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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히 드려라! (눅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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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드려라! (눅 14:33)


오늘 날의 교회의 최대의 비극은 교인은 많아도 제자가 적고 제자는 더러 있어도 제자다운 제자가 적다는 현실입니다. 제자는 광의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협의에서 제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많은 숫자의 추종자(오늘의 트윗 용어로 ‘팔로워’)만을 가지기를 원하셨다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하시지 말아야 할 말씀이셨습니다. 

이천년 전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듣고 저는 많은 소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팔로워 되기’(팔로윙)를 그만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도를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제자도를 가르치는 본문은 실은 눅14:25에서 시작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그런데 이내 이어지는 말씀, 눅14:25-35까지의 소위 제자도의 레슨은 그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사실상 팔로윙을 포기시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지난 여름부터 QT나눔을 목적으로 트윗을 시작 했습다만 일단 시작하고 나니까 기왕 시작한 것, 팔로윙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팔로워 숫자를 늘리기 위한 책들도 발간되고 여러 기법들이 소개선팔하기, 무조건 맞팔하기, 빵터지는 유머 트윗 날리기, 무림의 고수업기단 한번의 트윗으로 1만명의 팔로워를 얻은 김제동이 윤도현의 팔로워 모집을 응원하기 위해 이런 트윗을 날렸습니다.도현형 팔로워가 없다고 울고 있어요롹커가 바보같이__찌질하긴. 여러분이 팔로해 주세요. 안됐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팔로잉을 포기시키는 트윗을 날리고 계십니다.

눅14:26을 읽어 보실까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을 듣고 상당한 팔로워들이 팔로윙을 포기하지 않았겠습니까? 

눅14:27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또다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팔로윙을 포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으로 아마 대부분의 팔로워들을 낙심시킬 말씀이 선언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눅14:33입니다. “이와같이 너희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온전한 드림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런 말씀을 던지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는 의미 없는 맹목적 다수의 추종자보다 소위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 세상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부르시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제자의 도리의 핵심의 하나가 본문 눅14:33에서 말씀하신 <온전한 드림의 삶>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온전한 드림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결단은 무엇입니까?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의 필요입니다.

사실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삶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얼마 전 릭 워렌 목사님이 한 말을 번역해서 제 트윗에 올렸더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리트윗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감이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말이었습니다. 

“지식 그 자체가 힘이 아니라, 적용된 지식만이 힘이다. 행동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논쟁으로 그치는 지식은 거짓된 지식이다.” 

그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보다 더 큰 보편적 잠재 인식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바로 이런 인식의 정체를 께닫도록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훈이 눅 12장에 그려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아니겠습니까?

한 농사짓는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그해 가을 현재의 곡간에 이 많은 곡식을 다 거두어 드릴수 없다고 판단되자 이런 독백을 합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둘 것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7-19) 

여기 이 부자의 독백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내것>이라는 단어죠. 내 곡간, 내 물건, 내 곡식,심지어 내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주시던 밤뭐라고 하십니까? 눅12:20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하나님과 부자의 대화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누구 것이냐는 것, 소위 소유권(ownership)의 문제이지요.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의 모든 소유”,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에서 예수의 제자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2.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것을 입증하는 행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헌금 행위입니다. 헌금 행위는 결코 헌금에 초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헌금도 드리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헌금은 규칙적인 헌신의 표지인 것입니다. 

고후 8:5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여기에 헌금 정신의 핵심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헌금은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후서 8-9장은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실예를 들어 헌금 정신을 소개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거기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고 바울은 헌금을 촉구했고 이 요구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모습을 보고 이 기회를 통하여 헌금 정신을 가르치는 레슨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먼저 고후9:12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들의 드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드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생각은 성경을 통해서 아주 일관성 있게 피력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과 다른 경우 바울 사도 자신의 사역을 돕기 위한 선교헌금이 마게도냐 빌립보로부터 도착했을 때 쓰여진 빌4:18을 읽어 보십시오.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모든 헌금은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헌금이라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는 분명한 고백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금이 온전한 헌신이 되기 위해서는 특히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즐겁게 드려야 하고 최선을 다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고후로 돌아가 고후9:7을 보십시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서 드릴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헌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헌신은 즐거운 자원함이 전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즐겨낼 수 있는 한계로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손해가 없는 경계선을 정해놓고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헌신이 아닙니다. 헌신은 언제나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라고 한 것입니다. 

고후8:2-3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즐거운 희생의 드림’으로 마게도냐 성도들은 온전한 드림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선배들의 희생적이고 자원적인 헌신을 통해 그 드라마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 역사가 우리를 통해, 나를 통해 계승되고 있는지요?

3.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헌신의 표현으로서의 헌금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결코 헌금에만 묶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헌금했으니까, 할일 다 했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제자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말 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예수 믿은 후에도 믿기 전처럼 ‘천막 깁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직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동역자인 베드로는 예수 믿고 고기 잡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예, 버렸습니다. 이제 이 직업(텐트 메이킹)은 더 이상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텐트 메이킹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한 일이지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니까요!

바울의 지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귀한 것이어서 자신의 모든 지식(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에게 배운 철학)을 또한 버렸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버림의 의미’는 철저하게 쓰여지는 목적과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제 지식은 자기 과시나 자기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지식으로 로마서와 바울 서신을 기록합니다. 로마서에는 그의 특유의 해박한 논리와 이성이 번뜩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소유권을 양도하시면 됩니다. “주님, 저의 모든 것을 주인 되신 주께 드립니다.”-이렇게 고백하셨다면 이제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주인께 매사에/범사에 묻고 그분의 뜻대로 쓰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포기요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1922년 봄 Maude Shea라는 목사 부인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Rhea Miller라는 여인의 신앙 시 한편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은 그녀는 그 시를 갖고 집에 옵니다. 아들은 출중한 음악(보이스, 피아노)의 재능을 타고 났고 평생 목사 아들로 교회 안에서 살아왔지만 아직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종이에 그 시를 옮긴 후 아들이 애용하는 자기 집 피아노위에 그 시를 놓았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어머니의 필적으로 쓴 그 시를 읽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작곡을 시작합니다. 그는 얼마 후 미국 NBC방송에서 전속가수로 오퍼를 받습니다. 파격적인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퍼받은 방송 사역보다도 그리고 그 사역으로 얻게 될 재물보다 더 영원하고 더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차 어느 날 한 무명의 전도자(키가 크고 매력적으로 생긴)가 자기 집에 찾아와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말합니다.(전도자는 21세, 자기는 31세) 

이 음악가는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그와 함께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을 결단합니다. 그 전도자가 빌리 그래함이었고 이 작곡가 겸 바리톤 가수가 빌리 그래함과 평생을 동역한 조지 베버리 쉐아 옹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세계 22억 앞에서 복음의 찬양을 부르고 70개의 앨범을 간행한 그는 102살의 나이로 오는 2월 12일 그는 앤드루스등과 함께 열 번째 대상 그래미상을 수상합니다. 기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최근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상보다 주 예수님이 더 귀하지요”(I’d rather have Jesus) 그의 일생이 바로 온전한 드림의 표상이 아니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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