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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의 가시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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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가시 (고후 12:7-10)


미국에서 가장성공한 한국인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강영우 박사를 꼽게 될 것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14살 때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됩니다. 친구들과 공을 차다가 축구공에 맞았는데 그 순간 눈이 실명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맹인이라는 것은 매우 비참합니다. 안마사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은 하나님을 믿는 소년이었기 때문에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는 맹아학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서 갖은 고생 끝에 큰 성공을 이룹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장애인정책차관보라는 최고위직에 오르게 됩니다. 물론 결혼도 했고 자녀교육도 잘 시켰습니다. 두 아들중에 하나는 하버드 의대에 하나는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는 은혜도 입게 됩니다. 그의 간증을 보면 그의 첫아들이 세 살때 아들이 하나님앞에 기도하는데 이런 기도를 드리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도 눈뜬 아버지를 갖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입니다. 친구들 아버지는 다 눈을 떳는데 우리아버지만 맹인입니다. 이 아이가 불만입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눈뜬 아버지를 갖게 해 주세요. 

강영우 박사는 이 기도를 듣고 아들을 불러 이야기 합니다. 얘야 네 아버지는 눈뜬 아버지보다 좋은 점을 더 가지고 있어. 네가 잠잘 때 잠자리에 누웠을 때 아빠는 불을 끄고도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잖니.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불끄고 점자책을 가지고 동화책을 읽어주니까 불끄고도 아버지는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는 겁니다. 그 때 아들은 마음속에 우리 아버지는 특별한 아버지다. 불끄고도 동화책을 읽어줄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신례심이 생깁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공부해서 그는 하버드대에 들어가게 된다는 간증입니다. 만일 이 아들이 세 살때 아버지가 맹인이라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비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더라면 그는 부정적인 인생관속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 인생에는 고통이 따라옵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볼때는 넥타이 매고 양복입고 근사해 보입니다. 저런사람들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부부가 다 돈버는데 돈 걱정도 안하고 참 좋겠다. 가서 물어보십시오. 무슨걱정이 있는지 말입니다. 걱정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가정도 없습니다. 다 뭔가 고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냐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내게 저주가 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다하는 것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얘기치 않는 고난이 올 때 왜 내가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릴때도 있고 하나님의 징벌로 여길때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고난이 올때 사탄이 내게 역사했구나f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실패한 신앙인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고난을 가르켜서 불행이나 저주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온전한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을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중에 14권을 직접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정도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 당시 존귀했던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했던 사람이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당시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에 학파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제일 좋은 대학을 졸업한 가장 총망받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남모르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시하니까 어떤분들은 식사하실 때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걸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선가시 정도가 아닙니다. 생선가시 목에 걸리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핀셋으로 뽑아내면 그만입니다. 그건 고통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의 의미는 스칼롭스라는 원어의 의미로는 말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죽일 때 나무토막을 날카롭게 해서 사람을 죽이듯이 말뚝같은 것이 내 몸을 찌를때 당하는 고통 그것이 바로 육체를 찌리는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을 고통스럽게 했던 가시는 무엇이였을까?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칼빈은 그것을 영적유혹이나 혹은 의심이라고 말합니다. 마틴루터는 반대와 박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은 사도바울이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독신생활을 했을 것이고 남성으로서 가지는 성적충동 그것이 그의 어려움이 아니였겠느냐하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간질입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간질이였을것이다라는 겁니다. 간질은 당시에 가장 무서운 병이였습니다. 한번걸리면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암보다 더 무서운 병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보면 어떻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간질걸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데 이 아들은 불속에도 물속에도 뛰어들고 아무데나 넘어지고 거품을 내 뿜고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질입니다. 더더욱 그 당시에는 간질은 귀신이 옮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질들린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귀신이 자기한테 옮을 까봐 그 사람을 향해서 침을 뱉었다는 것입니다. 간질걸린사람이 옆에 오지 못하도록 침을 뱉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니까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업신여기다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침을 뱉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가 간질에 걸렸다고 해서 침을 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님처럼, 천사처럼 너희는 나를 영접해주었다고 바울은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뤄보면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간질이였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간질이라는 고통을 안고 바울은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처음에 그는 하나님앞에 많이 기도했던것 같습니다. 또 사실 바울은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수많은 사람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도 그런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병을 반드시 치료하실거야. 아마 그런 확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바울은 세 번이나 하나님앞으로 나가서 이 육체의 가시를 거둬가시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 번이라는 기도는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기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한번기도했다는 것은 40일동안 금식하면서 생명을 걸고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무엇입니까. 거절입니다. 빈그릇이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가시를 치료해주시지 않으실까. 거둬가시지 않으실까. 그는 하나님의 거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몸부림치며 찾던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하나는 가시를 주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약한데서 강하여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두가지를 질문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은 주신다고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가시를 주셨을까. 오늘 그 해답이 7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이라는 말이 두 번나옵니다. 옛날 성경에는 자고라고 나오고 정확한 의미는 교만입니다. 사도바울로 하여금 교만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그 육체의 가시를 혹 사단의 사자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나타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면 그는 매우 강한사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자아가 강한사람입니다. 믿기전에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그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또 믿은 후에도 그렇습니다. 어느경우에는 자기의 한참 선배인 베드로와 함께 기도했는데 음식문제로 많은 사람들앞에 면박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냉정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마가 요한이 한번 실수 했습니다. 선교여행을 떠나다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돌아갔는데 그 이후로는 마가 요한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내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자기의 동지이자 은인과 같은 바나바와도 결별을 선언할정도로 매우 냉정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기질상 교만의 덫에 걸리기 쉬운 사람이다. 왜?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은 못봤으니까 말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교만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똑똑한데 내 판단이 틀린적이 없는데 내 기억이 틀린적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교만하게 만드는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바울의 아킬레스건 약점과 같은 것이였습니다. 

또 바울에게는 오늘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 보니까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자랑하노니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여러교회를 다녀보면 바울을 향해서 너는 신비의 체험이 없지 않느냐 하면서 바울을 공격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격이 지나치니까 어느날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것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14년전 내가 어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을 보니 그가 삼층천에 갔다왔는데 그의 몸이 안에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알지못하는데 그는 이루말할수 없는 신비한 것을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낙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면 자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신비한체험을 가진 바울이 교만하려고 보면 얼마나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이런 약점을 알고 계셨기에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학교에 다녀보면 저는 사실 아이큐가 뛰어나지를 못합니다. 기억력도 그렇고 그래서 저는 노력파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좀 나오고 노력안하면 성적이 별로 안나옵니다. 그런데 친구들을 보면 매일 노는 친구들있습니다. 내일이 시험인데도 오늘도 놉니다. 뭐하러 공부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시험만보면 백점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들이 일반적으로 교만했습니다. 공부뭐하냐. 그냥 시험치면 백점인데. 그런애들이 교만하기 쉽습니다. 또 여자분들 중에도 교만한분들이 있습니다. 부모덕에 얼굴이 미인으로 태어난 사람들. 그런사람들도 교만하기 쉽습니다. 

또 노력하지않고 돈번 사람들, 별로 수고하지 않고 출세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날좀봐라. 그러나 고생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 밑바닥부터 거쳐간 사람들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갔기 때문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은혜받은 사람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저것들은 왜 은혜도 못받어. 나는 쉽게 은혜받았는데 그럴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어찌보면 그런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 핍박하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띄어지고 그때부터 사도로 쓰임받은 것입니다. 그는 남이 보지 못하는 삼층천을 다녀왔고 남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교만을 다스리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교만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들도 나름 이런저런 아픔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위해서 수차례 기도해봤지만 여전히 응답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겸손을 위해 남겨주신 육체의 가시다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물론 그것은 불편한 것입니다. 때론 그것은 원망스런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내게 가시를 주셨느냐 겸손하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약한데서 강하여 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9절 10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바울이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응답이 뭐였습니까.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내가 너에게 준 은혜가 너에게 넘친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너의 약한것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는 오히려 사도바울을 강한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시가 찾아오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할 때는 꽤 자신있게 살았는데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사람이 너무나 약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풍족해서 마음껏 쓸 수 있었는데 궁핍하게 되니까 마음이 많이 가난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가졌던 것을 잃어버릴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연약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것 보다 어렵다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돈많은 사람이 천국못간다는 말이 아니라 돈만의지하고 마음이 교만해지고 강팍해진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하는 것입니다. 가졌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의 마음이 한없이 낮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 마음의 그릇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그 비운 그릇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컵에 보리차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 좋은 것을 담으려면 비워야 합니다.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가 부어내든지 누가 가져가야 합니다. 어찌보면 내가 의지하던 것들, 내게 자랑거리가 되던것들, 이것들을 하나님이 한순간에 거둬가셨습니다. 내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비워진 그릇위에 그리스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임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약할 때 강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이 크리스챤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지 내 능력 때문에 내가 강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어린아이 혼자 걸어가기도 힘듭니다. 너무약해서 누구나 채어 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기에 혼자가는 법이 없습니다. 늘 힘센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비록 어린아이는 연약하지만 힘센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가니까 함부로 그 어린아이를 건들자가 없습니다. 힘센 아버지가 그와함께 하니까. 나 하나 보면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전능하신 능력많으신 하나님의 손이 날 붙들고 계실 때 나는 가장 강한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나를 쳐서 복종시킬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약한데서 강하여진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입증이 된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나라와 민족이 바울이 들어간 복음앞에 굴복했던것입니다. 바울앞에 에베소가 무너졌습니다. 빌립보가 항복했습니다. 고린도가 성문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쇠사슬에 차여서 죄수의 몸으로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로마에 들어갔는데 그 바울로 인해서 연약한 바울로 인해서 로마가 기독교국가가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승전가를 부르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들어간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죄수의 몸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로마에 들어갔지만 그로인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기 때문에 그 강한 로마가 연약한 바울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성경 9절과 10절에 육체에 가시를 가졌고 연약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에 보니까 내가 약하게 된것을 크게 기뻐하노라. 내가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라. 약하게 된것을, 가시가 주어진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더 강해졌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가시가 무엇이든지 그 가시를 불평하고 원망하지 마시고 오히려 가시 때문에 감사하고 가시 때문에 기뻐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나 다윗이나 모세나 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연약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이 연약했기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들은 위대한 도구로 쓰임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혈기 왕성하고 40대의 젊은 나이에는 그를 쓰실수가 없습니다. 너무 교만해서, 그런데 그가 80세가 되어서 양치는 목동으로 일생을 살아갔을 때 노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쓰십니다. 이제 네가 가난해졌고 내 능력을 너에게 부어서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하겠다하는 것입니다. 

악성 베토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시력과 청각 상실했습니다. 작곡가가 보지못하고 듣지못하면 작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 위대한 교향곡들은 시력과 청각을 상실한 후에 이 땅에 빛을 보게 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존번연을 보십시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12년동안 갖혀 생활할 때에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문호 밀턴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실낙원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이 땅에 남겨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가시입니까?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남편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내입니까. 아니면 사업이나 건강이나 가난이 여러분에게 가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 가시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항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부를 찬송 300장의 후렴을 보면 어떤 가사가 소개됩니까. 그 은혜가 내가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나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약함 때문에 가시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고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강하심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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