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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어떠함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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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떠함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 (눅 15:11-32) 
 

1. 정말 자신을 모르더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 밖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판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궁금하시죠? 그 예는 많겠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해 보면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으나 사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 다음에 그 상대에게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져 묻습니다. 

상대방은 분명 그 말을 했었고 자신도 들었습니다만, 듣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자기 말만 하느라 머리와 가슴에 상대방의 말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안 듣고’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속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혹은 그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잘못되었다’, 또는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잘못되었거나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해와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생겨먹은 것이 이렇고, 또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꿀 수는 없으니 답답하면 당신들이 달라져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는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나 잣대, 혹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고, 나아가 그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른바 <탕자의 비유>, 혹은 <돌아온 아들의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처럼 너무나 잘 아는 내용으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는 반응에 대한 것입니다. “또 탕자야?” “만날 듣던 얘기 오늘 또 듣겠구나!” “자, 내가 아는 탕자 얘기로 오늘 목사님은 어떻게 요리를 하실까?” 등등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대해서나, 설교에 대해서 그러한 태도를 가지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이 주는 은혜를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는데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매력이고 성경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새롭게 주실 메시지와 은혜를 위하여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오늘 이 본문의 배경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누가복음 15장에는 아주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 첫째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100 마리 양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 버렸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고 고생 끝에 찾아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잃었던 양을 찾은 기쁨에 겨워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

두 번째는 열 개의 은 드라크마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이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살펴서 결국 찾았고, 그녀 역시 그것이 너무 기뻐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이지요. 이 본문 역시 두 아들 가운데 잃어버린 작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위의 두 비유처럼 그 아들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기다렸을 뿐입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찾았고, 그 기쁨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세 가지의 비유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잃은 백성들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를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 예수님은 반복적인 방법을 통해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 것이죠. 그러나 세 비유의 차이점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경우, 그 양은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스스로 목자와 양의 무리로부터 떠났습니다. 

아마 눈앞에 있는 먹이에 정신이 팔려서 무리와 목자를 놓쳤을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 인간적인 쾌락을 찾다가 길을 잃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드라크마의 경우, 10개의 한 세트, 혹은 한 묶음으로 되어있었을텐데, 여인이 부주의하여 10개를 묶은 줄이 끊어졌거나 풀리면서 “떼구르르” 어딘가로 굴러갔습니다. 그리고는 굴러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겠죠. 즉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경우입니다. 

반면에 세 번째 비유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쾌락을 위하여 낭비한 사람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의 돌이키는 모습은 대단히 극적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독립함으로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줄 알았으나 도리어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처절한 失敗者가 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철저한 絶望을 경험한 그는 오직 아버지에게만 希望이 있고 安息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비유를 드신 이유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는 15장 1절 말씀에서 보는 대로, 당시 죄인이요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든 이들이 주님께 나아오자 그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공개적으로 주님에 대해서 비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러운 자 혹은 더럽혀진 자로 드러내는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난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 즉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각각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큰 아들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작은 아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은 이와 같이 자기 앞에 있는 ‘작은 아들’과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큰 아들’과 같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 여러분은 자신이 어느 아들에 가까운지를 깨달으시기를 바라며, 그리고 본문이 주는 최종적인 메시지를 깨달으시기 바라십니다. 

3. 둘 중 누구와 같은가?

1) 작은 아들, 탕자

먼저 ‘작은 아들’, ‘탕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 탕자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漢字 文化圈에 사는 사람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탕자”란 ‘아버지를 배신한 蕩兒’, 혹은 ‘아버지의 재산과 자기 인생을 虛浪放蕩하게 낭비해 버린 자’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탕자인 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는 돈 많은 아버지 밑에서 제법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그가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자 ‘아버지가 자신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미리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재산이 양도되는 경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遺言’이고, 또 다른 하나는 ‘生時의 贈與’ 형식입니다. 오늘 본문은 증여 형식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아들에게 주어지는데, 이 증여의 경우 아들이 所有權은 얻지만 處分權이 없고 그 재산에 대한 受益權도 없었습니다. 즉 물려받기는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따라 유대 사회가 정해놓은 상속 법칙은, 본문의 경우처럼 부모에게 자녀가 두 형제뿐일 때, 次男에게는 1/3이 상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소유권과 처분권까지 요구했고, 자신의 상속분을 모두 팔아 現金化한 뒤 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둘째 아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遺産과 그에 대한 全權을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에게 ‘빨리 죽어라’고 협박하는 것과 같았고, 자신에게는 ‘살아있는 아버지보다 죽은 아버지가 더 낫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습니다. 산 아버지는 재산을 그 아버지가 소유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재산은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이런 마음을 아버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 가운데 그의 몫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 재산을 처분한 작은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가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이란 쾌락은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타까운 것은 사람의 쾌락은 만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안타까운 것은 물질이나 돈, 건강, 시간 등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쾌락은 무한정이요, 그 쾌락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수단은 제한되어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것이죠. 

결국 그는 破産했습니다. 경제적인 파산만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不渡 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 치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돼지를 얼마나 부정한 동물로 여깁니까? 그가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의 자리, 가장 낮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더 비참한 것은 거기서 조차 먹을 것이 없어 돼지 사료를 먹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철저한 失敗요, 완전한 敗北였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것을 영어성경은 “But when he came to himself(KJV)/his senses(NI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즉 작은 아들은 철저한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을 몰랐다가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가 살아 있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죽은 아버지의 재산을 더 원한 것이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으로 허랑방탕하게 지낸 것이나, 그리고 가장 비참한 실패의 자리로 떨어진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을 잃어버린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알지 못한 것이 실패의 이유였습니다. 그런 그가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안 것이 그의 인생의 진정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탕자의 눈을 열었습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없어진 일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고,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 있고,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 우리는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많이 가진 것이 도리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탕자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철저한 실패자의 자리에 이르게 했습니다. 모든 소유가 하나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마저 등을 돌려 철저히 외로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틈에 묻혀 살아갈 때, 내 주변에서 나에게 맞장구 쳐주며 같이 웃어줄 사람들이 있을 때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없어지고 철저하게 벌거벗은 모습이 될 때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탕자를 실패와 고독의 자리로 몰아 넣으셨고, 거기서 작은 아들은 자신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 아버지를 향하여 발길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2) 큰 아들, 집안에 있는 탕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은 큰 아들입니다. 그는 모범생입니다. 한 번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드러내어놓고 아버지의 재산을 탐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아버지를 떠났을 때, 자신만이라도 아버지 곁에 있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버지에게 섭섭함을 표시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겨서는 잔치를 열어 그 잔치의 중심이 되게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가 늦은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와보니, 집에서부터 음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즉각적으로 환영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겠습니다. 아무튼 큰 아들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굉장히 섭섭해 했을 뿐 아니라, 28절에 보면 화를 내었습니다. 

심지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서 일종의 ‘일인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가서 ‘집으로 들어가 함께 잔치하자’며 권했습니다. 그러자 큰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 

큰 아들의 이유 있어 보이는 항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거나 아버지 앞에 어긋난 길로 간 적이 없는 나를 위해서는 한 번도 파티를 열어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동생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그리고 그 일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습니다(31~32). 

이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큰 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큰 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기는 했지만 형식상의 함께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와 진정으로 함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읽는 것이고, 때로는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인데, 31,32절에서 보는 대로 큰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나 몸만 함께 있었을 뿐 그 중심, 그 생각, 그 마음이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것은 누구 봐도 전부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번 잔치를 위해서나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옷, 반지, 신발, 잔치 비용은 자신이 물려받을 것이 비하면 鳥足之血이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버지의 중심,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가져가서 허비한 것과 자기 몫에 대해 지극히 타산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기준에 따라 형제를 멸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큰아들 역시 겉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아버지와 너무나 먼 간격을 둔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제목에 붙인 것처럼 그는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거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 결국 그도 탕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것은 단지 아버지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그 이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의 뜻을 살펴 그것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 나간 동생을 걱정하면서 밤낮없이 그 동생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종종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을 기다리는 자리에 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예수님은 이런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또 다른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그들을요. 성도 여러분, 이 큰 아들의 모습은 바로 성도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미국 남침례교회의 Paul David Washer 목사는 “오늘 교회 안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무신론자 혹은 불신자 또는 죄인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신자이거나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인 이유는 그 중심과 삶에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요 다른 영혼들을 향한 열정입니다. 즉 큰아들이 자기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기지 못한 것처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감격이 없었던 것처럼, 열정 없는 성도들이 그와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전부입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 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다른 사람을 향한 열정보다 자기 꿈, 자기 일, 자기 가정, 결국 세상의 것과 사람의 일에 더 우선하고 그것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정 내 탕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아버지!

이제 마지막으로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너무나 無禮하고 자신을 향해 ‘당장 죽어라’는 말과도 같은 행동과 요구에 대해 전혀 나무라거나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재산을 가지고 떠나 버린 그 아들에 대해 마음으로 울면서 떠난 그 날부터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들의 문제, 아들의 잘못을 자신의 고통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굽이진 길 끝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던 끝에, 터덜터덜 걸어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그를 품었습니다. 

“왜 그랬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재산은 다 어떻게 했니? 건강은 어때?” 이런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안아주고 환영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구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20).”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아니 자신을 떠나서 굶주림과 허무함의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그리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스펄전의 말처럼 주님의 자비와 긍휼의 눈은 회개의 눈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고 측은히 여긴 것은 불쌍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더 아파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가슴을 한번 칠 때, 아버지는 두 번 세 번 이상 자신의 가슴을 찢으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스펄전은 말합니다. 

아들이 “‘과연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하면서 무겁고 千斤같은 걸음으로 한 걸음을 옮겨 놓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렸습니다.” 아들이 한 발을 옮겨 놓았을 때 열 걸음을 옮기신 아버지의 사랑! 이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여러분을 향해 다가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아들이 자신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더 이상 아들이라 할 수 없었으므로 종처럼 여겨 달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마치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파격적인 사랑을 아들에게 베풂으로서 그를 과거에서 떠나게 했을 뿐 아니라, 누더기를 벗기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는 반지를 끼우라!” 이것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기라!” 이것은 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의 귀환과 그에 대해서 잔치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큰아들에 대해 “그렇게도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니? 네 동생을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겨라. 오늘뿐이야. 오늘 이렇게 잔치를 벌일 뿐이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식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큰아들에게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네 아버지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이 집안에 있는 전부는 다 너의 것이다.’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확인 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이든지 자기 곁에 있으면서 마음은 떠나 있던 아들이든지 구별하지 아니하고 동일했습니다. 

3. 하나님과 나, 나와 하나님

이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죄인, 우리가 탕자라 부르는 둘째 아들, 그리고 모범생이지만 그 역시 아버지에게는 문제 있는 아들이었던 감춰진 죄인인 첫 아들! 여러분은 과연 누구와 더 닮았을까요? 둘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첫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 결국 똑 같은 탕자라는 것을 말하면서 사실상의 초점은 아버지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앞의 두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게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는 목자에게,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잃고서는 그것을 찾는 여인에게, 그리고 집 나간 아들이 아니라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나아가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두 형제를 통하여 여러분 자신을 똑바로 알고,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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