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수레바퀴의 밝음과 어두움 (창 26:12-16)

첨부 1


수레바퀴의 밝음과 어두움 (창 26:12-16)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지지난 주, 거금을 드려서 승용차를 세차하였습니다. 차 안에서 냄새가 나기도 하고, 겨우 네 묶은 때를 벗겨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차 안팎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세차를 하고 나니 그 동안 지상 길가에 주차하던 것을 지하주차장에 하게 되었습니다. 먼지가 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심방을 하기 위하여 잠깐 타고 제 빨리 지하 주차장에 모셔두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는 눈이 날리기에 일찌감치 지하 주차장에서 넣었습니다. 아마도 깨끗한 것을 깨끗하게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새 차를 사서 눈 비오는 날은 차가 더러워질까봐서 아예 포장을 씌워서 집에 모셔두고 버스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관성의 법칙일 것입니다.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은 현재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로 이를 관성(慣性)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물체뿐만 아니라 깨끗한 것을 깨끗하게 계속 보존하려는 마음도 일종의 관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러운 것을 더러운 데로 그냥 두려는 관성도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이라고 또는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것에 물들어버리면 더럽다고 느끼지 않고 그냥 지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깨뜨리고 일어나야 할 관성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기근을 피해 그랄이라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아내라는 것은 드러나고 책망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이 뜨뜻해지는 일을 겪습니다. 
     
이런 이삭의 다음 모습은 무엇입니까? 부끄러운 일을 겪은 이삭은 어떻게 삽니까? 부끄러운 데로 그냥 살아갑니까 아니면 부끄러움을 떨고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부끄러움을 딛고 일어나는 밝음을 주셨습니다.

I. 밝음

하나님께서는 실수한 이삭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여야 할 이삭에게 오히려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12절입니다.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참으로 꿋꿋한 이삭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복[&r'B;/바라크]이란 말은 복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입니다. 여기에는 ‘높이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편없는 이삭을 사람들 앞에서 높여주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26:3). 이삭은 불성실하였지만 하나님은 이삭에게 성실하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불신앙이 아니라 순종을 보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좋은 모습만 어여삐 보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삶의 질곡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행여 실수하였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때로 한쪽 눈을 감고(?) 다가오시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을 이루어 주셨습니까?
     
13절입니다.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농사를 지어 한 해에 백배나 얻었으니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겠지요.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말 성경의 표현으로 보아도 처음에는 창대하고, 다음으로 왕성하고 그리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 그대로 입니다. ‘점점 재산이 불어 마침내 거부’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점점 복을 주셨습니다.
     
끝이 행복한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때, 세상에서 유명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가졌던 사람도 있습니다. 한 때, 남부럽지 않게 잘 나가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어떠하겠습니까? 장차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에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돌보아 주시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게 하셔야 할 사람입니다. 사노라면 내려갈 때도 있고, 올라 갈 때도 있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고 돌보아주셨다고 고백하는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는 이삭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14절 전반절입니다.
14a :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게 하셨으니 이삭이 양 떼와 소 떼, 남종과 여종을 많이 거느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서 ‘심히 많다’[br'/라브]는 말은 기본적으로 ‘풍성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우두머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높여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을 제치고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분에 넘치는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받을 만한 것보다 훨씬 뛰어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순종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투자한 것에 몇 배의 이득을 얻을 것인가를 계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도 간혹 자신이 드린 것을 몇 배로로 갚아주시려는 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래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사람이 계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진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계산할 수 없는 복을 주십니다.
     
찬송가의 왕이라고 불리는 아이작 와츠(I. Watts, 1674-1748, 영국)가 있습니다. 그는 키가 150센티미터에 불과하였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작았습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벌레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시를 씁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로 찬송가 143(통141)장의 가사입니다. 
     
아이작 와츠의 이 찬송 가사는 처음에 시비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벌레(worm)’라는 말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신을 벌레로 볼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그 가사를 “나 같이 보잘 것 없는”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또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찬송가 해설로 유명한 어니스트 에뮤리안(Ernest K. Emurian)은 이 가사를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우리가 벌레가 아닌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벌레만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비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작 와츠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가 순종하고 내가 노력한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세상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은 이삭에게 새로운 위기가 왔습니다.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인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밝음이 있으니 그 반대편에 어둠이 있습니다. 이삭이 받은 축복의 밝음이 작용이라면 그 반대쪽 반작용으로 어둠이 있었습니다.


II. 어둠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은 이삭에게 어떤 그림자가 생겼습니까? 그의 인생에 다가온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이었습니까?
     
14절 후반절입니다.
:14b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그랄에 잠시 머무른 이삭, 자기의 아내를 아내라고도 못한 주변머리 없는 이삭,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베풀어 주는 큰 인심을 받고 있는 이삭이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땅의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시기하다는 말은 ‘질투하다’, ‘부러워하다’는 뜻입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이삭이 큰 재산가가 된 것을 부러워하고 미워하였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매우 강렬한 시샘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지만 사람에게 시기를 받았습니다. 
     
1. 사람에게 시기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시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시기를 받는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십자가에 넘겨졌습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마태 27:18). 시기를 당한 것은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따르게 되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났습니다(행 5:17).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 것은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은 교회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크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활동이 보잘 것 없고, 교인들의 숫자도 아주 적다면 시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성장과 그 영향력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작은 실수도 엄청나게 확대해서 세상에 퍼뜨립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겠다고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한편으로는 담대하여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겸손하여야 합니다. 비판하고 시기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기를 받을 때 자신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이 있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 땅의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기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살로비(P. 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화이트(G.White) 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임 안에 다른 사람을 향하여 ‘흥! 꼴불견이야, 쳇!’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잠 14:30).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아무리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13)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싶은 우쭐한 마음이 들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야 합니다.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 땅의 사람들에게 받은 시기는 단지 미움을 받은 것 뿐이었습니까?
     
15절입니다.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이삭을 향한 그 땅 사람들의 시기는 곧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우물을 메워 아예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삭이 농사를 지어 백배의 소득을 얻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샘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샘을 아들 이삭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이 귀한 사막지역에서 샘을 가진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차지한 복입니다.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샘이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근원이 심각하게 오염을 당하였습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이삭이 농사를 잘 짓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흙으로 메워 망쳐놓았습니다. 
     
2. 사람에게 훼방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복의 근원을 오염시키려는 악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통로가 공격을 받고 오염되고 훼손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염되어버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복음이 오염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풍요가 곧 복음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풍요는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을 교회 자체를 위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의 열기는 점차 수그러들고 교인 수는 감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에서 교회를 질타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비난은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부흥을 다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다시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삭이 겪는 위기의 마지막은 결국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이 보잘 것 없을 때는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였던 아비멜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삭에게 ‘우리에게서 떠나가시오.’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사태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이삭은 재산이 크게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힘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더 이상 견제하고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축출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잠재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보호해 주다가는 자신들을 위협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3. 사람에게 배척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보호해주어야 할 약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호랑이를 키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보호해 주어야 할 만큼 허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는 인구의 적어도 20%가 믿는 다수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이 몇 분이며, 현직 국회의원 중에 기독교인들이 몇 %입니까?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종교가 되었기에 오히려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전은 역설적으로 교회의 세속화를 막아 줄 것입니다. 성도들은 풍요의 복을 누려야 하지만 교회는 풍요에 지배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영향력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생명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은 종교로 전락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생명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에게 배척으로 받음으로 더욱 교회다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데릭 레드몬드. 그는 영국의 육상선수입니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했지만, 경기 시작 10분 전, 연습을 하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출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5번의 수술과 피땀을 쏟는 힘겨운 재활훈련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바르셀로나의 6만 5000명 관중 앞에서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400m의 강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그런데 스타트하자마자 겨우 25m를 달리고 쓰러졌습니다. 이번에는 넓적다리 뒤쪽의 힘줄이 파열되었습니다. 그는 다리의 통증보다 깨어진 꿈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쏟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뚝거리며 트랙을 돕니다. 그때 관중석에서 황급히 레드몬드에게 달려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짐 레드몬드였습니다. 
“아들아!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아버지! 골인지점까지 가고 싶어요!”
“나와 함께 가자꾸나!”
     
아버지는 아들을 부축하여 골인지점으로 갔습니다. 아들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관중들, 그리고 이 생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정말로 산다는 것이 산 넘어 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성령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관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작용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생명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놀라운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시기와 훼방과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의 인물들에게서 배우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할 이유도 없지만 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풍요로움을 마다할 이유도 없지만 풍요로움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습니다. 위기를 불러들일 이유도 없지만 위기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갈망합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