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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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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17-22)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많지만...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대게 만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가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가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3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와 자녀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님과 만남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만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집에서 한 아이가 "정말 내가 엄마 아들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가 하는 말이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면 너 같이 속썩이는 놈을 선택했겠느냐? 어릴 때 Baby Contest를 통해서 잘 생기고 똑똑할 것 같은 놈을 데려다가 맘 놓고 키우지" 했답니다. 옆에 있던 남편이 그 말을 듣고 웃었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만남은 ‘부부의 만남’ 입니다.  부부의 만남의 소중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자에게 많은 복이 있지만 처복(妻福)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사실입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은 남자에게 있어서 한평생 행복을 좌우합니다.  그런가하면 "여자 팔자 두레박 팔자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어느 두레박줄에 매였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로 좋은 남편 만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부부의 만남의 특징은 ‘노력(努力)’인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이라서 바꿀 것이 없는데... 부부의 만남은 ‘저 사람은 아니야. 우린 잘못 만났어’ 하였더라도 서로 노력함으로 불행한 만남이 너무 행복한 만남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마누라 치마 붙잡고 천국에 간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예수 잘 믿는 아내를 만나 알콜 중독이나, 노름꾼인 남편이 변화된 것을 말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풍요롭고 소중하고 행복이 가득한 부부의 만남을 노력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의 만남이 있습니다. ‘영원한 만남’입니다. 현생과 내생의 가장 확실한 만남,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만남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입니다.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만남이기도 합니다. 여기 예배드리시는 모든 분들은 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을 하셨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소유하셨습니다. 참 기쁨과 진정한 행복을 아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한 청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합니다. 길에서, 달려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 청년은  관원(官員)이었다고 합니다.(눅 18:18)  성경에 나타난 몇몇 관원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청년, 젊은 사람'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30대 초반 정도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고시에 패스해서 관직을 가진 사람입니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부자(富者)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사실 부자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세히 살피면 부자 된 사람은 부자 될 이유가 있습니다. 부자가 아무나 되는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자기 삶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능력 없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부자다." 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을 지킨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승승장구했던 한국 재벌들, 그 자식 대에 얼마나 많이 무너졌습니까? 옛날 우리말에 "부자 중에 3대(代) 부자가 없다"고 했지만... 3대까지나 갈 집안이 몇 집이나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젊은 청년의 경우는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던 부(富)였든지, 그렇지 않으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든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富者였습니다.  즉 자기 것을 지킬 줄 아는 근면함이 있고, 낭비가 없고, 또 재산을 잘 관리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몹시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또 그는 겸손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막 10:17) 성경은 이 사람이 ‘길에서, 달려와서, 꿇어앉아 예수님에게 묻자오되’ 라고 합니다.  세상에 참 어려운 것이 겸손(謙遜)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든지 겸손한 것은 좋아하고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교만(驕慢)하고 싶은 것이 인생입니다.  남이 겸손한 것은 좋아도 자기가 겸손하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은 길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 청년의 놀라운 점이 또 있습니다.  거의 기적 같은 일이 이 청년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을 사모할 줄 아는 갈망’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이 청년에게는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가 많으면... 많이 가지면, 現實主義者가 됩니다.  가지지 못하였을 때는 理想主義者였지만... 사회적인 여러 가지를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현실주의자로 바뀝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공식 아닙니까?  그런데 이 청년은 가졌고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넘어서서 영생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있었던 사람입니다.     

또 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계명을 지키라"고 할 때 "내가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다 잘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소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때는 깽판도 치고 갈지(之)자 걸음도 걸어보고 흔들흔들 하다가 인생에 철이 들면 똑바로 걷는데...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모범생으로 규범을 잘 지키며 자라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 청년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참 부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모범적인 삶을 사는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내가 얼마나 든든한 자식을 가졌는가?'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은 자식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사위를 얻을 수 있을까?' 탐을 낼 사람이요,  젊은 처녀들은 '어떻게 저런 멋있는 남자를 만나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다음 안수집사 선거에 이 사람은 무투표 당선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반드시 장로가 될 것이다. 교회의 기둥같은 사람이 꼭 될 것이다.' 라고 말을 들을 사람입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과 멋진 만남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무수한 사람이 예수님을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것에 열중해서 예수님을 무시했고 못 알아보았지만, 이 젊은 청년은  예수님을 꼼꼼히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그 분이 어떤 분인가 마음속으로 확정한 다음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가장 멋진 대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예수를 善하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모든 마음이 합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는 만나고 싶지만 차마 만나는 것이 껄끄러워서 니고데모는 예수 안에 영생이 있는 것을 알고도 밤중에 가서 몰래 만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등장합니다.  자기의 새로 판 무덤을 내놓고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장례 때나 그의 얼굴이 잠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은 대낮에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를 "선한 선생이여" 부르면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나, 예수께서 행하신 행동들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이 분만은 선하신 분이요, 이 분에게는 영생이 있다' 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은 "네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삶,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선은 하나님 한 분이다. 내가 지금 나를 사람으로 보고 선하다고 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에는 선이 있지 않다. 사물에도 진정으로 선한 것은 없다. 하나님 한 분만 온전한 선이시다. 네가 그것을 알아야 된다."고 첫 번째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네가 계명을 지켰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 계명까지 지키라"(마 9:19)고 말씀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그들의 소중한 재산을 빼앗아서도 안 되고, 거짓말로 속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네 부모와 이웃을 사랑하고 인간에 관해서 행할 도리를 다 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께서는 이 젊은 청년이 하나님 말씀에 전심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보고 저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이제 예수께서는 이 사랑하는 젊은 청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가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있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라. 그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너 정말 영생을 사모하느냐?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축복된 삶을 누리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 보화는 하늘로 옮겨져야 된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있는 재물(財物)에 집착(執着)하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왕도 역사상 최대의 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아, 네 모든 재물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도 부자였습니다. 이삭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富)는 참된 기독교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은 언제나 부(富)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재물을 내놓으라고 하면 아마 당장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렇데 아브라함이 정말 아끼는 것, 정말 집착하는 것,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이삭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100살에 낳은 아들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모든 시선이 이삭을 향해 머물러있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아브라함아, 내가 지시한 땅으로 데리고 가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지금은 "네 재산, 네 소중한 것,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 이것이 하늘의 보화를 쌓는 길이다. 네가 영생을 참으로 추구한다면 네가 그것을 갖기를 원한다면 너는 재물을 먼저 내려놓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하고 귀한 것이 그에게 그렇게 많았는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젊은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그 선한 의지도 잘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웅크리고 있는 욕심,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하나님, 이것은 안되겠습니다. 다른 것 다 주님께 드리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내 것입니다' 고 하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온전한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요? 저는 그것을 집착(執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 이 청년처럼 재물(財物)일 수 있습니다. 꼭 재물이 많은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은 가난한 사람이 더 강할 수 있습니다.  1억 짜리 가난한 사람이 있고, 만 원짜리 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억을 가진 사람이 이 돈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원을 갖고 이것 없으면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만 원짜리 부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습관(習慣)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완전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주님과 자기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 앞에 얼굴 들면 부끄러운 습관이 있습니다. 정말 아닌데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나의 집착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자녀(子女)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온전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명예나 외모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 한 가지!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거부하고 싶은 한 가지가 우리 속에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끝까지 놓짐 ht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렇게 말했더니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막 10:22)   이 청년의 결론은 뭡니까? 끝이 어떻게 납니까?  ‘재물(財物)이 많은 고로’ 그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가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 나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던 재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생각하며 감사했던 재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축복의 증거가 아니라 나의 영생을 포기하게 하고, 제자의 자리를 차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지옥으로 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착한 생각한다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생각을 많이 하니까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나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젊은 청년도 좋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기회도 붙잡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장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슬퍼하며 우리 주님을 떠납니다. 왜인가요? 이미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영생이 그 손에 안겨질 순간에 이미 자기 손에 꽉 쥐고 있는 재물 때문에,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생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을 도저히 놓아버릴 수가 없어서 근심하고 슬픈 기색을 띄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되는데.. 나는 정말 영생을 얻고 싶은데.. 아 나는 정말 너무 소중한 것을 잃는구나.  이것을 놓치면 내 생애가 영원히 고통스러울텐데...하지만 난 재물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  손이 비어 있어야 그 손으로 영원한 것을 받지요. 이미 붙잡고 있는 것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약속한 하늘 보화도 영생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물러가는 이 젊은 청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바로 ‘한 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이며, 그것 때문에 모든 것... 하나님도, 영원한 삶도 다 포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습니까? 예수님 만나러 왔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선(善)한 것을 향한 갈망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 끝나고 나면서 근심하며 떠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지금 내 마음속에 명령하신 명령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이 집착을 끊겠습니다. 이 습관 버리겠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늘 문제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님 앞에 설 때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것을 내가 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지금 내 손에 있는 이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이런 결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孫 목사, 제법 멋진 소리했소. 성경을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 없이 읽었는데, 그 젊은 청년의 속마음을 그렇게 대신 말하니까 그럴싸해.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중요한 것, 그것 있는데 그것 버리라는 것도 참 좋은 말이야. 암 집착이 곧 우상이지." 하면서 그냥 그렇게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을 믿으면 받아야지 왜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라고 하는거야 난 포기못해’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이 예배 장소를 떠나시기 원하십니까?  

성도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참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전체가 부족해질 수가 있단 말입니다. 사실 당연한 말입니다.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두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물이 밖으로 새 나가나요? 통 전부를 뒤집나요? 그냥 통 아래쪽에 구멍 하나, 둘도 아닌 하나의 구멍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부를 다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는 뭐를 가지나? 다 내려놓으면 뭐가지고 사는가?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너는 거지가 되라가 아니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말씀하셨고, 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이 청년이 말씀대로 했더라면 13번째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 주어진 기회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청년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재물 때문에 하늘의 보화와 13번째의 제자의 자리를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감동이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다.  진짜 은혜는 주님의 말씀 앞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 역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무엇인가요?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말씀이 그를 근심하게 했고, 슬퍼하게 했고, 말씀이 예수님을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청년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을 인해서" 크게 기뻐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막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말씀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2;10절을 보면 동방박사들은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말씀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그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해결하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하늘보화를 가로막고, 영생을 막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으시는 이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 내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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