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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롬 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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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롬 8:18-30)


오늘 본문 첫 절 바로 앞의 16-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을 장차 영광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로 말하면서도 그 고난과 영광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는 일임을 또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비해 지금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은 잠간이지만 장차의 영광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 바울은 고후4:17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압니다. 

고후6:4-5에서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말했으며, 고후11:23-28에서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런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후4:18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재의 고난만 주목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주목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고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을 언급한 바울은 그 고난이 모든 피조물 또한 함께 겪는 고난임을 말합니다. 먼저 19-20절을 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진행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피조물 전체도 그것을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피조세계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본래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서 지으신 존재입니다. 피조물이 인간에게 행복과 유익이 되지 못하면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그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허무함에 굴복한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3:17-18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이렇게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허무함과 부패함에 굴복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그 희생이 된 피조물은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지만 허무함과 부패함에 굴복한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누리게 될 그날 허무함과 부패함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1-22절을 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온 피조물의 보편적 고통과 탄식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남으로 인한 해방과 자유에 대한 고대를 말한 바울은 다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에로 돌아옵니다. 피조물들도 고통과 탄식 속에서도 해방과 자유를 고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입은 우리가 소망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23-25절을 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도록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한 말은 “장래를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주시는 성령”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그 삶의 열매로서의 우리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성령께서 처음으로, 즉 미리 앞당겨서 맛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속으로는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의 양자가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특징은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소망 가운데 그 구원의 완성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누릴 영광을 소망과 인내 가운데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지금 이 세상에서 미리 확실하게 맛보게 해주시는 보증으로서 오신 성령을 언급한 바울은 그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지를 또한 설명합니다. 본문 26-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이란 기도에 관한 이해의 결핍을 말합니다. 즉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결핍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확신이 무너질 때,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가 온전한 기도를 드리지 못할 때 성령께서 우리 대신 중보의 기도를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 할 줄 몰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께서 대신 다 해주신다니 이 얼마나 고맙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이 놀라운 은혜 즉 고난과 탄식 가운데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 고마움과 안도와 위로와 격려와 감사를 표현하는 유명한 말이 본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들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탄식마저도 우리에게 선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이 스스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으로 하여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과 소망과 영광의 주권자이십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과 소망과 영광을 이루어가시는지를 요약 설명함으로써 오늘의 본문을 마칩니다. 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는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예지예정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지예정”이란 그 말 그대로 미리 아셨기에 미리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로 택하신 것은 그들 각자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할지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잘 믿고 바르게 행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미리 아셨기에 그들을 구원에로 예정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선택이 자의적이고 전횡적이라는 오해나 비판을 피하기 위한 설명이긴 하지만 이런 “예지예정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직 우리가 구원받을 사람임을 먼저 아신 것밖에 없고 구원은 결국 우리 각자의 손에 달린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잘 믿어서 되는 일이고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신 것뿐이라며 따라서 구원의 결정적 열쇠는 우리 각자가 쥐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지예정설이라는 잘못된 해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29절을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작정하신 사람들이란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니 그 각 사람이 믿기 전에 당연히 하나님은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을 다시 또 구원에로 예정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작정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실 자들로 예정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에로 작정하신 목적과 그 구원이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의 하나로서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고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택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잃어버리고 허무함과 부패와 죽음의 공포 아래 살던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실 자로 택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따라 성령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그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성결한 존재로 변화시켜 가셔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서술한 것입니다. 

본문 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멘!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아는 우리들이라면 현재의 고난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당연히 고난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중하고 영원한 영광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믿기 때문에 소망과 인내로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 안에서 현재의 모든 고난을 이기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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