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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는 믿음, 보는 믿음 (요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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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믿음, 보는 믿음 (요 4:43-54)
  

예수님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 그래서 요2:23에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한다. 오늘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다시 되돌아 오셨다. 갈릴리 가나에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고 예수에 대한 하신 일을 들었다. 

요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는 분명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셨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사람이 가나에 머무시는 주님에게 찾아왔다. 그 이유는 자기 아들의 죽게 된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서민들에게는 보는 것이 믿음의 지름길이다. 갈릴리 가나에 있는 사람, 그리고 아들의 치유를 갈망하는 왕의 신하, 유대에서 만났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 그들이 다 여기에 해당된다. “너희는” 이란 말 속에는 우리들도 해당되고 수원 땅의 시민들도 해당된다. 눈으로 보아야 믿는다.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주님은 표적을 행하신다.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예수님만 표적을 행하시는 이가 아니고 하나님도, 성령님도 표적과 기사로 증언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 볼 수 있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를 보라.
  
1. 주님의 표적을 갈망해야 한다. (요4:49)

왕의 신하는 갈릴리 가나까지 달려왔다. 가나와 가버나움은 30Km로 보통 하룻길이다. 그 열심, 그 간절함, 그 끈기의 이유가 무엇인가? 

요4:49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에 대해 고치시는 표적을 갈망한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도 짧은 다리가 길어지고 상한 이가 회복되고 천상에서 내리는 보석들이 내리는 등 보이는 기름부음이 이 마지막 시대에 내리고 있다. 듣고 믿는 시대에서 보다 강력하게 보고도 믿을 수 있는 시대로 향해 나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 안에 불고 있는 권능의 바람, 제3의 바람의 시대를 알고 왕의 신하처럼 치유의 기적을 구하라. 이상하게도 교회만 갈수록 보는 표적을 부인하고 보고서 믿는 것을 점점 폄하하려 한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기적을 비웃고 냉소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예수님의 목회는 보여주기 목회였다. 가는 곳마다 각색 병을 고치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5천명을 먹이시고 광풍을 진압시키셨다. 어디서나 창조적 기적이 뒤따랐다. 본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 아니다. 보여줘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다. 

눅10:24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라고 하였다.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마13:15)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신앙의 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이다. 그래서 눅10:23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보는 것은 교회가 붙들어야 할 능력의 한 부분이다. 이제 깨어야 한다. 표적과 기사를 갈망하라. 
  

2.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요4:50)

아들의 병을 고치려 가버나움에서부터 가나까지 내려온 왕의 신하는 다시 가나로 내려간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던 아이의 아버지는 혼자서 되돌아간다. 하룻밤을 지내며 되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가기 전 음성을 들었다. 주님의 권세 있는 음성의 선포를 들었다. 

요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거의 죽게 된 아들이 살아 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간다. 

요4:50下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하였다.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즉 고쳐졌는지 아직도 아파서 누워 있는지 그것은 잘 모른다. 가서 보아야 알게 될 일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것만은 분명한 음성이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음성을 듣고 그 다음 행동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으로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님은 나의 모든 일들을 아시고 말씀해 주신다. 그러나 내 내면이 문제다. 

① 더럽고 추하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망보다는 의심, 거짓, 선입견, 욕망, 미움, 질투, 이기심 등으로 쌓여 있기에 음성이 들리지 않고 또 혼란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 안테나에 녹이 제거되어야 하듯 마음의 때가 벗겨져야 한다. 

② 세상의 것에 너무 분주하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우리는 얼마나 분주하게 사는지 6일 동안의 일이 주일의 안식까지 침범한다. 시간의 지성소를 세우는 안식의 삶마저 없다. 언제 그 음성이 들리겠는가? 안식의 삶이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이 삶이 6일 동안의 공간 확장의 삶을 다스려야 한다. 이 땅에 무엇을 세우려는 업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 품에서 찾는 쉼과 안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  

③ 한 가지 더 말하라면 기도다. 기도하지 않으므로 음성을 듣지 못한다.

김하중 장로님은 하나님의 대사 1권을 써서 25만권이 팔렸다. 그 내용을 보면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포하는대로 하나님의 응답을 보게 되는 이야기다. 금년에 또 다시 하나님의 대사 제2권을 출간하였다. 규장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우리 교회에 강사로 오셨다고 출판 선물로 책을 보내주셨다. 2권 역시 같은 맥락의 내용인데 참으로 감동이 된다. 그 분은 주중대사 시절 나랏일을 하는 것에 관해 모두 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한, 중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 남북 통일 문제를 처리하였다. 한국 고위직에 있는 문제, 대통령을 모시는 문제, 6자 회담 문제, 탈북자 처리 문제 등을 처리하는데 음성을 들은대로 되어진다. 김하중 대사는 일을 처리하기 전 기도하고 기도로 물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그대로 되어진다. 그래서 직원들이 놀라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 사람들이 주님의 역사를 보고 믿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6년 5개월의 최장수 대사가 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음성 듣기를 실천하자. 실수할 때가 많지만 주의 음성을 들으려 하라. 듣게 되면 보게 된다. 

마13:16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주의 음성을 들으라.
  

3.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라. (요4:51)

왕의 신하는 가나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아들이 살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요4:50下을 보면 그 말씀을 믿었다.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기록한다. 요4:51을 보면 “내려가는 길에서”라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대로 왕의 신하는 혼자 간다. 그러나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믿고 말씀과 함께 가버나움에 아들이 누워 있는 집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그 내려가는 왕의 신하는 허무함과 실망감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가더니” 즉 말씀을 믿고 간다. 결국 내려가는 길에서 자신의 종들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요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그 치료의 시간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어제 일곱 시였다. 

정말 표적과 기사를 보려면 순종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표적을 보려면 끝까지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순종을 하다가도 어느 시점부터 순종을 하지 않는다. 왕의 신하는 어떤 면에서 우리와 달랐다. 왕의 신하는 들은 말씀을 믿었다. 왕의 신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손으로 만지지도 못했어도 말씀을 믿고 한 밤중을 보냈다. 이 왕의 신하는 보지 않고도 믿었다. 들은 것만으로 믿었다. 어찌하든지 왕의 신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표적을 보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다.(요4:53) 아버지만이 아니다. 모든 집안 식구가 예수의 표적 행하심을 알고 믿고 보게 된 것이다. 

신앙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듣는 믿음과 보는 믿음이 함께 움직인다. 보지 않고도 믿는, 듣기만 해도 믿는 세계가 신앙 세계이다. 그러나 보여 주면 믿는, 눈으로 보여 주면 새 사람이 되는 세계가 신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나는 듣기만 해도 믿는다.’ 와 ‘보아야 믿는다.’는 것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 들려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요, 보여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다. 어떤 것이 더 무식하고 유식한 신앙이 아니고 서로 보완하고 돕는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은혜요 은총인 것이다. 

그래서 마13:16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은 분명한 것을 가르쳐 준다. 주님이 여기와 저기, 분명 서로 떨어진 두 장소에 동시적으로 역사하는 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30Km 떨어진 거리를 초월하여 치료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본다면 주님을 더 잘 따를 것이다. 

우리는 듣기만 하는 믿음이 고상하다고 더 복되다는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욥의 고백을 보자. 듣는 믿음에서 보는 믿음으로 나가고 있다. 욥42:5~6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보이는 믿음, 보여지는 표적과 기사의 나타남을 거부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거리가 멀고 다른 장소에 머물러 있어도 시간과 장소, 내용을 일치시키는 일을 주님은 오늘날에도 하신다. 듣는 믿음, 보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라. 그래서 믿음이 더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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