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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길에서 떠나라 (겔 33:10-16) - 회개를 위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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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길에서 떠나라(에스겔 33장10~16절)


구제역으로 인해 국가적 손실이 참으로 엄청납니다. 농부들이 정선을 다해 기르던 소와 돼지를 300만 마리 이상이나 살처분하여 땅에 파묻었습니다. 농민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관련 공무원들의 수고도 눈물겹습니다. 지금까지 과로로 7명의 공무원이 순직했습니다. 지난 설날 연휴에 우리 교회 앞에서 구제역 예방을 위해 소독약을 뿌리며 수고하는 전경들에게 햄버거와 피자를 전하며 위로했습니다. 

구제역(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이라는 말은 입과 발에 생기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구제역은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에 감염되는 질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 중상을 보면 입술, 혀, 잇몸, 코, 발굽 사이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상승하고 식욕이 저하되어 앓다가 죽는 질병입니다. 잠복기간은 2일에서 14일 정도로 매우 짧고, 전파력이 매우 빠릅니다. 직접 전파, 간접 전파, 특히 공기를 통해서 50km, 바다를 통해서는 250km까지 전파될 수 있다. 또한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합니다. 구제역은 경제적인 피해가 매우커서 A급 질병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불행 중에 다행인 것은 구제역은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무서운 전염병이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인류역사를 보면 구제역과 같은 전염병이 사람에게 걸린 경우가 있습니다. 1347년 10월 12척의 배가 흑해에서 이탈리아 제노아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 있는 선원들이 알 수 없는 괴질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노아 시장은 도시에 병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선원들의 상륙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제노아에 병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두에 묶어 놓은 밧줄을 타고 쥐들이 육지로 올라와 병을 옮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페스트(Pest, 黑死病)입니다. 

페스트는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전염병으로 오한, 고열, 두통, 현기증이 나며 피부가 흑색으로 변하고 발병 1주일 안에 60% 이상이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1347년부터 1950년까지 2500만에서 35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숫자는 유럽인구의 1/3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몽골의 킵차크 칸국 병사들이 카파 성(현재 러시아 남부의 페오도이야)을 공격할 때 병사들이 흑사병으로 죽어가자 성을 정복하기 위해 투석기로 성안으로 쏘아넘겨 카파성에 전염시켰는데, 이 성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이 흑해와 지중해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와 1347년 이탈리아 전역으로, 1338년에는 프랑스 전역으로, 1349년에는 영국 전역으로, 1350년에는 북유럽과 아이슬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때 줄어든 유럽의 인구가 회복되는데 500년이 걸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호열자(虎列刺)라는 콜레라(cholera)가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마마라고 불렀던 천연두가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천연두에 걸렸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여름에는 장질부사(腸窒扶斯)라고 했던 장티푸스(typhoid fever)가 유행했고 이런 것들을 모두 염병(染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염병은 구제역, 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조류독감, 신종플루(novel swine-origin influenza A-H1N1)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혼의 질병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은 두려워하면서 영적인 질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질병은 육신을 병들게 하지만 영혼의 질병은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병들게 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백신이 있는데 그것을 ‘회개(悔改)’라고 부릅니다. 회개만이 영혼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전쟁을 그치게도 하고, 역사를 되돌리기도 한 것처럼 영적인 질병은 개인을 파괴하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쇠퇴하게 하고,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로마가 무너진 것은 군사력이 쇠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이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많은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멸망할 때 그 원인이 전쟁에서 패한 것보다는 내부의 분열과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멸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작금 한국기독교의 위기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그 원인이 내부에 있음을 말하면서 고치려는 사람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개혁의 모델이 되자고 다짐한 우리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으로는 회개운동을 펼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로는 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검사가 범죄자의 조서를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의해 기술하는 것처럼 명확해야 합니다. 영적 질병의 전염성은 구제역이나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전염성을 가졌기 때문에 함께 예방하고 함께 처방하지 않으면 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함께 아파하며 회개할 때 영적 질병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습니다. 

1. 허물과 죄가 우리 안에 있다. 

사람들이 흔히 ‘세상이 말세’라고 말합니다. 그 말세는 노아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동일합니다. 죄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심화되기는 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말세는 동일합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1~12)

그 때에 온 땅이 부패했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몽땅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 구원받은 사람이 노아요, 노아로 인해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 8명이 살아났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원형입니다. 세상이 다 부패하고 말세가 되었다 해도 교회가 있으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는 많은데 노아가 보이질 않습니다. 

노아는 어떤 인물일까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깐깐한 시아버지 모시고 사는 것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까다로운 사장님을 모시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조그만 허물도 금방 눈에 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쉽게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세상의 허물과 죄가 아니라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겔 33:1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두 번째 침공했던 B.C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왕족, 귀족, 제사장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었던 에스겔은 그 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지 5년이 되던 해인 B.C. 593년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동족들에게 22년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상을 원망하고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이 포로가 되어 고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조상 탓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조상 탓만 하는 유다백성들에게 ‘아니다 허물과 죄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깨우쳐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의 허물과 죄가 다른 교회에 있고, 정치목사, 삯꾼 목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우리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형제가 하나인 것처럼 모든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들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요, 그들의 허물이 우리의 허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허물과 죄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죄는 분열의 죄입니다. 한국교회는 사분오열되었습니다. 아니 사분오열 정도가 아니라 40분 50열 되었습니다. 장로교 간판을 단 교단이 100개가 된다는 말도 있고, 200개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 2개였는데 작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전국기독교총연합회(전기총)으로 3개가 되었습니다. 

NCCK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한기총은 보수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 언제나 다른 소리를 냅니다. 그러니 정부는 어느 소리가 기독교의 소리인지 헷갈려서 나중에는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천주교와 불교는 늘 한 목소리를 내니까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얻었습니다. 형제가 다투면 머슴도 무시하는 법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사회로부터 경시당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분열은 개교회주의를 낳았습니다. 교회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니까 ‘내교회만 잘하면 그만이다.’하고 좋은 목사님들일수록 다 자기 교회 일만 합니다. 그러니까 교계는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교회는 각자 살아가게 되니까 표준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이상한 교회, 이상한 기독교가 되는 어려움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개교회주의는 성장지상주의를 낳았습니다.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고 중앙에 이름을 단번에 날릴 수 있는 길은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목숨을 걸게 되었습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는 온갖 편법을 만들어 냈고, 성도들을 우민화하고, 심지어 교인들을 착취하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열, 개교회주의, 성장지상주의가 바로 우리 안에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허물과 죄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2. 하나님은 회개를 기다리신다.

회개는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삶이 바뀔 수 없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영어로 ‘repentance’로 ‘가던 길을 돌아선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죄에 대한 확신 즉,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달아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자신을 확인하고 죄로부터 결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은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요,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와 사귀던 심령을 철두철미하게 부수는 것이며,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죄와 맺었던 관계를 단절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경향과 삶의 풍조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이전에 육신의 행복을 위해 취했던 모든 것을 전격적으로 폐기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깨달음, 의지, 결단, 슬픔, 소망, 사랑, 기쁨, 생각, 말, 인간관계 모두가 새로워집니다. 회개한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어울렸던 죄를 이제는 밉살스럽고 가증하게 여기며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도망치듯 죄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던 그리스도를 유일한 소망과 피난처로 삼게 됩니다. 날마다 밥을 먹듯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게 됩니다. 회개는 삶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고 영혼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완악한 마음은 회개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죽고 나서 장례식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통곡하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어렵다고 살아 있을 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애통해합니까?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돌아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삼호주얼리호의 석해균 선장을 쏜 소말리아 해적 아라이가 사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살려주는 조건은 원상회복이거나, 배상을 하거나, 동일동형동량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 33:11)

우리가 함께 회개할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진심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전에는 한국 교회에 교단은 있었지만 교단간에 협정을 맺어 선교구역을 나누고 신사적으로 선교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과정에서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과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감옥에 간 목사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1937년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들은 폐교를 당했습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이에 반대한 주기철, 손양원 목사 같은 사람들은 감옥에 가서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약 2,000명이 투옥되었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주기철, 최권능 목사를 비롯해 50여 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신사참배한 사람들에게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느냐?’ 하면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의 숫자가 많으니까 사죄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 일로 교단이 갈라진 것입니다. 그 이후 이러저러한 이유로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여 100개의 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도 한국교회 전체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사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덮고 가면 안 됩니다. 죄는 구제역보다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전염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이 시간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합시다.

하나님! 1938년 9월 9일 27차 장로회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7년간 전 기독교인이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감옥에 가서 고문당하고 순교당한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으리라 다짐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명한 회개가 없이는 우리 안에 분열과 개인주의와 성장지상주의의 수많은 문제들이 계속 따라다니며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의 꼬리표를 잘라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음란, 탐욕, 불순종, 황금만능주의, 위선, 자연파괴 등등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합시다. 

탕자는 아버지께 지은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범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1)

오래 참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분명히 죄를 고백하고 자신과 교회를 살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누구든지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교회의 위기의 원인은 값싼 복음을 전한 것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 다음에 무슨 죄를 지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가르친 싸구려 복음이 문제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과거에 영지주의자들이 전했던 잘못된 복음입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서기 2세기 이후에 나타난 기독교 이단적 종교사상입니다. 영지주의는 요한 1서와 목회서신에도 경계하고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이야말로 인간의 기원이자 운명이며 그것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 영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영이 구원받은 후에 육신이 행한 일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날 한국 기독교가 이런 식으로 교인들에게 거짓 평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도 범죄하는 날에는 회개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말씀이 믿음의 공동체인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 말씀은 교회 밖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로 의인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비록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이나, 내부의 부패나, 분열의 위기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온 공동체가 무릎을 꿇기만 한다면 위기가 변하여 복이 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다음, 과거의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과거의 의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 죄인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면 어떤 죄인도 용서하신다는 말씀이요, 동시에 지금 불순종하면 과거의 모든 순종도 무효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하고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과 같이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겔 33:12-16절)

한국사회의 병폐는 한국교회의 상처가 터져서 고름이 나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역도 기실은 인간이 소와 돼지를 밀집된 공간에서 사육하기 때문에 자가면역력이 떨어져서 생기는 질병이 아닙니까? 인간의 탐욕, 탐심이 빚어낸 결과물인 것입니다. 산을 자유롭게 다니는 멧돼지는 구제역에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돌아오면 집안에 있는 누룩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우리들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죄, 우리 교회에 들어와 있는 죄, 한국교회에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죄를 찾아내 회개해야 합니다. 

13절에 ‘스스로 의롭게 믿는 죄를 버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선민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버릴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선민의식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 신자, 천주교 신자보다 나은 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 저는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든 “울지마 톤즈”를 보고 울었습니다. 우리가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얼마 전 불교 중흥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불교 내부 개혁을 위한 다섯 가지 운동을 발표했습니다.

1. 불교 본연의 모습을 확립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세워나가는 ‘수행불사’

2. 민족문화를 바로 인식하고 스스로 보호해 나가는 ‘문화결사’

3. 생명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고 환경을 보존하는 ‘생명결사’ 

4. 사찰이 이웃과 사회와 함께 나누는 터전이 되도록 하는 ‘나눔결사’

5. 종교간 평화와 남북 및 세계 평화를 위한 ‘평화결사’ 

또 불교계 전반이 외형적 불사위주의 사업에 치우쳐 가장 중요한 교육 사업이 소외되었고, 한국 사회변화의 주도자로서 참여한 경험이 이웃 종교나 사회 여러 단체에 비해 매우 적었다고 반성하면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불교가 깨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한국교회는 자리다툼, 이권다툼으로 분열하고 대형 교회들은 세습하고, 유명한 목사들의 성적 타락 소식이 들리고, 총회장선거를 위해 10억 원씩 쓴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등 도저히 예수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일련의 이런 사태들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지체로서 아픔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죄성, 독성, 악성이 우리에게 이미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주님! 나를 치료해 주옵소서. 

주님! 우리 목사를 치료해 주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를 치료해 주옵소서. 

주님! 한국 교회를 치료해 주옵소서.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죽고, 우리 교회가 죽고, 한국교회가 죽습니다. 한국교회가 죽으면 우리 나라가 죽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회개가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nent)’가 될 것입니다. ‘스푸트니크 모멘트’라는 말은 1957년 소련이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처음 우주로 쏘아 올리자 충격을 받은 미국이 10년 동안 교육과 우주개발 분야에 예산을 집중한 결과 소련을 앞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회개가 한국교회 회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16절에 회개하는 자에게 본래 범한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셔서 반드시 살려주신다는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당신은 지금 현재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현재 아무것도 회개할 것이 없다고 믿습니까? 있다면 회개할 바를 하나님 앞에 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의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한국교회의 무너진 곳을 막아서서 중보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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