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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온 후로는 (갈 3: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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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온 후로는 (갈 3:23-29)


그리스 시대에 소피스트(Sophist)라고 불리던 철학자들은 소위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자기네 철학 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대명제로 삼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인간이야말로 모든 존재세계를 판단하고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찬 가운데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논리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던 소피스트들에게 충격적인 일격을 가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 일격은 바로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과제였습니다.
즉 소피스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신봉하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이것부터 먼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도전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사람이 어떤 논리를 전개시키고 무슨 행동을 판단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만 할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시원한 답을 찾을 길이 없는 불가해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난해하게 보이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아니 정답을 찾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앞에 기록된 15절로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를 증거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23절 이하의 본문을 통하여서는 그 하나님의 크신 구속사가 우리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밝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는 세상 사람들이 풀 수 없었던 질문, 그러나 꼭 풀어야만 할 실로 중대한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오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믿음이 온 후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오기 전의 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본문 23절과 24절에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에 매인 죄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23절에서 사람은 '율법이라는 간수 아래에 속박되어 있는 죄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었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특히 여기서 '매인 바 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군인에 의하여 경호 혹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시가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도시 외곽을 봉쇄함으로써 적군의 침입을 막고 동시에 아군의 탈주와 거주민의 이탈을 방지하는 경우 등에 적용된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저히 바깥 세계로 나갈 수도 없고 연락도 할 수 없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3절 끝에 나오는 "갇혔느니라"라는 단어도 본질적으로 같은 뜻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은 고기를 그물로 "에워쌌다"고 했을 때에도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이 두 단어들이 강조하는 바는 곧 '원래 사람은 누구나 다 율법의 감시에 매이고 정죄라는 감옥에 갇혀서 결코 스스로는 빠져 나갈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둘째로,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몽학선생"이라는 비유로써 사람의 죄인된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가정교사' 혹은 '보호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 의사나 예술가 혹은 기술자 등이 다 노예였던 것처럼 이 몽학선생의 신분도 역시 주인의 노예였습니다.
그의 주된 의무는 주인의 자식을 학교에 등하교시키고 그 일상사의 언행을 지도감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몽학선생의 하는 일이란 교육이라기보다는 훈육이었고 교사이기보다는 사감에 더 가깝다고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그들은 자기가 맡은 아이들에 대해서 엄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고대의 그림에 보면 이들은 보통 손에 매나 회초리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이 "몽학선생"이라고 번역된 말은 오늘날의 말로는 '엄한 가정교사' 정도로 생각하면 가장 가까운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던 사람'의 존재란 바로 이와 같이 '감옥에 갇힌 죄수'나 '엄한 훈육선생 밑에 있는 아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명령들과 그 명령에 대하여 불순종할 때에 받게 될 벌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 율법이 사람에게 명시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율법 아래에서 사람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율법은 마치 '간수와 군인'처럼 그 죄인을 체포했으며 '엄한 가정교사'처럼 그 죄인의 잘못된 행실을 책망하고 벌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바로 이처럼 '율법의 권세 아래 꽁꽁 묶여 있는 죄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가 이 나라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지고서 마음대로 활동하고 내가 이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살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에 있어서 나 자신이란 죄 아래 완전히 매여 있고 꼼짝없이 갇혀서 살고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오기 전의 나'는 모든 활동과 사고가 오직 나의 욕심과 교만이라는 이 죄의 담벼락 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제한되어 있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양심에 손을 얹고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이 착하게 살고 있는 것 같더라도, 내가 경찰관이나 판사를 두려워할 일 없이 정직하게 살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에 있어서 나 자신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엄한 잣대에 비추어 보면 항상 야단을 맞고 벌을 설 수밖에 없는 수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생기기 전의 나'라는 존재는 제아무리 잘난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날마다 훈육과 징계가 필요한 철없는 문제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이 감독하는 한 우리는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율법이라는 간수'가 지키는 한 우리는 그 징벌에서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사실부터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 이름 석 자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도, 내 부모가 누구이며 내 고향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보다도, '나는 원래 죄인이다.'라는 이 사실부터 깨달아야만 우리는 이 우주 가운데 있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아이큐와 내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알기 이전에, '나는 죄로 인하여 매이고 갇혀 있고 결국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라는 이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제일 먼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인 줄을 압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그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맙고도 기쁘게 영접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자'나 '여자'이기 전에 우선 공히 '죄인'입니다.
우리 각자가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죄인'이었으며, '남편과 아버지', '아내와 어머니'가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성인'이라고 자처하기 전부터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었으며 '현대인'이라고 자칭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죄인'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세상적으로는 잘난 인간처럼 보여도 실상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지옥의 영벌에 영원히 갇히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이 온 후의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만약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이것은 훨씬 더 큰 문제를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허망하고도 절망적인 대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성경의 대답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의 23절을 다시 보시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은 오직 "믿음이 오기 전에",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24절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듯이 그 첫 번째 대답은 오직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한정적으로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 이하에 보면 그야말로 구구절절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온 후"라는 말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몽학선생 율법 아래'에서는 죄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다른 존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온 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로 대답해 줍니다.
첫째로,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바로 25절 이하 27절에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기록한 말씀대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감옥에 가두시는 '엄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용서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 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우리는 이제 그 분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 분이 내리실 벌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진실하게 모시는 삶만 남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바로 앞에서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내린 선고의 마지막 집행 순간만을 기다리며 벌벌 떨던 죄수였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우리는 몽학선생의 엄한 감독 아래 매여 있는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누리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몽학선생'은 자기가 가르치던 '주인의 아들'이 성장하여 주인의 유업을 정식으로 잇게 되고 나면 자기 자신도 역시 그 '주인의 아들' 밑에 종속되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고" 율법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얻고 그 완전한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믿음이 온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 믿음이란 더 구체적으로 말할 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입는" 중생을 뜻합니다.
"세례"는 바로 이와 같은 '내적 변화'를 외적으로 증거해 주는 성례인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고 연합을 이루게 해 줍니다.
즉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것을 증거하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통하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바로 본문 28절에서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 이제 우리는 '예수 안의 형제자매'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는 이전에 사람과 사람을 떼어 놓고 차별시키던 모든 벽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실로 놀라운 교제입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 구별이 없는, 즉 '인종의 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교제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의 차별은 오늘날 현대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종차별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살던 사람치고 그런 인종의 차이가 극복될 길이 있다고 상상이라도 했던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하게 보였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장벽이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것 하나를 통하여 한순간에 무너졌던 것이며, 현대사회에 와서도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는 인종차별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만 진정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형제관계는 '신분의 고하'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종이나 자주자", 즉 '노예나 자유민'이나 할 것 없이 한 형제자매가 되는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노예와 자유민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란 오늘날의 사장과 종업원의 차이 정도로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바로 자기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똑같이 믿는 한 믿음 안에서 그 지극히 당연해 보이던 신분 차이까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출생 배경과 부의 정도와 교육 수준과 사회적 능력에 따른 신분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오직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에서는 세상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진정한 평등과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형제자매의 연합은 또한 '성별(性別)을 불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남자나 여자 없이" 다 "하나"가 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女性)이란 '차별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멸시받는' 성(性)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차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남녀 사이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진정한 '남녀평등' 사상과 실천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교회를 통하여'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처럼 인류 역사를 통하여 지극히 고질적이고도 근본적인 3대 장벽들,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불신 사회 속에서는 이런 차별들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어 교제하는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차이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신앙의 축복을 잇는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본문 29절에 "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업"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바로 앞의 구절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구원 확신'과 '형제자매 된 성도가 누리는 교회생활의 축복'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수천 년 전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이 최고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며 또한 바로 이 신앙의 유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줄 책임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교회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대대로 이어가는 축복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들입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찾게 되는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실로 얼마나 멋있는 것들입니까?
'믿음' 이것 하나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흘러가는 이 인류 역사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렇게 확실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기독신자는 '나'라는 존재를 '3차원의 각도'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높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넓이'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땅 끝에 이르도록 다 평등한 한 형제자매'로서 교제하게 됩니다.
  
'길이'의 관점에서도 '에덴동산에서부터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연연히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그 귀한 유업을 이어받고 전해 주는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대답들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이후부터 비로소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도 은혜로운 '자아 인식'이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동물계의 영장류(靈長類)'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상급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장망성 인간사회에 속한 저주 받은 백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함께 구속함을 얻은 영생의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21세기에 잠시 살다가 죽을 인생'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축복의 유업을 세상 끝날까지 이어갈 특별한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후'에만 누릴 수 있는 이 놀라운 '새 사람'의 은총과 축복을 늘 자각하며 끝까지 지키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겪고 나면 전혀 딴판의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군대에 갔다 온 후의 남자'는 '군대에 가기 전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철없고 게으르고 불평만 하던 문제아'가 '의젓하고 부지런할 뿐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어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 본 여자' 역시 '처녀'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 알던 공주병 환자'가 비로소 '효녀'가 되고 '어엿한 어머니'와 '믿음직한 반려자'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오기 전의 나'와 '믿음이 온 후의 나'는 더욱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불신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의 신자'와의 차이는 문자 그대로 '옛 사람'과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온 후로는 '이전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고 자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안의 형제자매요 아브라함의 축복의 후사가 되었음'을 깨닫고 기뻐하며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위 '자아 상실', 혹은 '자아 인식의 위기'(identity crisis)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자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인간의 현실을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진정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인생의 바다 위를 그야말로 닻을 내릴 곳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청소년들은 탈선하고 성인들은 방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길 잃은'(lost)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상실과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 '믿음이 오면' 과거의 나 자신은 비록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아도 실상은 오직 '율법 아래 속박된 죄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일단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안에 살게 되면' 이제 위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옆으로는 성도와 한 형제자매가 되고 앞뒤로는 구속사를 이어가는 교회의 한 일원이 된 실로 존귀한 '새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늘 감사 감격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깨끗하고도 멋있는 '자아발견'이겠습니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찾고, 내가 서 있는 곳에 자리 잡고, 또한 내가 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나아가는, '새 사람의 새 생활'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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