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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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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어느 여자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앉아 있다가 심심하고 속도 허해서 과자 1봉지와 신문을 샀습니다. 그리고 자리로 와서 신문을 펼쳐들고 읽으면서 과자를 하나 꺼내서 먹으려고 하는데, 웬 점잖게 생긴 신사분이 내가 사가지고 온 과자를 먼저 집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신사분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방긋 미소만 띠고 연신 과자를 허락도 없이 집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치사하게 과자 한봉지를 갖고서 그 신사분에게 큰소리치기도 뭐해서 그냥 참고 자기도 과자를 얼른 집어 먹었습니다. 과자가 없어기지 전에 자기가 더 많이 먹으려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습니다. 신사 한 번 먹고, 집사님 한 번 먹고... 어느덧 과자 1봉지가 다 비워가고 이제 마지막 1개가 남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신사분이 과자 하나를 딱 집더니, 반은 딱 잘라서 자기가 먹고, 나머지 반은 과자봉지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빙긋 미소를 짓고 저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집사님은 속으로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남의 과자를 아무 말도 없이 먹다니... ’ 아주 기분이 나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참고 용서해야지’ 생각하면서 이제 물이라도 사야지 하면서 가방을 열었는데, ‘아, 저런’ 자기가 산 과자가 거기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집사님은 이제까지 그 신사분의 과자를 열심히 먹어댔던 것입니다. 그것도 씩씩거리면서.... 

그 남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웬 여자가 자기 과자를 허락도 없이 집어 먹습니다. ‘아니 웬 여자가 염치도 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신사분은 오히려 빙그레 웃으면서 나누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집사님 생각에 자신이 그래도 순간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참았지, 그런 마음도 없이 ‘왜 내 과자 먹느냐?’고 소리쳤다면 망신을 당했을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잘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켜서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웃집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 후 며칠이 지나서 그 이웃집에서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낫을 빌려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줍니까?”,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 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같지 않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렇지만 저 집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니까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은 긍휼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을 보면서 기독교의 출발이 어디이며, 예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바로 사람의 내면 세계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질과 성품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이 되느냐에 더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의 내면 세계인 기질과 성품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성품이 변하지 않은 채 일하면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면서 왜 다툼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까? 서로 내 주장, 내 의견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성품을 버리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상처받고 속상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제도나 사회 구조가 사람을 변화시킨 적이 없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된 적이 없습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이란 무엇보다도 성품과 기질이 변화된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 그동안 팔복의 말씀에서 4복까지는 ‘천국 시민의 자격’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곧, 나 자신은 가난한 심령을 소유하는 것이요, 죄에 대해서는 애통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요, 이웃에 대해서는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하여는 주리고 갈급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5복 이후는 ‘천국 시민의 윤리’를 언급하는 것으로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드디어 그의 인생에 거듭난 삶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 외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한자로 ‘긍(矜)’자는 ‘창 모(矛)’자에 ‘지금 금(今)’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긍’자는 창을 들고 지금이라도 찌르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휼(恤)’자는 ‘마음 심(心)’변에 ‘피 혈(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손에 창을 들고 찌르려는 순간이지만, 그 창으로 남을 찔러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으로 먼저 내 자신을 찔러 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긍휼’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헷세드’라는 히브리어로 사용되었는데, 약 150회가 쓰였고, 주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였으며 ‘인자’, ‘자비’, ‘사랑’, 등으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 신약에서는 ‘엘레오스’라는 헬라어로 사용되었는데, 27회나 나옵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말씀에서 긍휼은 결국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누가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한 사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긍휼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처형당할 뻔했던 불행한 여인도 아마 한 평생 자기처럼 불행한 형편에 처한 많은 삶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고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스폰지와 같은 부드러운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 있지만 차돌과 같은 딱딱한 심성은 사랑의 물을 흡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폰지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뜨는 인터넷 서비스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의 개인 블로그로 싸이월드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제는 ‘트위터’, ‘페이스북’, ‘넷로그’,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시간 투자가 안 되어서 하지는 않고 있지만, 친구 요청하는 다른 목사님들의 요구에 응답만 했더니 그 목사님들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더라구요. 지난 주중에 한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제목이 ‘교인, 미워하면 지는 겁니다’였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그 목사님과 교회가 교회 옆에 대지 몇 십 평을 사기로 하고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 땅이 교회 땅이 된다고 생각하고 행복해 했대요. 그런데, 중개업자에게 속아 중도금을 잃어버렸대요. 문제는 사고가 터지니까, 교회에 중직들이나 교인들이 다 한발씩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목사님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교인들에 대한 배신감이 커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그 돈을 찾으려고 울면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대요. 해외에 집회를 인도하고 오는 길에, 도착하면 또 그 일 때문에 속상해 할텐데,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거에요. 

‘걱정말아라,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대신 너는 내 계명만 잘 지켜라’, 그래서 ‘아니 무슨 계명입니까?’ 그랬더니, 바로 요13:34절 말씀이 떠오르더래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때 눈물이 솟구쳤다고 합니다. 

그러고 맹세했대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교인들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몽땅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그 일 이후에 교인들이 힘을 합쳐 그 위기를 벗어나고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뜨자 여러 목사님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인도의 선교사로 사역하는 한 여자 목사님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살해위협을 했던 사람들 사랑하게 된 이야기도 올렸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요, 은총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긍휼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다른 사람을 나 자신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어렵고 불행한 형편에 처해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들 보아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연계시키고 동일시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나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하고 연계시키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곁으로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신을 연계시키거나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그 쓰러진 사람을 보았을 때,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강도를 만나 저렇게 될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와 연계시키며 동정과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위선적인 구제와 자선의 행위를 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만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3.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사람 여러분,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려면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할 때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옷을 입게 합니다. 특별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좌절할 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오직 긍휼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실수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면 어떤 복을 받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좋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긍휼은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절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었을 때 긍휼을 많이 베풀면, 늙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감격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미국 사람들이 돈을 세는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돈을 셀 때, 왼손에 돈 뭉치를 움켜잡고 손에 침을 퉤퉤 바른 다음 앞으로 잡아당깁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 ’, ‘이 돈 내 꺼다, 내 꺼’, ....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 세지 않고, 돈을 쥐고 바깥으로 셉니다. 그 속에는 어떤 의식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당신을 위하여, 너를 위하여 쓰라고 주었다.’ 하는 그런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 전 세계를 제일 많이 돕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래 중, 아리랑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아니, 꼭 그래야 됩니까? 내게 손해를 끼치고, 해를 끼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내 원수, 저 놈은 꼭 망해야 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미시건 주의 한 대학에서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장수하는 분들 수백 쌍을 연구한 결과, 아무런 대가없이 긍휼로 이웃을 돌보아 주는 분들이 장수하는 비율이 2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물고기를 키우는 수족관의 물이 깨끗하여 물고기가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과장치가 쉬지 않고 가동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간과 신장은 몸 안에 독소를 제거하느라 한시도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더러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세상 속의 온갖 더러움이 걸러질 수 있는 여과장치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루 몇 십분이라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 묵상하지 않고 과연 어떻게 청결함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하여 예배드리고 말씀 듣지 않고 어떻게 신앙이 유지라도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주를 바라보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올 해에는 말씀의 사람이 되시고, 더욱 더 겸손히 긍휼을 구하고 바라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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