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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온 탕자 vs. 집안의 탕자 (눅 15: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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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vs. 집안의 탕자 (눅 15:20-32)

  

여러분, 혹시 이런 자식 보셨습니까? 유산이 탐나서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립니다. 한 마디로 후레자식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보다 더 못된 자식이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 아예 유산을 미리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 챙겨갖고 가출합니다. 그런 자식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한편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별반 다르지 않은 또 다른 탕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탕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둘째 아들은 가출했다 돌아왔으니까 ‘돌아온 탕자’, 첫째 아들은 집안에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집안의 탕자’입니다. 줄이면 ‘돌탕’과 ‘집탕’입니다. 

흔히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면서,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에게도 주목할 필요가 있고, 특별히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을 가진 분으로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정말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분은 아버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대신 ‘아버지 사랑의 비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겁니까? 탕자는 마구 낭비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Prodigal Son’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낭비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탕자를 결코 사랑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낭비를 하는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Prodigal God’이라 부릅니다. 

대개 본문의 스토리를 아시겠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죠.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졸라 유산을 미리 타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이제는 아버지 간섭이 없는 곳에 가서 자유롭게 살리라, 출세도 하리라, 인생을 엔조이하리라, ... 이런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죠?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됩니다. 재산을 탕진합니다. 흉년을 만나 고통을 당하다 호구지책으로 돼지 농장에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나마 뜻대로 되지 않아 노임도 못 받고, 나중에는 돼지 먹는 쥐엄열매조차 얻어먹지 못합니다. 그제서 아버지 집을 그리워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깨닫습니다. 돌이켜 아버지 집에 돌아갑니다. 품꾼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자식은 없는 셈치고 안 볼 것 같은데, 아버지는 정반대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멀리 지평선에 가물가물 보이는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입을 맞추고 야단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신발도 신깁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잔치를 벌입니다. 한편 첫째 아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분개하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첫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탕자임을 암시합니다. 

탕자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을 아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사랑을 알아 참 신앙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1] 돌아온 탕자 

① 가출 : 하나님을 떠난 죄

먼저 둘째 아들에 관해 살펴보시죠. 그를 뭐라고 불렀죠? 돌아온 탕자! 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챙겨서 가출합니다. 실은 가출 이전에 이미 마음이 떠났습니다. 눅15:12~13(상)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 ”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흔히 ‘죄’ 하면 악한 행위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죄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 이전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영적 상태가 ‘죄’(sin)라는 겁니다.(cf. 범죄crime)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떠날 줄 몰랐을까요? 잘못될 줄 몰랐을까요? 다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 왜 재산을 나눠줬나요? 이상한 아버지 아닙니까? 이것은 역설적으로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암시해줍니다. 인간은 개나 돼지가 아닙니다. 묶어놓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로 만드신 겁니다. 그러기에 알고도 허용한 겁니다. 아버지는 강제로 아들을 잡아두는 대신 나중에 스스로 돌이킨 후 진심으로 아버지는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 겁니다.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이북에서 월남한 분이고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분입니다. 외아들이 있는데 삯바느질 하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재산도 제법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사업한답시고 계속 손을 벌립니다. 이제는 작은 빌딩 하나 남았습니다. 그것마저 달라고 합니다. 줘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 말합니다. “아니, 그럴 줄 모르고 줬어요? 아니, 노후에 어쩌려고?” 그 어머니가 말합니다. “알았죠.” “근데 왜 주셨어요?” “안 주면 원수 되겠기에 준 거죠. 재산 지키려다 아들과 원수 될 수는 없죠. 차라리 재산 날리고 아들이 돌이키면 우리 모자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재산은 날렸지만 지금 그렇게 됐어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이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어쨌든 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난 것 자체가 죄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살아야 그게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지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러고서 잘 살면 좋으련만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② 멸망 : 죄의 결과 

둘째 아들이 가출한 후 어떻게 됩니까? 가출의 결과 즉 죄의 결과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눅15:13(하)~16 “13 ...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이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항상 보호해 주시고 모든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좋은 축복임을 망각한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설사 그가 혼자 먼 데 가서 출세를 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 해도, 그것은 결코 성공이 아닙니다. 패륜입니다. 출세나 부귀영화가 아버지를 떠난 죄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떠날 때 그 마지막 운명이 뻔히 내다보인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원한 미래가 뻔합니다. 설사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일시적입니다. 마치 시한폭탄이 장치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고도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노래하면 착각입니다. 그건 즐거움이 아니라 마취상태입니다.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잠시 마취상태 같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취에서 곧 깨어납니다. 재산을 탕진한 후 친구들이 떠나갑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됐는지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합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제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됐으니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 품을 떠나지 않는 건데 ... 돌이킵니다. 참 행복은 아버지 품 안에 있는 것임을 자각합니다. 아버지 집이 속박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진정한 풍요와 행복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거북한 속박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느끼고 물을 떠난다면 그때로부터 물고기의 불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 떠나 사는 것은 물속에서 뛰쳐나오는 겁니다. 그건 독립이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때로 답답해 보이지만 옹색해 보이지만 물속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참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품속에서만 참 생명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말입니다. 

③ 귀가 : 회개

둘째 아들은 그제서 깨닫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귀가, 그것은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he came to his senses) ... ” 영어 성경을 보면, 제 정신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합니다. 20절(상).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회개(悔改 repentance)는 ‘뉘우칠 悔’와 ‘고칠 改’입니다. 방향전환입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U턴하는 겁니다. 인생의 제자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범죄하고 거지꼴이 되었어도 받아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십니다. 둘째 아들은 염치 불구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그러면 품꾼(비정규직 하인)으로 써달라고 사정해 보자! 그대로 감지덕지지 ... 지금 내 꼴보다 못할 게 뭐야 ... 둘째 아들이 다 잘못했지만 이것 하나는 잘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영원히 살 길이 열립니다. 사55:6~7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④ 영접 : 구원(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둘째 아들이 마침내 집으로 향합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망설여집니다. 아버지가 과연 나를 받아주실까? 그런데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 아들이 가출한 직후부터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와 영접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20절(하)~23절. “20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Quick! Bring the best robe)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the fattened calf)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불쌍히 여기고 막 달려갑니다. 옷에는 돼지 오물 냄새가 배어 있을 겁니다. 언제 씻었는지 더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래도 씻고 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데려옵니다.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영어성경 보면 ‘Quick!’ 이 단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그 살진 송아지’ 있지 그것 잡아와라! 이런 뜻입니다. 제일 토실토실한 송아지를 보면서 매일 아들 돌아오면 잡아 먹여야지 ... 그렇게 점찍어 두었던 그 송아지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무한 사랑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큰 사랑입니다.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살펴보십시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사죄의 은총으로 그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이 넘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줍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이는 아들의 신분 회복을 의미합니다.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은 아들의 권세 회복입니다. 가락지는 그 당시 인감도장과 같은 겁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로마 장군이 벤허를 양자삼고 반지를 끼워줍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아버지는 또 둘째 아들에게 신발을 신깁니다. 당시에 종은 신을 신지 못합니다. 겨우 샌들 신어도 감지덕지입니다. 자유인이나 주인만 신습니다. 이제는 돌아온 탕자가 죄와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악기를 동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을 동원합니다. 잔치를 벌입니다. 이제 잔치와 같은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승리의 삶, 더 나아가 천국에 들어가 누릴 영생복락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참 행복을 원하십니까? 참 자유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해 주십니다.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참 자유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는 이런 겁니다. 갈5:1,13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인간의 자유는 무한 자유가 아닙니다. 파조물의 자유입니다. 아들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집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탕자의 그 후 삶에 대해 상상해 보십시오! 날마다 감사하며 기뻐했을 겁니다.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떼밀어도 가출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1668~69)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눈은 짓물러 있습니다. 눈이 멀기까지 기다린 노인의 모습입니다. 아들을 감싼 손은 서로 다릅니다. 한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리킵니다. 용서와 치유, 그리고 회복이 있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면, 샌들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이고 오른발의 샌들은 다 망가져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입니다. 죄수와도 같이 삭발한 머리는 죄인임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 안에 안겨 평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셨습니까? 이런 축복을 맛보셨습니까? 날마다 맛보고 있습니까? 교회 나오면서도 이런 축복을 맛보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혹시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맛보지 못했습니까? 이 시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십자가 알에 다 내려놓으면 됩니다.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받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겁니다. 문제가 많다고요?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도 실마리만 찾으면 다 풀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게 모든 문제의 실마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장차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 부디 이런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집안의 탕자 

또 한 사람의 탕자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죠. 그는 가출한 적은 없지만 집안의 탕자입니다. 그가 밖에서 일하고 돌아오다 노래 소리와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고 그를 위한 잔치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분노합니다. 아버지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29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I've been slaving for you)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자기 의(義)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감사도 기쁨도 없습니다. 자기도 종과 같이 일할 뿐입니다. 어쩌면 아버지 재산을 받아야 하니까 그러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자기 몫이 줄어들까봐 흥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는 동생에 대한 긍휼이 없었습니다.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this son of yours)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예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인 저 놈! 이렇게 부릅니다. 사실은 자기도 동생을 걱정해야 했고 아버지 대신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발로 돌아온 동생도 싫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눈곱만큼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32절. “이 네 동생(this brother of yours)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들의 구원에 대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눅15:1~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도 멀리 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책망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막2:17 “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 병자라도 자기기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의사를 찾아가지 않으면 그냥 죽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그것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기 의인인 줄 착각하는 인간들은 그냥 살다 멸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영혼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기쁨을 맛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냥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져 집안의 탕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알고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영혼에 대한 긍휼입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겁니다. 그 일에 마음을 바치고 물질과 기도로 헌신하는 겁니다. 아무쪼록 돌아온 탕자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숙해지는 장성한 아들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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