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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전 9: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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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전 9:14-19)


이중표(李重表) 목사는 기독교장로회 출신 목회자로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이끄신 한국 교계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예수를 만나 영접하였습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에도 네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1973년 이후 7년마다 입원과 수 을 반복하던 그가 별세신앙을 주창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대신 자기 안에 예수께서 사시고 예수가 주인 되는 삶을 별세라고 말합니다. 또한 평생 복음전도 사역을 귀중히 여겼던 이 목사는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소천하기 전 담관암 수술을 통해 위기를 넘긴 이 목사는 거지(巨智)선언을 했습니다. 큰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별세는 큰 깨달음이니 자기를 비우고 거지로 살라’ 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은 물론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실천해 나가야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소천하기 직전 죽음을 예견한 듯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 책을 출판했습니다.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죽복 즉 죽음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자신을 위한 통장을 가져본 일이 없는 무욕의 삶을 살았으며 두 자녀를 입양하는 등 별세신앙을 실천적 운동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어떤 것이 위대한 것입니까?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을 이 땅에 펼쳐가는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는 오직 복음이 중심이었습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오직 복음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 따르기 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알고 주님만 따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절대적 명령인 까닭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의식입니다. 만약에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유익을 더 포기해야 합니다. 전도한 사람이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에 복종하는 모습이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되려면, 

첫째로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리스의 대부호 알치비아데스(Alcibiades)가 소크라테스 앞에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가 많음을 자랑하며 한바탕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조용히 세계지도를 펴놓으며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어느 정도인가 여기에 그림으로 표시하시오” 그러자 알치비아데스는 당황하며 “그런 농담은 마시오. 내 토지가 아무리 많기로서니 세계지도에 오를 리야 있겠소.” 그때 소크라테스는 점잖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토지가 지도에도 표시할 수 없다면 그까짓 토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토록 자랑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꽤 부자로 살았던 사람이 떠들썩하고 자랑스럽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좋은 집을 구하여 살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옷을 사 입으면 사람들이 부러워해주고 그것을 자랑할 수 있어서 살맛이 났는데 미국에서는 좋은 차를 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좋은 집을 짓고 살아도, 좋은 옷을 사 입어도 알아주지도 않고 자랑할 사람이 없어 도대체 살맛이 나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본래 출신 성분이 남다른 사람입니다. 경건한 가문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키며 성장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까지 유학을 와서 당시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게 된 후에도 자랑거리가 남다릅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직접 주님께 그 누구도 받아 본 일이 없는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복음 전한 자랑거리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잊어버렸습니다. 

바울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자기자랑을 삼가 했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의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은 결코 자기자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로 주장하지 아니하며

존 그레이(John Gray) 박사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Men are from Mars Women are from Venus)’ 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부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 즉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결혼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것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여자보고 “나를 이해하고 닮으라!” 하고, 여자도 남자보고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냐?” 라며 싸웁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의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랑이 없으면 권리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하물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은 권리보다 의무를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입장보다 다른 이의 입장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권리가 있지만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많은 수고를 했어도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회를 설립했지만 설립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최고 수준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지도자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주권행사를 하는 것이기에 강압적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활에 본을 보여 교우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권리를 주장할 마음을 가지면 리더십에 사리사욕이 개입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게 됩니다. 공동체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여 복음에 반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권리주장의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그 소리들이 충돌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도 살고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신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남다른 주의 종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비록 자신의 권리를 버렸어도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세워주신 모습이야말로 진정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의 모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억지로 아니하며

인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빈자(貧者)의 성녀’ 라는 별명이 붙은 마더 테레사(Madre Teresa)는 아침이면 자신의 베개 위에다 십자가를 내려놓으면서 예수께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좀 쉬십시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런 저런 무거운 짐을 항상 예수께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께 지우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주님께 지우지 않고 자신이 지는 성도가 성숙한 성도입니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사람보다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종이 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출애굽 당시 성막을 지을 때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져 온 물품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군대의 징집병으로 일하면 고달픕니다. 자원병으로 일해야 합니다. 징집된 군사로 일하면 억지로 하는 일이 됩니다. 항상 시간이 아깝고 물질도 아깝고 모든 일에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강한 병영이 되지 못하고 사단에게 패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징집된 자를 모아놓는 수용소가 아닙니다. 자원하여 몸을 드리는 잔치집이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은 것으로 드리고 싶어 남보다 앞장서고 자원하여 헌신하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이 바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능도 주셨고, 시간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고, 일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깨닫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하는 태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의 벨라 카롤리(Béla Károlyi) 체조코치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체조선수 300명을 길러 냈습니다.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길러낸 그는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마다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습니다. 첫째 개인적 평안을 포기하고 코치의 훈련 방향에 순종할 것, 둘째 생활의 우선순위에 체조를 1위에 둘 것, 마지막으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체조에 헌신할 것들입니다. 하물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 어찌 개인적인 평안을 포기하고 희생적 생활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순위를 언제나 복음 전파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성결하게 보존해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기 원하십니까? 세상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해 부디 자기 자랑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권리 주장도 삼가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에 바른 신앙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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