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호 7:8-16)

첨부 1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호 7:8-16) 
  

로마서 11장 22절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 함축적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롬 11:22) 

하나님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은 친절하시고 좋으신 분이라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엄위하시다는 것은 때로는 무섭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도 있으시며 엄위도 있으신 하나님입니다. 호세아서는 전체 14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하나님의 인자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내 고멜을 사랑해서 다시 데리고 온 호세아처럼 인자가 있으시고 사랑과 용서가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장부터 14장까지 아홉 편의 설교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시고 무섭게 심판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위하신 분이시지만 순간순간 인자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I.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 

호세아 6장 4절부터 7장 7절까지는 아홉 편의 설교 가운데 세 번째 설교이고 7장 8절부터 8장 끝까지는 네 번째 설교입니다. 세 번째 설교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인애를 잃어버림으로써 오는 악한 결과를 말하고 있고 네 번째 설교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인애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석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호 7:9) 알지 못한다는 것과 깨닫지 못한다는 말을 모두 한자로 바꾸면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무지라는 것이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 가지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무엇을 진실로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시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으신 창조자이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원자이시며 가나안 땅을 주신 축복자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지식적으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인정하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고 학생이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고 성도가 목사를 목사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호 7: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지식이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식도 있으시고 의지와 감정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행한 악도 다 알고 계시고 우리가 행한 선도 다 알고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로 기도했는가도 다 듣고 계십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 73:11)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지한 존재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자신들의 실상”이 어떤지에 관하여 무지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 어떤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재물과 힘을 다 빼앗아 가서 이제는 힘없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아직 힘이 왕성한 청년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을 한 번만 봐도 자신이 힘없는 노인이 되었음을 깨달을 텐데 자기가 청춘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대한민국의 유명한 소매치기로 소문난 사람이 병원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하러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증거하고 간절히 기도해주었는데 기도하는 중간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 목사님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매치기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 직업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평생 익힌 기술을 버리지 못했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이 소매치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죽을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에 대해서 환희 보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으며 자신들의 실상을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Ⅱ.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교육방법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무지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교육자입니다.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화(illustration)를 사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서를 봐도 예수님께서 수많은 예화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영적인 진리를 전달할 때에는 적절한 예화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에는 무려 열여섯 가지 종류의 예화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서는 어려운 학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7장에는 네 가지 중요한 예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네 가지 예화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실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뜨거운 화덕”(hot oven)과 같았습니다.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호 7:4-5) 

여러분 사람이 아주 차가운 것 보다는 뜨거운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것도 좋은 열정으로 뜨거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쁜 열정으로 뜨거운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 가지 나쁜 열정으로 뜨거웠습니다. 

첫 번째는 정욕으로 뜨거웠습니다.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호 7:4) 그러니까 사람마다 다 정욕으로 뜨거워져서 간음하고 바람피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정욕을 자제하는 듯이 보여도 그것은 참된 자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빵이 부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깐 정욕을 자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항상 정욕의 불이 뜨거워져서 다들 간음을 행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술로 뜨거웠습니다.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호 7:5) 좋은 것으로 뜨거우면 되는데 술로 뜨거워지니까 결국 몸에 병이 났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병원에 누워있는 것은 대부분 술의 뜨거움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으로 뜨거워졌습니다.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호 7:7) 옳은 판결을 하는 판사들은 다 죽이고 자기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하는 판사만 살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왕들은 계속 죽임을 당하여 정권이 계속 혁명과 살인을 통해서 교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스가랴가 왕이 되었는데 스가랴는 살룸이 죽입니다. 살룸은 또 므나헴이 죽이고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는 베가가 죽이고 이렇게 계속 정변이 일어나고 왕들이 죽어서 정치가 혼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간음과 술과 정권탈취의 야욕으로 가득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좋지 않은 열정으로 뜨거운 화덕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뜨겁되 항상 좋은 일로 뜨거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뒤집지 않은 전병”(half-baked pancake)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전병은 우리말로 하면 빈대떡입니다. 빈대떡을 부치려면 아래쪽이 다 익으면 주걱을 넣어 뒤집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바깥쪽도 익어서 맛있는 빈대떡이 됩니다. 그런데 한쪽만 익으면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빈대떡은 앞만 익고 뒤는 설익어서 먹을 수도 없고 어떤 곳에도 쓸모가 없는 빈대떡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익은 부분과 익지 않은 부분이 혼합이 되면 먹을 수가 없는 전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혼합 종교에 대해서 강력하게 정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와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를 혼합해서 신앙을 형성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쓸모없고 이방신에게도 쓸모없는 그런 종교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쓸모없고 먹을 수 없는 뒤집지 않는 전병과 같았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은 “어리석은 비둘기”(silly dove)와 같았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공회에 들려준 대로 저희를 징계하리라” (호 7:11-12) 

비둘기는 원래 어리석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편지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방향성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비둘기는 아주 어리석어서 동쪽으로 날아가라고 하면 서쪽로 가고 남쪽으로 날아가라고 하면 북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방향감각이 혼돈되어서 우왕좌왕하다가 앗수르로 날아가다 제물과 나라를 빼앗기고 애굽으로 날아가다가 조롱과 망신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15장 19-20절을 보면 므나헴이라고 하는 왕은 앗수르가 침공하니까 은 50세겔씩 다 거둬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쳐 일시적으로 침공을 모면합니다. 하지만, 민족자본을 완전히 소모하는 허물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앗수르에게 바치던 조공을 끊고 애굽에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사람들이 고약하게 여겨 주전 721년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애굽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조롱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라는 비둘기가 이렇게 되었느냐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물을 쳐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날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물도 치우시고 축복해주시는데 이 어리석은 비둘기는 올바른 방향만 쏙 빼놓고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넷째, 이스라엘은 “속이는 활”(deceitful bow)과 같았습니다.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호 7:16) 

속이는 활이라는 것은 구부러진 화살입니다. 화살이 구부러지면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 금메달 리스트가 쏴도 바로 날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성경을 통해 올바른 말씀을 가르쳐주셔도 사람의 마음이 구부러지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거친 말을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성자가 모인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부족하고 아직도 죄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혀서 의인이라고 인정을 해주시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여 있다 보니까 교회에 싸움도 있고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거친 말과 비난의 말을 하면서 이방신을 향해서는 아첨을 떠는 이것을 두고 속이는 화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결국 애굽 사람들에게 조롱거리만 됐습니다 


Ⅲ. 엄위하심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인자 

여러분 네 가지 예화를 보고도 모르겠다는 사람은 심각한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예화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자동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뜨거운 화덕과 같은 마음으로 인해서 사회와 윤리가 타락되고 정치가 혼란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집지 않는 전병같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축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되어 그물에 걸려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고 외교적으로 실패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속이는 화살처럼 되어 하나님이 쓸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죄악을 예화를 들어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죄악을 돌이키지 아니하면 망하게 된다는 엄위하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자가 숨어있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아버지들은 나중에 보면 뒤에서 울고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뒤에는 인자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엄한 아버지신데 뒤에서는 울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 6: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좌절하셨다거나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좌절도 없고 당황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가지신 인격자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우리의 감정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하나님 앞에 슬프면 슬프다고 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슬픔의 감정을 여러 번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7) 

우리가 자식을 기르는데 참 신앙으로 잘되고 바르게 살아가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자식들이 교회에도 안 나오고 매일 술 먹고 방탕하게 다니면서 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부모의 마음에 얼마나 큰 슬픔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최고급 형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을 때에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치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호 7:1)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말하고 서로 사기 치며 도적질하고 노략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치료하려고 할 때에 먼저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우선 병이 무엇인지 진단해야 됩니다. 병을 진단하여 드러내는 것은 환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도 치료하려고 하시는 의지를 가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지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왜 죄인이냐고 버팁니다. 또 죄가 많은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면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엄위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해도 당신이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지옥의 맛을 살짝만 봐도 예수님이 얼마나 귀중하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신지 금방 알게 됩니다. 사람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해서 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쉬운 예화를 들어서 설명하시는 이유는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이끌어 오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끌어 오셔서 치료하고 축복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하면 복이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고통입니다. 시편 73편의 기록자인 아삽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음녀같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무서운 분이시기도 하지만, 인자하신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엄위에 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인자에 거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2) 

올해 2011년도는 하나님의 엄위에 거하지 마시고 인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7장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호 7:7),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호 7:10),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호 7:14)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호 7:16) 

우리 성도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성심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높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인자를 구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다가도 기뻐하시고 때리시다가도 치료의 손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고 복 주시는 것입니다. 

2011년도에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구정이 지났는데 신정 때 결심한 것을 벌써 잊어버리셨다면 다시 결심하십시오. 

여러분 성경을 하루에 3장 읽고 주일에 6장 읽으면 1년에 한 번 읽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30장 읽고 주일에 60장 읽으면 1년에 열 번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는 모든 성도가 성경을 최소한 일독은 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도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주기도문이라도 자꾸 외우시기 바랍니다. 자꾸 외우다보면 기도제목이 생각납니다. 자식, 가정, 부모님, 교회,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올해는 기도와 성경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시고 하나님의 엄위에 거하지 마시고 인자에 거하시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