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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의 힘 (창 26: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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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의 힘 (창 26:19-33)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말이 있습니다. 또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도 있습니다. 비슷비슷한 말들입니다. 약육강식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강자만이 약자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고, 적자생존은 생존경쟁에서 외부환경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입니다. 본래 동물의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인간 세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물론이고, 집단과 집단,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강해지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저런 힘을 키웁니다. 국가들도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되려고 경쟁을 벌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정말 살벌합니다.   

이 살벌한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아니 최소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물론 실력을 길러야 하겠죠.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다투며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식으로 1등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1등을 한다고 해도 행복할까요? 평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교훈합니다. 온유(溫柔)로 승리하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온유는 부드러운 것인데, 험악하고 살벌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부드러움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흔히 온유를 유약한 것으로 생각하지 쉽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결코 약한 게 아닙니다. 라틴어로 온유는 ‘mitis’입니다. 부드러움, 겸손이란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어원상으로 보면 그 의미가 특이합니다. 

‘말에 재갈을 물리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잘 다스려지고 절제된 상태입니다. 맹수가 방치되면 그 힘으로 파괴적이 되지만, 조련사가 잘 길들이면 순한 양처럼 변화되고 유익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제(治水)되지 못하면 홍수가 나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댐을 세워 물을 가두고 수문으로 조절하면 전력도 생산하고, 농사에도 도움이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온유함이 어떤 것인지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이 온유하시지만,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절제하고 적절히 사용하십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온유해지려면 멍에를 메라는 겁니다. 소를 잘 제어하기 위해 멍에를 멥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힘이 있어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힘을 사용합니다. 그게 바로 온유입니다. 영어성경에 온유를 ‘gentle’로 번역하는데,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gentleman, gentlewoman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온유는 결코 유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강한 것이다! 사실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역설적으로 부드러움 가운데 힘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를 불러, 자신의 입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제자가 대답합니다.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아니요.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가 남아 있는 이유를 아느냐?" “글쎄요?”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법이다. 그러니 절대 혈기를 부리지 말고 온유한 성품으로 살아라.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느니라!”  

운전을 할 때도 부드러움이 강한 겁니다. 초보 시절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힘을 주며 핸들을 잡습니다. 그런데 능숙해지면 오히려 힘을 주지 않습니다. 살짝 잡고 있다가 핸들을 틀 때만 힘을 줍니다. 테니스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죠. 어깨에 힘을 빼야 스윙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칠 때도 어깨에 힘을 빼야 제대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부드럽게 터치하는 것 같은데 강한 힘이 나옵니다. 우리 말 중에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있죠.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꿋꿋하고 곧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가 바로 그런 겁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온유함에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온유의 힘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1] 이삭이 처한 현실 : 약육강식의 세상  

본문을 보면, 이삭이 처한 현실은 정말 살벌했습니다.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세상이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의 그랄 지방에 거주하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거부가 됩니다. 

창26:12~14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의 수확을 거둡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정착민으로 전문 농사꾼입니다. 보통 25배~30배의 수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목민인 이삭이 100배 수확을 했으니 얼마나 약이 올랐겠습니까? 시기심이 발동했고, 텃세를 부리게 됩니다.   

창26:15~16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아브라함 때 구입한 땅에 우물을 파두었는데, 흙으로 메웁니다.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노골적으로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삭이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웠을까요? 그래서 그곳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패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가는 데마다 쫓아가서 시비를 겁니다.   

그 당시 우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중요한 겁니다. 팔레스틴은 거의 사막 지대였기 때문에 항상 물이 모자랐습니다. 우물을 파서 물을 확보하지 않으면 사람도 살 수 없고, 목축이나 농사도 불가능합니다. 우물은 재산목록 1호인 셈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삭이 이러 저리 쫓겨 다녔지만 가는 데마다 땅을 파면 물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죠. 그런데 토박이인 블레셋 사람들은 물을 얻지 못합니다. 심통이 날 만도 합니다.

20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그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이 그 우물의 이름을 뭐라고 붙였나요? 에섹(qc,[)인데, 히브리어로 ‘다툼’이란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행패로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명명했겠습니까? 21절.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다른 데 가서 우물을 팠는데 또 와서 괴롭힙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였나요? 싯나(hn:f]c)인데, ‘대적’ ‘원수’ 대적, 원수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으면 그렇게 명명했을지 짐작됩니다.
  

[2] 이삭의 온유 : 인내, 양보, 선대   

상황이 이쯤 되면, 보통 사람 같으면 당연히 울화통이 터질 겁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떻게 했는지 잘 보십시오. 그는 온유함을 잃지 않고 처신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인내합니다. 양보합니다. 그리고 선대합니다. 22절(상).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 ” 또 옮기고, 또 옮기고 ...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지혜로운 겁니다. 이삭도 인간인지라 속이 많이 상했겠지만, 그래도 그는 풀 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그는 비록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였지만, 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그의 마음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24절~25절(상).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 ” 

아마도 그가 밤에 기도하고 있을 때였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함께 해 주시고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현실도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투명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힘이 되시고 보장이 되신 겁니다. 새 힘을 얻은 이삭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단을 쌓습니다. 

답답하고 분한 상황 가운데 온유함으로 참을 수 있는 것은 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만일 힘이 없어서 짓눌리면 울화병으로 지레 죽죠.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온유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얻은 절제된 힘입니다. 벧전2:19~20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뭐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입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울분이 생기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피뢰침은 낙뢰를 맞아도 끄떡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죠? 접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 은혜에 연결되어 그 은혜를 기억하고 깊이 묵상하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당해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엄상익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 무슨 봉사를 할까 생각하다 무료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탈옥수 신창원 같이 죄질이 나빠 변호사들이 기피하는 사람들의 국선 변호를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재판 과정에서 판사에게 수모를 당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속이 상합니다. 기도하다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공책을 사다 표지에 <수모 100번 감당>이라 작고 수모당할 때마다 기록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너끈히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판사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까지 생겼고, 죄수들도 개과천선하거나 회심하는 일도 많이 생겼습니다. 기분이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면 내 인생이 잘못될까봐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새 힘을 얻으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보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니까 붙들어주시니까 두려워 말고 승리를 확신하라는 겁니다. 
  

[3] 이삭이 얻은 승리 : 축복,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여러분, 이삭이 어떻게 되나 보십시오!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고 계속 축복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게 진짜 승리입니다. 22절.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계속 손해보고 양보하고 ... 그러다가 르호봇(t/bjor)까지 갑니다. 르호봇은 이삭이 붙인 이름인데, ‘넓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말이 그렇지, 정확히 말하면 변두리로 밀려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그래도 축복입니다. 이게 참 신기한 겁니다. 이리저리 쫓겨 다녔지만 가는 데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방해도 받지 않는 넓은 장소에 거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26절 보면, 통쾌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아비멜렉이 비서관 아훗삿,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옵니다. 왜요? 평화조약을 맺자고 온 겁니다. 이삭이 그때 비로소 뼈있는 말을 합니다.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화친을 하자고 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겸연쩍어 하며 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28절. “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 ” 죽 지켜보니까 이삭의 삶이 자기들 하고 젼혀 달랐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게 역력하다는 겁니다. 

29절. “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삭이 축복을 받았다고 인정한 겁니다.  

이제는 이삭에 대한 두려운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이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이제는 과거의 일일랑 잊어버리고 평화조약을 맺자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이삭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벌입니다. 잘 대접해서 그들을 보낸 후 어떤 일이 생깁니까? 

32절.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또 우물이 터집니다. 이게 바로 온유한 자에게 연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 위에 은혜’의 축복입니다. 이삭이 그 우물을 뭐라고 명명합니까? 브엘세바([b'v, raeB)인데, ‘맹세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축복을 더하실 뿐 아니라, 확실히 보장해 주셨다는 감사와 기쁨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온유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듣기 좋으라고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생한 약속입니다. 100% 보증입니다. 예수님도 팔복 가운데 세 번째로 온유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땅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사람은 참된 하나님 백성이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복락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업이라 말이 상속재산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살 동안에도 땅을 정복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생과 내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악한 자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온유함으로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승리 비결입니다. 

롬12:17,18,21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둠은 절대 어둠을 이기지 못 합니다 오직 빛이 어둠을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온유의 힘을 얻어 선을 행할 때 비로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같이 미워하고 다투면 둘 다 망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에 살면서 힘들지만 온유함으로 선행을 실천하며 살라는 겁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고 세상적인 힘이 많아지면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굽히고 들어올 줄로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더 반발합니다. 그런 가운데 훈계조로 말하면 이렇게 대꾸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 반대로 우리에게 힘이 있어도 겸손하고 온유할 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에 대해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맞섰습니다. 그의 신념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배운 겁니다. 그는 이를 30년 동안 실천했고, 그 바람에 동족이 무려 20만 명이나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영국이 손을 들고 철수하게 됩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입니다. “당신들의 기독교는 가져가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만 두고 가시오!” 기독교회가 세속적인 힘을 가지고 행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온유하게 섬길 때 변화시킬 수 있는 겁니다.  

어느 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가정에 심방을 왔습니다. 남편은 교회 나오지 않는데 억지로 예배드린 후 여 집사님이 다과를 준비하러 주방에 간 사이에 목사님이 남편에게 교회 좀 나오시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아내 때문에 못나간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성질이 나쁜지 자기도 아이들도 꼼짝 못한다는 겁니다. 

말은 항상 예수님 말씀대로 맞는 말을 하지만, 반발심만 생긴다고 합니다. 충격을 받은 목사님은 오랜 시간 기도하고 여 집사님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가족들을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다행히 여 집사님이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광인 남편이 낚싯대를 갖고 집안으로 들어오다 실수로 전등을 깨뜨렸습니다. 

얼마 전에 비싸게 설치한 전등인데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남편은 초긴장을 합니다. 그런데 여 집사님이 어디 다친 데 없냐며 미소를 지으며 얼른 빗자루를 갖고 와서 다 치우는 겁니다. 남편은 너무 놀랐습니다. 전등이 깨진 것보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미소로 넘어가는 모습 때문에 더 놀랐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그 남편이 교회에 나왔고 신실한 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게 바로 온유의 힘입니다.   

여러분, 험한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온유의 힘으로 승리하라! 온유는 유약하고 무능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강할지라도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인격으로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온유의 힘이 나타납니다. 부디 이 비밀을 깨닫고 온유의 힘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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