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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옥은 있습니다(1) (눅 16: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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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있습니다(1) (눅 16:23-31) 
 
 
❚안 뜨거운 지옥?

어느 날 마귀들이 긴급대책회의로 모였습니다. 한국 사람들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의장 마귀가 안건을 꺼냅니다. “그동안 우리 지옥불이 정말 뜨거워서 사람들이 생각만 해도 벌벌 떨었는데 한국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활활 타는 지옥불에 넣어도 하나도 안 뜨겁다고, 오히려 ‘어, 시원하다’ 하니 정말 큰일입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한국 사람들이 워낙 찜질방, 불가마에 단련이 되어서 웬만큼 뜨거운 불에 들어가서는 ‘어, 시원하다. 여기 불가마 정말 화끈한데?’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지옥불가마의 온도를 획기적으로 높이자, 이참에 지옥불가마를 리모델링해서 가스 가마로 만들면 좋겠다.” 등등... 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뜨겁게 하면 사람들이 지옥불이 무서워 다 교회 다니고 지옥에 하나도 안 올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하냐?”고 문제제기를 하자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집니다. 그러다가 한 젊은 마귀의 제안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여져 드디어 지옥도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떤 한국 사람이 예수 안 믿다가 죽어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오더니 친절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지옥 구경을 시켜드릴 테니 마음에 드시면 지옥에 오시고 안 들면 안 오셔도 됩니다.” 한국 사람은 이게 웬일인가 싶어 그 마귀를 따라 지옥을 구경하는데 지옥이 지옥 같지 않은 거예요. 너무 시설도 좋고 깨끗하고, 게다가 그 무섭다는 지옥불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옥에 가겠다고 자원하게 되지요. 

그런데 막상 지옥에 가보니 얼마나 무섭고 겁나고 지옥불이 활활 타는지요. 아무리 찜질방에서 단련된 몸이지만 도저히 견디기 힘들더랍니다. 자기가 전에 보았던 지옥과는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아니, 내가 전에 본 지옥하고 너무 다른데 왜 날 속였느냐?” 그러자 마귀가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전에 본 지옥은 모델하우스였소.” 마귀들은 한국 아파트들 중에 모델하우스만 그럴듯하게 꾸미고 실제 입주해보면 모델하우스와 너무 다른 게 많다는 뉴스를 보고 한국식으로 한국 사람들을 속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한국 사람들이 속아서 지옥 가겠다는 사람이 많더라고 합니다.

물론 지옥에 대한 우스갯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 속에는 상당히 진지한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지옥불은 정말 뜨겁다. 지옥은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영원히 당하는 곳이다. 그러니 지옥 가지 말자.” 하는 것입니다. 이 지옥불의 고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하고 지옥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렇게 되도록 마귀사탄이 가만 놔두겠습니까?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다 지옥불이 무서워 예수 믿고 천국 가려 할 텐데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겠지요. 그래서 세운 대책이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지옥을 안 믿게 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신화나 상징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예 사람들이 지옥 얘기를 안 하도록, 특히 교회 안에서도 지옥에 대한 말 안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예 언급을 회피하면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싹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저를 비롯한 설교자들이 지옥 얘기를 잘 안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옥 얘기를 하면 성도들이 불편해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이야기 할 때는 괜찮다가도 지옥 얘기 꺼내면 성도들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왜 좋은 얘기 다 놔두고 지옥 얘기를 한담? 불편하게시리...” 또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면 “우리 목사님은 좀 세련된 이야기를 하지 왜 저렇게 원색적이고 구닥다리 설교를 한담?”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불편한 마음이, 그리고 성도들 눈치를 보며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마음이 바로 마귀의 계획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옥이 진짜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지옥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오늘부터 두 차례에 걸쳐 지옥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지난번 천국 이야기와 똑같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입니다. 저는 이 2주 동안 여러분의 마음이 좀 불편해졌으면 합니다. 그래야 저도 설교 제대로 한 것이고, 여러분도 설교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지옥 설교를 듣고도 마음이 하나도 안 불편하고, 전혀 부담이 안 되더라 하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지옥 설교를 듣고도 하나도 안 무섭고 겁 안 나더라 하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따라 본문에 나온 지옥의 특징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따라 하세요. 첫째, ‘고통’(苦痛), 둘째, ‘불통’(不通), 셋째 ‘원통’(寃痛)입니다. 셋 다 ‘통’자로 끝나네요. 제가 여러분 머릿속에 각인되도록 일부러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겁니다.

❚고통(苦痛)

먼저 첫 번째 지옥의 특징은 ‘고통’입니다. 본문 23절과 24절을 함께 읽습니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3절에 나온 ‘그’는 바로 죽어서 지옥 간 부자입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즉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지옥 가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보니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지옥에서도 천국이 보이는가 보네요?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상징이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진짜 지옥에서 천국이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지옥 가서 천국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얼마나 더 고통스럽고 얼마나 더 후회되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지옥에서 천국을 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모습을 본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좀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세요.” 왜 이렇게 절박하게 부탁한 것일까요? 그 다음에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무슨 불꽃입니까? 바로 활활 타는 지옥불이지요. 그런데 그 지옥불이 엄청나게 뜨거운 것은 당연하고, 그 불 속에서 기한도 없이 영원히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상 입어보셨습니까? 화상 환자들 하는 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다른 병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아프고 뜨거운데 그 불 속에서 영원히 타야한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목은 또 얼마나 타는지 지금 부자의 단 하나의 소원은 물 한 통도, 한 잔도 아니고, 단 한 방울만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어준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지옥불은 뜨겁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지옥불을 상징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옥에 불은 무슨 불? 설마 지옥이 찜질방도 아니고 진짜 불이 탈라고? 그건 지옥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 하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겁 안 낼 것 아닙니까? 그래야 사람들이 지옥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맘대로 살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옥은 상징이 아닙니다. 신화도 아닙니다. 지옥불 역시 상징이 아닙니다. 진짜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죽지도 않고 영원히 끔찍한 고통 속에 불타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고통쯤은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끔찍하고 영원한 고통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고통스러운 지옥에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 절대 가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통(不通)

두 번째 지옥의 특징은 ‘불통’입니다. 본문 26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간절한 부자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적으로는 그 불쌍한 부자, 지옥불에서 타고 있는 사람의 소박한 부탁, 제발 물 한 방울만 찍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운명은 그런 소박한 부탁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요? “너희와 우리 사이에”, 여기서 너희와 우리는 누구입니까? 물론 ‘너희’는 부자처럼 지옥 간 사람들이고 ‘우리’는 나사로처럼 천국 간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세요.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지 모르지만 세상 떠난 후에는 딱 두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너희’와 ‘우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출세한 사람과 못 한 사람, 남자와 여자,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 등등 수많은 세상적 기준에 의해 나누어져 살았지만 세상 떠나면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지옥 간 너희”와 “천국 간 우리”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또 세상에서는 가족이고, 남편이요 아내고, 부모 자녀 사이로 함께 살았지만 나중에 죽은 후에는 둘로 나누어 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 간 남편”과 “천국 간 아내” 혹은 “지옥 간 자녀”와 “천국 간 부모” 등입니다. 얼마나 절박한 문제입니까?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에 간 너희와 천국 온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 그래서 여기 천국에서 너희 지옥으로 건너갈 수도 없고 반대로 너희 지옥에서 우리 천국으로 건너올 수도 없다.” 그래서 나사로를 보내 물 한 방울 찍어주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오갈 수도 없고 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불통’(不通)입니다. 구렁텅이란 팔레스틴 사막지역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비가 안 오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 큰 골짜기를 말합니다. 깊고 깊은 낭떠러지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누구도 건널 수 없지요. 그래서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통할 수 없고 서로 오갈 수 없다, 그래서 한 번 천국행과 지옥행이 정해지면 그 누구도, 아브라함과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주교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煉獄)이 있어서 지상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봉사를 하면 그 사람이 한 발짝씩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이는 분명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입니다. 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도 성경은 분명 사후에는 천국과 지옥 둘밖에 없고 둘 사이는 ‘완전 불통’, 즉 결코 옮겨갈 수도 오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천국 가냐, 지옥 가냐는 한 번 정해지면 끝인데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있을 때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나도 꼭 예수 믿어 천국 가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오직 기회가 있을 때만 전도해서 지옥불이 아닌 천국에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지옥 가서 영원히 고통 받고 영원히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는 천국 왔지만 그들은 지옥 가서 서로의 모습(천국에서의 평안한 삶, 지옥에서의 고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꼭 지옥 말고 천국 갑시다. 우리 가족도 모두, 주변 사람들 모두 말입니다.

❚원통(寃痛)

마지막 세 번째 지옥의 특징은 ‘원통입니다. 본문 25절을 함께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역전(逆轉)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 너는 세상 살 때 풍족하게 살며 좋은 것 다 받았는데 이 거지 나사로는 온갖 고통과 고난, 수치 다 받았잖니?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니? 완전히 거꾸로 뒤바뀌었지? 너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고 나사로는 여기 천국에서 영원한 위로를 받는구나.” 그래서 완전히 두 사람의 운명이 역전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24절에도 나옵니다. 부자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먹여달라고 하소연합니다. 21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거지 나사로가 부자 밥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라도 달라고 애원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처지가 뒤바뀝니다. 부자는 정말 ‘원통’(寃痛)했을 것입니다. 너무 가슴 아프고 후회되었을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세상 살 때 예수 믿어 구원도 받고, 거지도 먹여주고 이웃과 나누며 살 걸, 좀 착하게 제대로 살아볼 걸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원통하고 후회스러우면 뭐합니까? 이미 끝인데요.

물론 부자가 세상에서 잘 살아서 지옥 간 것 아니고, 거지 나사로가 가난해서 천국 간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고 앞으로는 뒤바뀔 일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천국의 복과 위로도 영원하고 지옥의 고통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원통하고 후회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끝입니다.

오늘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말씀하는 지옥의 모습, 고통, 불통, 원통 이 세 가지는 그래서 교훈이 하나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후회하기 전에 지금, 바로 지금, 이 세상 있을 때 나는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을 위한 투자, 지옥 안 가는 희생

말씀 맺겠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지옥 가지 맙시다. 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지옥불 들어가지 맙시다. 나도 지옥 가지 말고 남도 지옥 보내지 맙시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주님은 천국을 위해 ‘올인’(all-in)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올인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바치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밭에서 소작을 하다가 밭에 감추어진 보물상자를 찾은 사람은 당장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왜요? 거기 묻힌 어마어마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왜요? 그 진주 하나만 얻으면 엄청난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얻기 위해 내 모든 것을 팔고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과연 우리는 천국이라는 가장 값진 보화를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얼마나 희생하고 투자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면 좋고 안 가면 할 수 없고” 식이 아니라 정말 천국 가는 것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줄 알아 모든 것을 올인하고 투자하는 사람만이 천국이라는 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 자신의 천국행을 위해, 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행을 위해 얼마나 올인하고 투자하고 희생하고 계십니까?

반대로 마가복음 9장 43절부터 4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해야 하는 것처럼 지옥 안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내 손이 범죄해서 나를 지옥 가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려라. 장애인으로 천국 가는 것이 두 손 가지고 지옥불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 발도 마찬가지, 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지옥 안 가고 천국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지옥은 무서운 곳이고 천국은 좋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지옥 안 가려고 얼마나 포기하고 계십니까? 천국 가려고 얼마나 투자하고 계십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남편 화 돋우면 안 되니까 남편 전도는커녕 저도 교회 못갑니다. 불도가 심한 시댁 때문에 못 갑니다. 사업과 직장 때문에 못 갑니다. 우리 애 대학 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 못 보냅니다. 목사님 죄송해요.” 물론 다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까? 저한테 왜 죄송합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혹 우리가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 포기하지 못하다가 지옥 가고 지옥 보내는, 이 부자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가요? 아니면 천국을 얻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그야말로 다 바치고 올인하는 천국의 백성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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