써도 그런 동산을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복을 주셨는데,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라는 사람이 그런 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문제였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런 복을 받게 되면, 흔히 말하는 세상적인 좋은 것을 받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한 것이 자칫 잘못하면 화를 주시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께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테스트를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다른 것은 전부 다 먹어도 되지만 하나만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더 맛있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만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먹지 말라고 했으면 먹지 않으면 되는데. 먹고 실패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인류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아를 생각해봅니다. 노아 한 가족만 홍수에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홍수에 모두 다 죽는데 그 사람들만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족을 번성케 하시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힘을 모아 우리가 하늘꼭대기까지 높아지자, 하나님까지 높아지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생각하였고, 결국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흩어버렸습니다. 또 인간은 쫓겨났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어떤 복을 받으면, 큰 복이든, 작은 복이든 그 이유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어려움을 받아도 똑같습니다. 이것보다 더 크든지 적든지 옛날에 어려움을 당한 그 이유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홍수 가운데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에게 당시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하나 지시하셨습니다. 다 털고 일어나서 하나님 당신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주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았던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다고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이집트로 갔습니다. 가서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아주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누이동생을 보니 너무 예쁘고 좋아서 법적으로 정당하게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완전한 계약에 의해서 데리고 갔으므로 이집트 왕으로서는 잘못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라는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궁으로 들여보내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소, 노비, 나귀, 낙타를 얻었습니다. 정당하게 지참금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이 성경을 볼 때마다 그 광경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아내는 바로를 따라 바로 궁 안에 들어갔고,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도 못한 채 궁 옆에 앉아 아내가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몰골입니까? 

가만히 보면 아브라함이 복 받은 이유는 옛날에 다른 어른들이 복 받은 이유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당했던 이유도 옛날 어른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의학적인 용어로 ‘역사 소화불량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역사를 소화 못시킨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소화시켰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런 비슷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여, 뻔히 보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이런 일이 많습니다. 인심이 좋아서인지 사람이 좋아서인지 당한 일을 또 당하고 또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하겠는가를 우리들의 과제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도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어른들이 당했던 고통과 실패를 되풀이해야 되겠는가? 기쁨은 잠시 슬픔은 오래오래, 복은 조금 받고 고통은 큰 것 이런 일들을 자꾸 되풀이하고 살아야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12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까닭을 봅니다. 7절에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그냥 문자적으로 하시는 말씀에 비해 엄청난 복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는데 모든 복을 넘치도록 주겠다는 것입니다. 자손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네가 마음껏 다 누리고, 너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자손들도 오래오래 누릴 수 있는 복을 주겠다는 말씀이고 이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면 이미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생각할 것은 아브라함이 이런 복의 선언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캐도릭에서는 절대순명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하나님의 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캐도릭의 수녀님들입니다. 캐도릭은 사다리 계층으로 높낮이가 있습니다. 개신교는 목사는 목사이고, 장로는 장로이며, 집사는 집사로 각각 일을 하는 것이고, 높고 낮은 것이 없지만 캐도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저 위에 계시고, 주교님은 또 그 위에 계시고, 교황님은 더 위에 계시는 아주 높은 분입니다. 

신부님들도 대체로 성도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성도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사실은 수녀님들입니다. 수녀님들이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존경도 많이 받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절대순명입니다. 절대 순결 등 몇 가지 덕목이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절대순명입니다. 절대적으로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이 좀 바보 같은 일 같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순명이 제일 많은 존경을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인생 살면서 많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은 절대순명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똑똑한데 왜 절대 순종합니까? 그러나 절대 순종, 절대 순명 이것이 비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런 절대 순종을 하는 것일까요?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을 수 있겠지만, 그 당시는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죽으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에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신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아닌 다른 어디에 가서 산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특히 초청 없이 다른 부족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그 부족을 공격하는 일이고 강탈하는 일이기 때문에 침범으로 생각하게 되므로, 곧바로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과 똑같습니다. 조련사들이 사자를 조련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참 멋지게 잘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조련사들이 절대적으로 지키는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자가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그 영역 안에는 절대로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조련사가 아무 데나 가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의 경계선이 있으며, 경계선 안에는 한 발도 집어넣지 않습니다. 사자는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저 사람은 나를 보호해주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자기 보호자,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침범하고 자기를 공격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당시에 자기 부족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가서 산다는 것은 이 처럼 사자가 쳐놓은 경계선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므로 죽음과 같습니다. 

또 하나 더는 그 당시에는 부족의 보호가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동물과 똑같습니다. 무리를 지어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있는데 어떤 동물들은 무리에서 쫓겨납니다. 쫓겨나는 것은 너는 우리 무리를 떠나서 죽는 것이 나으니 죽으라고 쫓아 보내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 등에서 동물의 세계를 보면 항상 약탈자들이 노리는 것은 무리를 벗어나는 동물입니다. 심지어 코끼리 같은 큰 동물도 무리에서 떠나면 약탈자들의 타깃이 됩니다. 

오늘 새벽에 인터넷 신문을 보았더니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도된 바가 없었다고 하는데, 악어와 사자가 싸운 내용입니다. 악어 한 마리를 두고 암사자 세 마리가 3:1로 싸우는데, 악어가 먼저 사자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3:1이다보니 나머지 두 마리를 제압하지 못해 결국 세 마리의 사자에 의해서 죽고 그 몸이 갈기갈기 찢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와 악어는 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맹수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설사 이긴다고 할지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동물을 잡아먹으면 되므로 자기네들끼리 싸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싸운 까닭은 무리에서 이탈되어온 새끼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사자들은 무리지어서 살아가는데 그 중에서 새끼 사자 한 마리가 어른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악어가 일광욕을 하려고 나와서 쉬는 그곳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어가 새끼 사자를 덮쳤는데, 이로 인해 암사자 세 마리가 그 악어를 덮친 것입니다. 영국의 의사 한 분이 관광을 갔다 이 광경을 보고 사진을 찍은 것이 오늘 기사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이런 지시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런 놀라운 복을 받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본문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4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카 롯도 데리고 가고 자기 아내와 모든 재산을 꾸려서 그냥 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사람인지라 누구든지 이런 저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4절 뒤에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흔 다섯입니다. “하나님, 제 나이가 얼마인지 아시면서 어떻게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충분히 이런 말을 할법합니다. 혹은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알았습니다. 알긴 알겠는데, 제가 먼저 한 번 가보고 내 아내와 식솔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것도 같은데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서 생각할 바가 참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바보 같고 모자라는 사람 같습니다. 이렇게 살다 어떻게 될 것 같은 생각도 들겠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순종하여 어마어마한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늘 이러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살이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는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2절을 보십시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게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불에 태워서 제사를 지내라는 것인데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순종할만한 일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밤새 고민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민했든지 아침 일찍 일어나 다 준비하고 하나님이 일러 주신 것으로 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런 순종을 하게 했습니까가? 무엇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런 말씀에 순종하게 했습니까? 단 하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일반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주셨던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좀 바보같이 믿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은혜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지는 사람은 가집니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참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니 하늘의 하나님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것저것 하나도 다른 것은 보시지 아니하시고 그저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복 받을 만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복 받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정말로 복 받을 만합니까?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 것 같고, 저것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로 복을 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생각하신다면 아무도 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것 그 무엇을 보고 복을 주시는데 아브라함에게 보신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갔다고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비참한 상황으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왜 이집트로 갔습니까? 가나안에는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먹고 살 것이 없었지만 이집트는 넉넉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당연한가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똑똑해서입니까? 판단을 잘 해서입니까? 단지 하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에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죽을 것 같아서 이집트로 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옛날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옛날에 아브라함을 챙겨주시고 도와주신 그 하나님이 이제 능력이 없어졌습니까? 죽을 것 같다는 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제일 잘 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판단으로 이러다가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 없이, 하나님의 답이 없이 이집트로 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 아내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머리로 이러다가 아내도 빼앗기고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얄팍한 것입니다. 

만약 이집트로 갈 필요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가도록 하셨을 것이고, 만약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할 필요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아내라고 말하지 말고 누이동생이라 말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했습니다. 이것이 실패입니다. 그렇게 실패해서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근이 들어 곧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래도 기다려야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아픔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고통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보다 먼저 아십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지시하실 때까지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답답하더라도, 다급하더라도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런 저런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나도 좀 잘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도 화를 내고 싶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서서는 안 됩니다.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업을 잘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내가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기 전에 나서서 지키려고 하다가 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건강이 없었을 때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내 건강을 내가 다 지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면 다 인도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할 바는 다 해야 하지만 하나님 인도하심 없이 나 혼자 가려고 하고, 나 혼자 내 사업을 지키려고 하고, 내 건강을 내가 지키려고 하고, 나의 자녀를 내가 교육시키려고 하니 이런 실패를 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적은 숫자가 많았고, 아군은 숫자가 적었습니다. 전쟁하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하는데 제사장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제사는 제사장만 지내는 것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그만 자기가 지냈습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씀하셨을 것인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서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기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 되겠다고 말씀하셨고, 과연 사울의 그 실패는 또 다른 실패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멸망하고 말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명제를 잘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믿음으로 삽니다. 세상사는 도구도 믿음이고, 세상사는 힘도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믿음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인도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고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도 답답할 때면 힘들고, 화가 날 때면 힘들고, 절박할 때면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들이 망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히1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다 구원은 받지만 복은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상을 받습니다. 여러분, 부디 상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오. 상 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상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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