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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민 10: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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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민수기 10:33-36)


출애굽 제2년 1월1일 시내 광야에서 성막을 세웠을 때 구름이 그 성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에 충만하였습니다(출40:34). 성막 위를 감쌌던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고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알리는 상징이었습니다.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구름은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구름과 불기둥이 앞서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바로의 마병 군대에게 쫒기고 앞은 홍해로 가로막혔을 때 앞서가던 구름이 백성들과 마병 군대 사이로 이동하여 보호막이 되었고 바로의 군대가 혼란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 속에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출24:16).

신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한 높은 산에 오르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때에도 구름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덮어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무서워하였는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눅9:34, 35)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행1:9).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광경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예고하기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4:16,17) 하였습니다. 이 때에도 구름이 등장합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실 때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주님이 재림하실때 성도들도 주님이 임하시는 그곳으로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구름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어릴 때 재미있게 읽고 만화로 보았던 서유기의 손오공이 타고 다닌 구름을성경이 말씀하는 구름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던 초자연적인 현상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제2년 1월14일,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첫번째 유월절을 지냈습니다(민9장).그리고 제2년 2월1일, 성막을 세운지 한 달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민1:1-19). 20세 이상의 남자들 가운데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지파별로 조사한 결과 60만 3천5백5십명이었습니다(민1:46). 처음 애굽을 나올 때는 오합지졸 같았던 이스라엘은 이제 율법과 조직된 군대를 가진 나라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깃발을 꽂고 살아갈 땅만 있으면 됩니다.그 땅을 얻기 위해 지금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2지파를 넷으로 나누어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세 지파씩 배치하게 하셨습니다.백성들이 행진할 때나 장막을 치고 머물 때 그 언제든지 성막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하는 모든 길에서 직접 보았습니다(출40:38).성막이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상징이었으며, 하나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신 표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머무는 곳에 성막을 세우고 거기 머물러 진을 쳤으며 그 구름이 성막 위에 높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천막을 거두고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행진할 때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장을 섰고 하나님의 구름은 법궤 위에 높이 떠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구름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서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떠오르지 않으면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이틀이든지 한 달이나 혹은 일년이라도 그 자리에서 야영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고 혹은 행진하였습니다(민9장). 

시내 광야에서 첫 유월절을 지내고 인구조사까지 마친 이스라엘은 제2년 2월21일,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는 것을 신호로 장막을 거두어 출발하였습니다(민10:11).그들이 시내 산을 떠나3일 길을 행진하는 동안 여호와의 언약궤가 앞서 가며 백성들이 쉴 곳을 찾았으며 여호와의 구름이 백성들 위에서 낮의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었습니다.이처럼 여호와의 구름은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길잡이였으며 보호자였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종살이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낮에는 시원한 구름 그늘을 만드시고 밤에는 밝은 불을 주시며 광야여행을 안내하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먹을 양식도 주시고 마실 물도 공급합니다.이정도면 감사하고 순종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될 듯 한데 이스라엘은 수도 없이 불평하고 원망했던 백성입니다.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까지 찾아내라고 큰소리하는 것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통과하기 편하고 쉬운 광야길이 있을까요?그곳은 물이 없는 땅, 거칠고 험한 길입니다. 적들이 가로막고 전쟁을 하면서 지나가야 하는 길도 있습니다.가야 할 길이 아직 먼데 백성들은 벌써 두려움에 빠져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미리정탐하고 오게 하신 것은 그곳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지 두려워 포기하라고 하심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의 연약한 모습만 보았고 가나안의 거대한 힘만 보였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볼 줄 아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제40년 5월1일, 제사장 아론이 죽은 후 호르 산에서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둘러 지나가려다 험한 길 때문에 백성들이 마음이 상하였습니다(민 21:4).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길을 불평했지만 구름과 불기둥이 앞서 가던 그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모세도 아론도 아니었고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믿음으로 따라가면 되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내 발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걷는 수고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길입니다.‘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셨고,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광야 길에서 안고 건너셨습니다(신1:31).

애굽에서 건져내셨으면 편안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지 않고 왜 어려운 홍해와 거친 광야와 산악을 지나게 하시는가 질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험한 세상에 남겨두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식간에 완전한 나라로 데려가시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슬픔도 없고 그만인데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밤에 간절히 기도하시던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그 기도는 세상에 두고 가는 제자들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는 제사장의 중보기도였습니다.그들을 이 험한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시라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이 죄와 싸워 이기도록 세상에서 그들을 보존하시라는 기도였습니다. 

스폴존 목사님이 요한복음 17장15절 말씀을 묵상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지금은 “선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주님의 병사들이 잠시 후면 그 싸움을 마치고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결국에는 그가 계신 곳에 가서 그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그렇지만 그들을 당장 이 땅에서 천국으로 데려가 주십사고 기도하시지는 않았습니다.주님은 그들이 여기 이 땅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그런데 곤하고 지친 순례자들인 우리는 “오, 나도 비둘기처럼 날개가 달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장 날아가서 편안히 쉴텐데”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드리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주님은 우리 각자가 다 익은 곡식더미처럼 주님의 곳간에 들여질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긴다고 기도하고 계십니다.예수님은 우리가 당장 죽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시지 않습니다.왠지 아십니까?우리가 이 육신에 거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존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그러나 우리가 성년에 이르기 전에 영광의 기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는 절대 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종종 무슨 문제가 생기면 죽고 싶다고 합니다.그들에게 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체로 “그럼 주님과 함께 있게 될테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그렇지만 실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보다는 자기들이 안고 있는 그 문제를 제거하고 싶다는 소원이 더 강하기 때문에 죽고 싶어할 것입니다.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때, 즉 시험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을 품어야 할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구세주와 함께 있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쉬고 싶은 욕심에 본향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이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그러나 어떤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삶이 수고와 싸움과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그리고 언제 천국에 갈지는, 즉 언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실지, 그때에 관해서는 하나님 손에 일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홍해도 건너야 하고 광야도 통과해야 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도적들과 저항군들과 유혹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서 오세요 환영하고 대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땅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었으면 날마다 자라야 합니다. 비바람과 된서리, 눈보라 길도 통과하며 강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스폴존 목사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튼튼한 알곡이 되도록 자라게 하신 다음 곡간에 들이시기 원하십니다.자라다 만 설익은 열매가 아니고 속이 텅 빈 쭉정이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고 혹은 메마른 가뭄을 견디어 낸 알곡을 기뻐하십니다.가만히 앉아서 힘 안들이고 열매를 얻으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 생각입니까? 

여호와의 구름이 이스라엘의 인도자와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 어두운 세상을 올바르게 걷도록 인도하며 넘어지고 실족하지 않도록 안내하는 빛입니다. 시내 산에서 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 계명을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셨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로로 걸어가게 하시는 안내자와 이정표입니다(신5:32, 수1:7).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정로를 걸었습니다. 반대로, 열 정탐군들은 그 땅의 거인족들과 성들의 강함을 보며 마음이 좌우로 갈팡질팡 흔들렸고 그들의 발이 후들거렸습니다.

모압 평지에 도착한 백성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싯딤에 머물 때에 그곳 여자들과 음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여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려고 작정하고 접근한 이방 신전의 창녀들이었습니다.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여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사에 초청하여 함께 먹으며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습니다.나외에 다른 아무 신들에게 절하지 말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브올을 섬겨 그들의 영혼을 팔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진노하여 백성들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으니 순식간에 2만4천명이 염병으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다시 한 번 실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초기에 한 번 그리고 광야 여행 말기에 한 번 백성들의 숫자를 세어보게 하셨습니다.결과는 40년 세월 동안 오히려 남자들의 수가 약 1800여 명 줄어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여행 길에 불평하고 거역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던 어른 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었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에 들어간 출애굽 세대였습니다. 민수기는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우리들의 길은 약속을 받은 길입니다.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상징 법궤가 앞장을 섰고 구름과 불기둥이 그 위에 머물러 항상 앞서 행하였던 것처럼 오늘날도 주의 말씀이 우리 앞에 빛과 등불이되며 성령께서 구름과 불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름이 멈추면 행진이 멈추었고 구름이 움직이면 또 다시 행진하였습니다. 개혁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 나도 서며 신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소리를 듣고 그 길을 바라보며 그 진리의 불꽃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지고 담대하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받는 의인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던 욥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사단의 시험으로 고난 당하던 욥을 위로하러 찾아 온 친구들이 욥의 처참한 형편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위로하려던 마음을 바꾸어 충고와 책망으로 욥을 회개시키려 하였습니다.욥이 이렇게 비참한 징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결과라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앞세워 세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욥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변호하던 욥이 답답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친구들아 내가 가는 길을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데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찾아왔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데 너희가 어찌 알 수 있으며 나의 가는 이 길의 마지막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나의 시작도 아시고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알고 계시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고난의 길을 지켜보고 계신다. 내가 가야할 길을 앞서 내다보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을 내가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심 같이 우리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십니다.하나님이 그 길의 인도자가 되어주심을 믿고 가는 사람에게는 바다와 강과 산과 계곡을 통과할 때 두려움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합시다. 임마누엘이신 우리 하나님, 말씀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 길을 향해 앞만 바라보고 전진 또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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