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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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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4-16)


지난 명절 때 저의 집사람하고 모처럼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영화를 잘 만드는지 혀를 찰 정도였습니다. 예전만해도 몇분만 보면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알 정도인데 끝나는 시간까지 긴장을 멈추면 안되는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영화 한편이 히트가 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뭐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 한 가난한 영화 작가의 죽음이 사회에 주는 파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이젠 유서가 돼버린 한 장의 쪽지 때문입니다. 이웃집 방문에 쓴 그녀가 남긴 쪽지에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상상도 못한 이야기 아닙니까? 소위 영화를 위해 글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라면,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천부적 소질도 있고 또 그 자리에까지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전과 노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그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얼마나 외로움에 몸부림쳤으면 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겠습니까? 물론 “젊은 나이에 뭐라도 하면 먹고 살길이 있지 않겠는가? 또는 가족은 없나? 주변 사람은 무엇을 했나? 공장을 가면 일자리가 많다”라는 냉소적인 시선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자매에게 유일한 동력은 아마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격정소나타’를 쓰고 연출한 최고은 작가) 

그러나 이 냉엄한 현실의 벽 앞에 제대로 용기있게 일어서지 못한 채 굶주림으로 지친 삶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어 32살의 나이로 죽음을 택한 이 모습은 결코 가볍게 넘겨질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이 사회는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실감이라도 하듯 이곳 저곳에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이 못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요즘 일고 있는 자살은 삶의 허무를 느껴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목숨을 끊는 것보다 생존의 문제로 인한 자살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축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음 생활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현실 앞에 통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히브리서가 쓰여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당시 믿음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한 것은 물론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핍박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생업도 다 박탈당했기 때문에 자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 밑바닥 생활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입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소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를 저버리고 옛날 유대 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배교의 일들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더 이상 나는 못 견디겠다.' 그래서 예수를 부인하면서 백기를 들고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문제는 지금도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모두 힘들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상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무게가 자신을 사정없이 짓누를 때 그 무게에 견디지 못해 쓰러집니다. 이 때문에 낙심하고 방황하다 결국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겁니다. 이런 위기의 한 복판에 있는 당시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 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줄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들의 형편이 한가로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힘이 드니까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고통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겪는 문제 앞에 어떤 처방이나 처세술을 가르켜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어떤 해답을 제시는 것이 아니라 대신 보좌 앞에 나아가라는, 다시 말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관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진리는 기도의 특권이 어떻게 주어졌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루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죄지은 우리 인생, 어느 누구가 감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막힌 담을 열어 놓으시기 위해 제사장을 세워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은혜들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중간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제사장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여기 예수를 누구라고 합니까? “큰 대제사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 큰이라는 단어는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과 다르십니다.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은 불완전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입니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예수님은 참 사람이십니다. 아-멘! 우리는 그 신비의 진리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과 구속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시면서도 인생이 당하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친히 맛보셨습니다. 15절 중간에 나오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본인이 직접 사람이 되셨고,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연약함도 알고 계시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도 알고 계시고, 그들에게 당장 하나님께서 내려 주셔야 될 은혜가 어떤 것인가도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핍박이 심해도 이길 수 있고 아무리 가난 때문에 고생해도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할 때, 실망할 때, 연약해서 몸부림 칠 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 고독 속에서 헤맬 때 위로를 받고, 평안을 유지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꼭 실천해야 됩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 되심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14절 끝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철저하게 믿고 붙들어야 비로소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굳게 잡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테오(krateo)’입니다. 무엇인가를 잡을 때 손에 힘을 주지 않습니까? 특별히 남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될 소중한 것을 손에 쥐었을 때는 어느 때보다도 힘을 더 강하게 줍니다. 이렇듯 꽉 잡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들고 놓지 아니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대제사장 되신다. 그분은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이 나의 대제사장이 되신다. 그분은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 그 예수님이 나의 모든 사상과 감정을 지배하면서 나를 장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위로와 평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15절이 해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중학교 다닐 때 아무도 이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의미가 전달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사용하는 쉬운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시요.’ 동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것을 다 아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찮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 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아픔을, 그 목마름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문제마저도 동정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큼 가난 때문에 고통당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형제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만큼 가난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아침을 굶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될 때가 왕왕 있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슬픔을 가슴에 안고 괴로워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는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똑 같은 슬픔이라도 그가 느끼는 강도는 우리보다도 몇 천배, 몇 만배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슬픔을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큼 공포로 인해 밤새도록 씨름해 본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공포를 여러분이 체험해 봤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연약함을 다 경험하시면서 그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2:18절을 보십시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복판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시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셨습니다.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무엇인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아무 조건없이 주셨습니까?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오염되어 폐기처분될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나를 품에 안으시고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퍅한 모습에도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함께하시는 성령님이 지금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너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겼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꼭 붙드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할렐루야! 여기 ‘나아간다’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계속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계속적으로 우리는 그 보좌를 향해 나아가면 됩니다. 그럼 ‘나아간다’의 뜻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아감의 종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빚진 사람처럼, 혹은 겁먹은 사람처럼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갈 때는 당당하고 담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한 인생을 살면서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만큼 행복한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연애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리 연애를 시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진정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을 주고받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하라고 하는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봅니다. 그 하나님의 크시고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 앞에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흥분과 행복을 맛봅니다. 그 일을 남에게 맡깁니까? 남에게 맡기면 안됩니다. 가끔 보면 “저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하고는 자기는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대리 기도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그 바보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행복과 그 기쁨을 왜 남에게 빼앗기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사람들이여 일어납시다!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기도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써, 힘으로 능으로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풀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이의 능력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이 하기 쉬운 말로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고 일을 자꾸 꼬이게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성까지 의심하는 상태로 믿음이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억할 것은 응답 받는 기도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걸어가면서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한다는 그런 한가한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식으로 기도하다가 응답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뜻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만이라도 승리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역사의 진로를 바꾸었던 기도들이 있습니다. 미스바에서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의 금식기도(삼상7:5),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사밧과 유대백성의 금식기도(대하20:3~4),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금식기도(행13:2~3)가 그렇습니다. 이들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대백성은 패배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였고, 교회는 세계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기도가 인생은 물론이요,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이끄는 힘이 있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의 결정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사44:6, 계1:17).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하면 우리는 역사를 다시 쓰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이번 2/27부터 시작하는 “인생의 반전을 꿈꾸라”는 이 부흥회를 사모하십시오. 삼손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생을 살면서 인생이 반전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잘 나가던 삼손이 두 눈이 뽑히고 세상의 줄에 묶여 노예처럼 살던 그의 반전은 바로 기도자리였습니다. 이제 우리 다시 한번 시작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그 이유는 기도를 못하고 있든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혜의 보좌 앞에 바짝 바짝 다가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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