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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롬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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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롬 6:1-14)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입니다. 미국의 평범한 가정인데 아빠와 엄마가 있고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는 가정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어느 날 이들은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빠도 엄마도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반응은 ‘얘가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라는 것이고 엄마의 반응은 ‘동성애는 죄다. 회개해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 아들을 기도회에 데리고 다니고 아들 방 구석구석에 성경구절을 적은 메모지를 붙여놓습니다. 열심히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달라지지 않고 그 고민을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자기 생명을 끊고 맙니다. 그 부모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들의 의구심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느냐. 동성애를 죄라고 하면서 왜 우리 아들이 그런 성향을 갖게 하셨느냐. 이건 하나님에 대한 원망 ․ 의문 ․ 의심 ․ 신앙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이건 상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건 그들이 더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부모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엄마가 강하고 아빠가 우유부단하면 그런 일이 생긴다더라 이런 의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람은 얼마나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변화를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고 어떤 기대가 정당치 못한 것이냐.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건 별로 즐거운 주제는 아닙니다마는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되느냐? 어머니의 깨달음과 뉘우침으로 끝납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 사실을 엄마는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은 그것이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약장수 같은 신앙을 원치 않습니다. 약장수를 예전에 보셨을 것입니다.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면서 약을 파는 사람. 이 약만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선전하고 만일 그 약이 듣지 않을 때는 그건 약을 먹은 사람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사람. 그건 엉터리 약을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낫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선물세트를 사면 포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게 큽니다. 먼저 봉투에서 선물세트를 꺼내서 박스를 열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박스가 테이프로 겹겹이 포장돼 있기 때문에 칼로 그 테이프를 다 찢어서 박스를 열면 그 안에 플라스틱 용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물건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물세트를 하나 받으면 쓰레기로 나가는 포장의 부피가 엄청납니다. 내용물보다도 포장의 부피가 더 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포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포장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설교에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할 수 있겠지요. 포장이 없으면 좀 밋밋하고 좀 직설적이고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포장이 필요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포장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포장은 어디까지나 포장이고 그 속에 있는 내용물이 진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어디까지가 포장이고 어디부터가 내용인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포장 자체가 내용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손해입니다. 어떤 포장이 신앙생활일 수 있느냐. 

첫째는 감정이라는 포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실체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 있을 때는 좋습니다. 그러나 아침의 이슬방울 같기 때문에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감정이 실체가 아니에요. 감정 자체가 성령이 아니고 감정 자체가 은혜가 아니에요. 감정 자체가 구원이 아니에요. 감정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심리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여자가 반응하는 방법이 다르고 남자가 반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죄인이 반응하는 방법, 의인이 반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 반응 자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반응을 이끌어내는 실체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감정에서 뭔가 하나님의 흔적을 찾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고 그리고 감정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예술가라든가 연예인이라든가 그 감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감정적인 것에 목을 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보면 그들의 신앙의 기복이 너무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는 열정이라는 포장이 있습니다. 열정. 우리에게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정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게 아니고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의 선의라는 포장이 있습니다. 선의라는 말은 선한 뜻 ․ 좋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좋은 동기로, 좋은 뜻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선의는 과장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선의는 실제보다 더 좋은 것처럼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선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를 구원하지만 인간의 선한 뜻 그 자체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가사에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결국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사람의 선한 뜻이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할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입장은 의사와도 같고 약사와도 같고 FDA와도 같습니다. FDA는 식약청을 말합니다. 의사로서 성도를 진단하고 약사로서 약을 조제하지요. FDA는 과연 어떤 약이 효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아무 약이나 팔지 못하도록 임상실험을 통해서 이 약이 과연 얼마만큼의 효험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식약청의 역할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연 신앙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오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 단위로 사람을 지켜보면 그러면 포장과 내용물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일시적인 변화와 영구적인 변화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 변화와 그리고 인간의 희망사항으로 끝나는 것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약이 정말로 효능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는데 

첫째는 소속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에서 사람이 세례 받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에게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속된 단체가 있습니다. 크게는 우리의 국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에요. 우리는 대한민국에 속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위하고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작게는 내가 졸업한 학교 또 클럽 또 정당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들으면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처럼 찬송가를 들으면 마음에 감동이 오지요. 은연중에 예수님에게 끌립니다. 교회에 끌립니다. 믿는 사람에게 끌립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교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뭔가 공통점을 느낍니다. 이건 누가 강요해서 생기는 게 아니고 자발적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기 이전에는 우리가 구경꾼이었습니다. 남의 일로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에게 소속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소속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저는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교회를 나갔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은 열일곱 살 때의 일인데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 그 변화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고 또 연륜도 많이 있지만 제 마음속에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때 그 변화가 지금까지 저를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지위의 변화입니다. 지위의 변화. 6절과 7절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이것은 도덕전인 변화가 아니고 지위적인 변화입니다. 포지션의 변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해요. 예수를 믿으면 도덕적인 변화가 즉시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 봐서 압니다. 삼척동자도 압니다.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당장 천사로 변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변화가 당장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살려는 마음은 생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 바로 살지 못합니다. 그럼 뭐가 변했다는 얘기냐.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말은 영적 지위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인의 지위였다가 의인의 지위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를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는 법정적인 의이고 하나는 실제적인 의입니다. 실제적인 의는 사람이 실제로 의를 행해서 얻는 의로움입니다. 테레사 수녀라든가 슈바이처 박사 같은 사람은 실제적인 의인이에요. 의로운 행위를 했으니까. 그러나 법정적인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의롭다는 판결을 얻음으로 얻는 의로움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할 때는 법정적인 의로움을 얻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당연히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나의 모습과 영적인 지위로써의 나의 모습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의인이면서도 죄인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건 위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그래요. 실제로는 아직 죄가 있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에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이지요.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그만큼 거룩하고 의롭고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맡기셨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가운을 입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입는 가운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덮어주는 하나님의 의의 옷. 이것이 뜻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지위적인 변화는 실제적인 변화보다 앞섭니다. 그래서 사람이 실제로 의로운 일을 해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의롭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는 목적의 변화입니다. 4절 말씀에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목적의 변화는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변화 중에 가장 권면과 격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변화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문구도 희망사항으로 적혀 있습니다. ‘하려 하심이라’ 

1960년대 말에 캘리포니아에 히피들이 있었습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수염을 기르고 맨발로 다니는 히피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부흥운동이 일어났어요. 그중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프리스비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도 과거에 마약도 하고 동양종교에 심취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됐는데 그 청년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간증을 할 때 뭐라고 했느냐면 ‘나는 옛날에 마약을 할 때는 친구들에게도 마약을 권하고 또 뭐를 할 때는 친구들에게도 그것을 권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니까 친구들이 얘가 또 심취한 유행일거다. 조금 있으면 또 달라질 거다, 이렇게 생각하던데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의 차이점은 이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되더라’ 이렇게 말했어요.

지속되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진짜 변화와 가짜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짜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유행가 같은 것인데 진짜 변화는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달라지지 않고 인생의 위치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일시적인 유행이 있어요. 일시적인 변덕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싫증을 내고 그리고 다른 것으로 옮겨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목적의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고 천국을 지향하는 목적의식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의 장애를 두려 말아라’ 그 방법, 그 섬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는 게 아니고 선교사가 되는 게 아니지만 그러나 그 목적은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을 많이 달았지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길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일 거기에 제시한 길 말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든가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면 내비게이션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안내하겠습니다.’ 하면서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목적지가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비록 처음에 내비게이션이 제시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더라도 그 목적지를 중심으로 다시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처음에 보여주신 그 길 그대로만 가는 사람 없습니다. 도중에 골목에 빠지고 길을 잃어버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실 수 있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목적지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오셔서 얻기를 원하시는 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데 어떡하면 그 목적지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이걸 얻기 위한 것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거기에서 나갈 길과 거기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 바른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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