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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탄식에서 찬양으로!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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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에서 찬양으로!  (시 13:1-6)


I. 탄식

북한에서는 극심한 생활난으로 가정해체 현상이 증가하면서 고아들만이 아닌 부모 있는 아이들도 거리를 방황한다고 합니다. 일명 꽃제비라 불리는 이러한 아이들의 수는 중앙당 내부강연회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통계만 하더라도 25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출신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집 안에 「거지의 소원」이란 시가 있습니다. 

따끈한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고 싶어요
맹물에 말아서 
된장 찍어 먹고 싶어요

옥수수 한 개만 있어도
하루에 한 알씩 뜯으며
엄마 찾아가고 싶어요
옥수수 두 개만 있어도
엄마를 만날 것만 같아요

하얗게 내리는 눈이
모두 쌀이었으면
혹은 자꾸만 쏟아지는
땡전이었으면

오늘밤 꿈에서도
개구리 먹으면 좋겠어요
꿈만 먹고 살았으면
생시에는 내가 남이었으면∙∙∙

우리의 바람은 끝도 없어요
그러나 거지의 진짜 소원은
그 중에 딱 한번

남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요

2002년 탈북자들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 진입사건을 배경한 “크로싱(crossing)”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4년의 기획, 제작기간을 거쳐 2008년 공개되었습니다. 

극중에서 크리스챤 배우 차인표는 
“예수님은 부자나라에서만 사는 것 아닙니까? 
 왜 북조선은 신경쓰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합니다. 

이런 극한의 탄식은 북한같은 곳에서나 있을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2011년 1월 29일 수도권 한복판에서 (안양 석수동)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32살 최고은 씨가 월세방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집 문앞에 이런 메모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집 문 좀 두드려 주세요.”

여러분도 배고파 본 적이 있습니까?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돈 줄이 막혀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금년 내에 취직이 안되면 결혼할 여자 집에서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눈물을 글썽이는 젊은이를 보았습니다.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울며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회 부조리 앞에서 쏟아내는 탄식도 있습니다. 
1983년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채플시간에 대표기도를 하던 한 학생은 (김흥겸) 이런 탄식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 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분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 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모든 인간에겐 탄식이 있고 때로는 극한의 탄식을 토할 때가 있습니다. 
• 죄를 떨쳐버릴 수 없어 몸부림하는 영적인 탄식
• 마음의 짐을 털어낼 수 없어 아파하는 탄식
• 질병으로, 경제문제로, 사람관계가 힘들어 괴로워하는 탄식
어쩌면 이 땅은 탄식하는 곳 같기도 합니다. 인간누구에게나 탄식이 있습니다. 

II. 하나님은 탄식을 기뻐하신다

오늘 본문 시편 13편은 탄식의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본문은 6절밖에 안되는 짧은 시입니다. 그러나 이 6절 안에 극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1절, 2절 극한의 탄식이 5절, 6절 최고의 찬양으로 바뀌어 집니다. 그 중간 3절, 4절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는 기도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주경가들은 본문 시편 13편을  “절망의 심연에서 황홀감의 극치로”  “슬픔에서 환희로” 
“탄식이 변하여 찬양으로” 나아가는 시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의 제목 또한 「탄식에서 찬양으로!」입니다. 

시의 문이 열려지면 1절 2절-두절안에 “아드, 아니아” “어느때까지니이까?”란 탄식이 네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는 신앙인이라고 하나 참고 견디는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고 견디는데는 일주일이 한계라고 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견디는 한계는 40일쯤 된다고 합니다. 

시인은 무엇이 그토록 견디기가 힘이 들었을까요? 시편 연구가들은 짧은 탄식 속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탄식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① 하나님, 왜 나를 잊으십니까? 하나님, 왜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십니까? 
   - 이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② 하나님, 내 마음이 어느 때까지 갈등하고 고민을 해야 합니까?
   - 이는 인간학적 질문입니다. 

③ 하나님, 원수들이 성도들을 비웃는 저 꼴을 어느때까지 두고 봐야 합니까? 
   - 이는 사회학적 질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망”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시인이 죽을 병에 걸려 살려달라 애원하는 탄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드, 아니아」 - 어느때까지니이까? 
성도의 탄식을 하나님은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성도는 “아드, 아니아”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무리 응답이 지연되어도 포기하지 말고 “아드, 아니아”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4번이 아니라 40번이라도 
“하나님, 나를 살려주세요. 어느때까지니이까”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러분, 조금만 더 참고 “아드, 아니아”를 외치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당신 문앞에 와 있습니다. 응답 일보직전에서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상황이 아무리 막다른 골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4-15)

인간들은 혹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속에서 부모라도 젖 먹는 자식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Mission이라는 영화를 보면 언덕위 토인들은 셋째 자식을 버립니다. 노예상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올때 엄마 아빠가 자식을 하나씩 안고 달려가 숨기 위해서입니다. 셋째가 있으면 모두 잡혀 죽기 때문에 셋째 자식을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자녀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잊지 않으십니다. 

장신대 주승중 교수가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한 내용 가운데 자신의 얘기인지 친구의 얘기인지 어릴때 경험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엄한 분이셨습니다. 어렸을 때에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늘 벌을 주시곤 하였는데, 한번은 “너 다시 한번 더 그 잘못을 하면 대문 밖으로 쫓아 내 버릴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두말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는 대문 밖으로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대문을 “꽝”하고 닫아버리셨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대문을 두드리면서 “어머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외쳤지만 대문은 굳게 잠긴채 한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울다가 지쳐서 마침내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나오셔서 안고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어머니께서는 그 아이를 대문밖으로 쫓아내시고는 더 안타까운 모습으로 대문에 귀를 대시고,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는지를 주의 깊게 보고 듣고 계셨다는 겁니다. 대문이 닫히고, 어머니도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 같아서 이 아이는 울고불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바로 거기 계셨고, 오히려 그의 목소리에 더욱 주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어머니가 그 아이를 대문 밖으로 던지신 그때는, 도리어 어머니께서 그의 말과 일거수 일투족에 더욱 귀를 기울이시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비록 허공을 치는 것과 같고 캄캄한 밤을 헤메이는 것과 같은 순간이라도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장 가까운데 계시는 시간이며, 마치 어머니가 대문 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듯이 우리의 기도에 더욱 귀 기울이고 계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는 그 순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욱 귀기울이시고 당신 가까이 서 계시는 순간임을 믿어야 합니다. 

III. 두렵건대

시인은 이어지는 3절 4절에서 “두렵건데”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하여 정확한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지만 너무 그 응답이 지체될 때에 두 가지 두려움이 있습니다. 」 이런 뜻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

4절에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13:4)
라고 말합니다. 

먼저 3절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영적인 잠에 빠질까 두렵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의 힘도, 사울왕의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이 지금 영적인 잠, 영적인 침체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졸음운전입니다. 
저는 먼 길을 오고가다보면 차량이 부서진채 뒤집어져 있기도 하고 
차가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합니다. 

이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졸고 나면 내 삶이 뒤집어져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건강하던 사람도 -
   • 사업이 잘되던 기업도 -
   • 평안하던 가정도 -
   • 심지어 부흥하던 교회도 -
   • 열심히 잘 감당하던 교회사역도 - 

졸고 나면 뒤집어 집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속도로 변에 붙어있는 표어를 영혼에 새기세요. 
「졸면 죽는다 !」 한번 따라하십시다.  「졸면 죽는다 !」
이제 다윗은 두 번째 두려움을 4절에서 말합니다. 
원수와 대적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이기었다하고 기뻐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 세상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면 대단히 좋아 합니다. 아주 고소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한번의 실수를 빌미로 하나님을 욕하고 공격합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과 실수가 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무리들은 우리의 실수를 빌미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그래서 우리성도들은 직장에서 사회에서 마을에서 정직하고 친절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적침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까봐 자신의 영육간의 강건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 때문에 그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건강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사업의 잘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여, 나의 허물과 문제로 말미암아 사탄이 승리를 자축하며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나의 영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너무 지체하지 마시고 속히 나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기뻐하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승리하고 행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사탄이 우리를 조롱하고 기뻐합니다. 

사탄이란 놈은 참 이상한 놈입니다. 성도들이 실패하면 기뻐하고 승리하면 시기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실패하면 좋아하고 잘되면 시기합니다. 새 집, 새 차를 사도 시기하고 새 옷을 입고와도 싫어합니다. 사업이 잘되면 질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잘못되면 아프고 잘되면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목사의 마음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곳입니다. 

IV. 드디어 찬송으로!

극한의 탄식 상황에서 전혀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내 삶의 상황이 끝까지 탄식으로 끝날 것만 같은 불안한 상황이 계속될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때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전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8)

성경의 모든 풍성한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신유의 능력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그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된다는 것 또한 믿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넉넉한 재물을 허락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 입에서 절대 믿음의 고백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풀무불 속에서 그대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죽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이여, 이 풀무불 속에서 내 몸이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넉넉한 재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입니다.” 

“내가 이 가난 중에 살면서도 낙심치 않고 감사하며 고결한 신앙을 유지하는,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부자 되기를 탐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중에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나님, 이 침상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투병 생활 중에서 나의 신앙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 믿음을 가졌던 이 세 청년을 하나님은 외면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 청년이 풀무불에 던져지자마자 불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껴안고 구원하셨습니다. 세 청년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청년의 신앙이 가져온 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마저 회개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서 3장 28절에 기록된 이방 왕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보십시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5절과 6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기도했을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깊은 탄식에 빠졌던 다윗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딱히 문제가 해결되어서만은 아닙니다. 문제야 해결되든 안되든 영안이 열리고 자신이 변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 탄식이 변하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13:5-6)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오래 지속되어지게 되면 시편 기자처럼 때로는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생각이 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지고, 그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거나, 기도를 중단하고 싶은 시험을 받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고난이라는 도구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도구로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고난이라는 도구는 사단이 성도들을 시험하여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케 하는 도구로도 사용됩니다. 

오늘 성경의 시편기자도 어느 때가서야 종식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시며, 숨어계신다고 오해를 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사단이 의도한대로 낙심하고 좌절하며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기뻐하며 경배하세’(13장)는 베에토벤 교향곡 9번인 ‘환희의 송가’입니다 이 곡을 작곡할 때의 베에토벤은 육체적인 여러 가지 병고로 찢어진 고통 속에서, 또한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청각 장애의 불편 속에서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극한의 고난이 하늘을 찌르는 감동의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제2차 대전 중에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독일의 지하감옥에서 고난당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하감옥의 벽에 손톱으로 그린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우리에게 비쳐오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 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아멘.

참된 신앙인은 극한의 탄식 상황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노래 - 찬양을 토해낼 수 있습니다. 「탄식에서 찬양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정한 영성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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