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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6:8-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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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6:8-7:60)


제가 미국에 있을 적에 우리나라의 어떤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하신 후에 미국으로 오신 한 목사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에피소드입니다.
언젠가 자기가 가르치던 클래스의 신학생들이 숙제들을 도통 해 오지 않았던 까닭에 학생들 거의 전부를 '과목낙제'시켜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은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모두 다 들고 일어나서 항의를 하는 둥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그 다음 경건회 시간이 되었을 때 '00강으로 가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신학생들이 공부도 안할 바에야 차리라 몽땅 강에 가서 빠져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적어도 목사가 되고자 한다면 '순교적 신앙'의 각오를 가지고 시작해야 할 것이니 신학교에서의 공부부터 '죽을 각오'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순교자의 신앙'이란 열심히 신학공부를 할 때나 매일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참석할 때나 정성을 다하여 헌금할 때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죽도록 충성'하게 해 주는 동기를 우리 기독신자에게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참된 기독교를 말할 때에 '개혁주의 신학'과 더불어 또 하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 '순교자의 신앙'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가장 기본적이고도 참된 의미를 다른 누구에게서보다도 바로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를 통하여 가장 정확하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의 실로 감동적이면서도 멋있기 짝이 없는 첫 순교의 생생한 장면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들 역시 그의 뒤를 이어 '순교자의 신앙'을 지키고 본받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순교자 신앙은 자신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호하는 증인의 신앙입니다.

6장 8절로부터 1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11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성령을 통하여 받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가운데 복음 증거에만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헬라어를 구사하는 소위 '헬라파 유대인'에 속했던 까닭에 그의 전도 역시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 즉 그런 헬라파 유대인들과 그들을 통하여 개종하여 유대교인이 되었던 이방인들이 모였던 회당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하던 중 스데반 집사는 자연히 그들과 "변론"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헬라파 유대인'들 역시 대부분이 다 '유대교 사상'에 철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도저히 말로 이길 수는 없음을 알게 되자, 그 무리들은 스데반 집사에게 모함을 씌워 그를 산헤드린 공회에 넘겼습니다.
  
그 고발 제목은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 즉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는 것이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시고 고소당하셨던 이유와 똑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전도가 평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말씀과 그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일치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복음으로써 전도하던 스데반 집사는 그 예수님과 똑같이 산헤드린 공회에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데반은 과연 어떻게 처신했었습니까?
  
7장 1절과 2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2a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냐"하고 심문을 시작하자, 스데반은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에 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본문 2절부터 53절까지 장장 마흔두 구절에 걸친 스데반의 유명한 설교입니다.

그의 설교는 구약 역사를 요약한 것인데 크게 두 가지 요점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등 여러 지도자들을 세우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배반하고 불순종하고 반역해 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두 번째 요점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중에는 성막을 주시고 후에는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세우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려 하셨지만, 그들은 성전 그 자체까지도 마치 자기네들이 지어서 하나님에게 거처를 제공해 준 양 착각하는 교만에 빠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7장 2절 이하 50절까지 기록된 스데반 설교의 본론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하여 스데반은 지금 자기를 향하여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고 성전을 파괴하려 한다'는 이유로 고소하고 있는 파인들이야말로 실제로는 하나님의 종들을 거역하고 성전을 영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장본인들이라고 역으로 받아쳤던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무슨 반박의 여지조차 없도록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린 스데반은 이어서 그 설교의 결론을 통하여 지금 자기를 고소하고 있는 자들에게 아예 철주를 내리쳤습니다.
바로 7장 51절부터 53절에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즉 영적으로 앞뒤가 꽉 막혀 있고 고질적인 병에 걸린 자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행한다"고 정곡을 찔렀습니다.
이 말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계속해서 보여 주었던 패턴, 즉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항상 불순종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오히려 반역하기만 하던 그 교만스럽고도 불신앙적인 패턴이 바로 지금의 "너희"들에게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역적 행동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임'으로써 나타났습니다.
이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데반 시대의 유대인들은 친히 이 땅에까지 찾아오신 "의인"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주고 살인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고한" 자들을 죽였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당시의 유대인들은 "천사의 전한 율법" 즉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시켜 주신 그 말씀을 끝까지 불순종했던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스데반은 그의 설교를 통하여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은 죄,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악한 죄를 짓고 있다고 신랄하게 책망했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생사가 걸린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에 자기를 위한 변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가 전한 복음이 옳은 것임을 천명하고, 자기가 믿고 따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메시아 되심을 밝히는 증언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즉 스데반 집사는 오직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거기서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변호하는 '증인'의 사명만 충성스럽게 수행하다가 끝내는 순교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순교자란 무슨 결사특공대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혈서를 써놓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순교는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서약하고 나라의 원수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는 '열사'나 '의사'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물론 말세가 되었다고 온갖 것을 다 내동댕이치고 외딴 곳에 모여 무슨 '공동체' 따위를 세우고 살다가 교주가 예언했던 재림 날짜가 지나간 후에 허탈감에 빠져서 집단 자살을 하는 따위는 절대로 순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란 사람이 스스로 '나는 순교자가 되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얻게 되는 영광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순교 자체는 '사명'도 아니고 '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해 놓으신 특별한 성도에게 내려 주시는 '특권적인 은혜'일 따름입니다.
그저 '복음의 참된 증인'으로 끝까지 충성하는 신자에게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 곧 순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평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사명에 신실하고도 충성스럽게 섬긴다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383장은 바로 이 '순교자의 신앙'을 노래하면서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늘 간직하고 전도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환난과 핍박 중에도" 끝까지 지키다 보면 "이 신앙 전파할 때에 죽어도 영광되도다"라고 순교까지도 오히려 감사함으로써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순교자의 신앙'이란 이처럼 이 평화시대 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믿고 열심히 전도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깨닫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순교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뒤따라감으로써 끝내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을 확신하는 소망의 신앙입니다.

앞서 스데반의 재판이 시작될 때의 장면을 기록한 6장 15절을 다시 보시면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온갖 거짓 증거들로써 스데반을 고발해 놓고 저들 딴에는 이제 그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을 때 그들은 전혀 뜻밖의 장면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의 최고 권력기관에 고발을 당하여 죽음의 코너에 몰리게 된 사람이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할 공포의 얼굴과는 너무나 정반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여유 있으며 평화스러울 뿐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움과 영광이 넘치는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천사의 얼굴'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심령이 그 두렵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평소에도 그래 왔지만 그처럼 자기를 고소하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그 자리에서 오히려 더더욱 하늘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산헤드린 공회의 살벌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어둡고 두려운 표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보좌를 반영하는 천사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그런 심령 상태는 그가 결국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로 7장 54절로부터 60절까지 말씀에 "54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는 그야말로 '양쪽에 날 선 칼'과 같이 그를 재판하던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그를 고소하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이를 갈" 정도로 분기탱천했습니다.
하지만 그 살기등등한 분위기 가운데 스데반은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자기를 둘러싸고 죽이려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는 최악의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하나님께로부터는 최고의 사랑과 영광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특이한 사실은 스데반 집사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성경에서 흔히 묘사되는데 여기서만은 유독 '서'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죽임을 당하고 당신의 보좌 앞으로 올라오게 될 첫 순교자를 예수님께서는 결코 '앉아서' 맞이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랜만에 만나게 된 죽마고우 친구를 의자에 앉아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을 갔다가 학위를 얻고 귀국한 자녀를,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오게 된 사랑하는 아들을 소파에 앉아서 무덤덤하게 맞이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당신의 이름을 변호하며 당신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게 된 당신의 충성스러운 증인을 맞이하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보좌우편에 그대로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순교란 이처럼 예수님조차 일어서셔서 맞이해 주시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을 서서 맞이해 주시니 사람으로서는 이보다 더 황공무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불감청(不敢請)'일 뿐 아니라 '고소원(固所願)'은 아예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는, 정말 '분에 넘치고 또 더 넘치는 명예'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불의한 세상 법정에서는 억울하게 정죄를 당하고 사형까지 언도받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일어서셔서 맞아 주시는 그 '지고의 영광'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석상에서 자기를 향하여 위협하고 살기등등해 있는 사람들만 보았더라면 아마 그는 순교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돌들을 보고 있었더라면 그는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배교하고 돌아서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부터 오로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영광스러운 하늘의 보좌에 이미 더 가까이 가고 있었고, 그의 눈은 유대인들이 손에 돌을 들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마당에서도 오직 자기의 증거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며 그를 기쁘게 맞이해 주시려고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그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 자기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다려 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똑똑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런 까닭에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셨던 모습을 끝까지 본받기 위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까지도 그 주님과 똑같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심령을 지켰던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도중에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를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익나티우스는 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면서 그런 노력 대신에 '자기가 모든 시험을 끝까지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자유 안에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떡이 되어 짐승들의 이빨에 갈리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전한 떡으로 제물로 바쳐지게 될 것이다." - 이 편지를 보낸 이후에 익나티우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로마에서 순교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심령은 이처럼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익나티우스의 후배였던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 역시 그 선배 순교자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습니다.
재판장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지금이라도 살려 주겠다고 마지막 기회를 주었을 때 폴리캅은 "86년 동안 내가 그분을 섬겨 오는 동안 그분은 단 한 번도 내게 아무 나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런 나의 왕을, 나를 구원해 주신 그분을 저주할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끝내 화형대에 묶이게 되었을 때 폴리캅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주 전능하신 하나님, 저를 당신의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갈 만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 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해 주심을 인하여 감사드리옵니다... 모든 영광을 당신께 돌리옵니다. 아멘." - 폴리캅 역시 순교 직전까지도 오직 자기를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끝은 결코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되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기만 하면 이처럼 그 주님의 영광에도 반드시 참예하게 될 것을 끝까지 확신하며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순교자(殉敎者)'란 말의 한자어는 '가르침을 따라 죽는 자'라는 뜻이지만, 원래의 헬라어는 '증인'(martus)이란 뜻의 단어이며 영어의 'martyr'라는 단어도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앞서 폴리캅 감독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초대교회 당시 신자가 체포되어 로마 법정에 서게 되어도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주어졌습니다.
로마 황제의 신상 앞에서 분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만 하면 무조건 사면해 주었으며, 그런 기회는 형장에서 죽기 직전에도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초기 3백 년 어간에 '나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아예 각오를 하고 자진해서 체포되었던 사람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숫자가 그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약해져서 배교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정권의 위협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복음을 지키면 결국 순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무슨 '열사'니 '투사'니 하는 따위의 요란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저 단순히 '증인'이라고만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신자는 바로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평생 '충성된 증인'으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까지 최고의 수준으로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진짜 순교자'인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첫 순교자는 사도들 중에서가 아니라 평신도 중에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사명'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졌지만 '말씀을 전파하는 증인의 사명'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순교자'라 불리는 안이숙 사모님이 작사하고 아이라 스탠필(Ira Stanphil) 목사님이 작곡한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유명한 찬송 역시 바로 그런 '순교자 신앙'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찬송의 3절 가사에서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 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라고 노래하고 있는 그대로 '순교자 신앙'이란 현실적으로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화시대의 순교자 신앙'은 곧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참된 기독신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순교자 신앙'이란 말을 가장 실감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나라의 기독신자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순교자들을 불과 몇 십 년 전에 바로 우리 민족의 신앙 선배들 중에서 모시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북한에서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이 실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 조국 교회에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인 동시에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본받아야 할 귀중한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마지막 기도드리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복음을 증거하는 순교자의 신앙을 바로 이 평화시대를 살아가는 동안에 매일 '가든지 보내든지' 전도하고 선교하는 삶을 통하여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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