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심고 물을 주자 (사 44:14-15, 고전 3:6-8)

첨부 1


심고 물을 주자 (사 44:14-15, 고전 3:6-8)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의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100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정원에서 땅을 파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이 물었습니다. “뭐 하세요?” 노인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망고 나무를 심고 있지”. “열매를 따 드시려고요?” “아니야, 내가 그 때까지 살 수야 없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살아있을 거 아닌가. 난 일생동안 다른 사람이 심어놓은 망고를 충분히 먹었네. 이제는 내가 그 고마움을 베풀어야지”. 다음 세대를 위하여 나무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나무를 사람은 누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손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이나 당대를 위하여 심는 것이 아닙니다. 
  
넬슨 핸더슨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그 그늘에 앉지도 못할 나무를 심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 어둡고 미개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심은 나무의 열매를 지금 우리가 따먹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무를 심어 우리의 후손들이 그 열매를 따먹게 해야 합니다. 
  
자연주의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나무는 절대 억지로 자라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이 최근 기근으로 고생하는 까닭은 곡식을 많이 거두기 위하여 너무 많은 화학비료를 쓰고 땅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닭이 병드는 것은 달걀을 많이 낳게 하려고 밤에도 불을 밝혀놓고 닭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에게 걸리는 광우병이나 구제역도 그렇습니다. 소가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풀을 먹는 소에게 뼈를 갈아 먹이고 먹기 싫은 것들을 마구 먹이니 소가 미쳐서 광우병이 생긴 것입니다. 소를 푸른 들에 방목하여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양간에 가두어놓고 그냥 젖을 짜니까 소에게 면역이 없어 구제역이 잘 걸린다고 합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대로 두면 모두가 건강할 텐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농사는 정직한 것입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심는 데로 거둔다는 것은 농사의 이치입니다. 이런 자연주의적인 마음을 '농심'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이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라고 불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극상품의 포도를 심었습니다. 좋은 포도가 열릴 것을 기대하여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열매가 맺혔을 때에 보니 들 포도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된 일이냐?"라고 한탄합니다. 
  
좋은 포도를 심었는데 왜 들 포도가 되었습니까? 누군가가 바꿔치기했습니다. 왜 심는 대로 거두지 못합니까? 좋은 씨를 심었는데 원수가 와서 밭에 가라지를 심었습니다. 하나님은 수확할 때에 먼저 가라지를 불사르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을 스스로 어기거나 바꾸지 않으십니다. 
  
중국에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지구상 가장 특이한 식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대나무를 심고 5년이 지나도 어린 싹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을 주고 가꾸어도 고작 3센티 정도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면 그때부터 엄청나게 빨리 자랍니다. 그 후에는 90일 만에 약 27미터가 자란다고 합니다. 심고 자랄 때가지 기다리고 물을 주면 반드시 자랍니다. 
  
격언에 ‘다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도 물을 받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을 주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습니다.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 그 나무가 주는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는 하나님의 밭에 사람을 심고 물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밭이요 주는 씨를 뿌리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세상 밭에 심고, 물을 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물을 준 대로 자라게 하십니다. 심지도 않고 물을 주지 않는 데 자라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고린도교회에 가보면 교회 입구 벽에 고린도교회의 목회자의 이름을 새겨놓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는 제1대 목회자가 바울이고, 2대 목회자가 실라이고, 3대 목회자가 아볼로이고, 4대 목회자가 쏘스데네입니다. 고린도전도 16장에 보시면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가라고 했지만 아볼로는 당장은 못가지만 다음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가보면 그 약속을 지켜 그 후에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섬긴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정말 열심이 심고 물을 주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심고 물을 주어야 합니다. 

6절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밭이 풍성하기 위해서는 인간 편의 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 편의 일이 없이는 하나님의 권능도, 은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의 노력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심지도 않고, 물주지도 않고 열매를 기대한다면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심지도, 물 주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자라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고 물을 주면 반드시 자라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바울은 ‘심었고’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심었다는 말은 ‘에퓌튜사’라는 말입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포티센’인데 ‘심었고’와 ‘물을 주었으되’라는 말은 부정과거형입니다.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은 ‘육사넨’이란 말인데 미완료과거형입니다. 이 말은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영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고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항상 자라게 하십니다.  
  
모내기는 우리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농사일입니다. 모를 심기 위해 물 있는 못자리에 볍씨를 뿌립니다. 일정기간 동안 볍씨를 생육한 다음에 논에 옮겨 심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이양법’이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15세기 전부터 이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볍씨를 뿌리고 자란 다음에 모내기 하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를 심을 때는 심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심을 때가 있습니다. 벼 뿐만 아니라 모든 농사가 심고 뿌리는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농경민족으로 주산업이 농업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가장 바쁜 시기는 춘분에서 추분 사이입니다. 이 기간을 농절(農節)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에는 국가적으로 농사일에 방해되는 소송이나 제도의 시행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파종, 제초, 이앙 등 중요한 작업을 24절기에 따라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양력보다 음력이 더 중요하다고도 합니다. 
  
24절기의 입춘은 봄이 오는 시점이라고 하는데 농기구를 점검하는 날입니다. 우수는 봄보리를 파종하는 날입니다. 경칩은 콩, 들깨, 수수, 담배를 파종하는 날입니다. 춘분은 조, 메밀, 목화를 파종합니다. 청명은 올벼를 파종합니다. 곡우는 율무와 참깨를 파종합니다. 입하는 중생벼를 파종합니다. 소만은 올벼를 모내기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망종은 중생벼를 모내기합니다. 하지는 보리를 수확하는 날입니다. 소서는 김매기하는 날입니다. 대서는 메밀을 심는 날입니다. 입추는 배추와 무씨를 파종하는 날입니다. 처서는 올벼와 참께를 수확하는 날입니다. 백로는 잠깐 휴식을 취합니다. 추분은 다시 가을보리를 파종합니다. 한로는 꼴풀베기를 합니다. 상강은 들깨를 수확합니다. 입동은 메주를 디딤합니다. 소설은 숯을 만듭니다. 대설은 빗줄, 도롱이를 만듭니다. 동지는 멍석 짜기를 합니다. 소한은 멍석과 이엉짜기를 합니다. 대한은 농기구를 보수합니다. 
  
고유의 24절기는 봄이 온다, 밤낮의 길이가 같다 혹은 길다가 문제가 아니라 곡식을 파종하고, 거두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런 중요한 농사의 때를 놓쳐 실기하면 농사는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를 잃으면 그 자체가 욕입니다. 한자에서 욕(辱)자는 농사짓는 사람이 늦잠을 자서 별을(辰) 보지 못할 때 받는 벌(寸)을 의미합니다. 농작물을 심고 물을 주면 수고한 대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심고 물을 주는 것을 ‘농심’(農心)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심을 때에 심고, 물을 줄 때에 물을 주는 것은 농사의 기본이며 농사 짖는 자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수고는 수고대로 하지만 열매를 거두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심은 것이나 아볼로가 물을 준 것은 사람이 하나님  밭의 농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밭의 농사란 교회에 사람을 심는 일입니다. 심어진 사람에게 물을 주는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 밭의 농사도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심을 때입니다. 심어짐 사람에게 물을 줄 때입니다. 
  
옛말에 “일 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평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생 계획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심는 것의 가치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어느 지혜로운 임금이 당대의 대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글을 책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수십 년에 걸려 열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임금은 나이가 들어 열권의 책을 다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에게 다시 열권의 책에 있는 말을 요약하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모여 다시 여러 해 동안 작업한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이미 죽을 때가 가까워서 다시 학자들에게 한 줄로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다시 모여 여러 날 동안 연구한 끝에 한 줄로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글은 ‘폐하여, 거저 먹는 점심식사는 없습니다’라는 짧은 말이었습니다.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밭에 많이 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래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7절에는 “그런즉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다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야 열매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야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심어도 물이 없고, 공을 들여도 홍수가 나고, 풍년을 기대하기 직전에 태풍이 불고, 뜨거워야 할 여름에 냉해가 오면 아무리 열심히 심고 물을 주어도 수확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난데없이 닥치는 자연재해를 바라보면서 인간의 노력의 한계를 체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지만 사람이 마음으로 수용하므로 기적이 됩니다. 광야에서의 만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사람이 거두므로 매일 아침 기적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인간의 의지가 만나야 치유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사람은 절대로 낫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느 것도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입니다. 우리는 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한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은 영속적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계속 자라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이나, 복음을 성장케 한 아볼로는 다 훌륭합니다. 이들이 없이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심고 물을 주지 않았으면 하나님도 하실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고 물을 주어도 하나님이 없이는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줄 때까지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다.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은 그 때부터 바빠지십니다. 그 때부터 우리가 심고 물 준 것을 자라게 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절대적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사역은 절대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심고 물을 주면 자라게 하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책임지고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자라게 하십니까? 에베소서 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밭에 사람을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사람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밭이 풍성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밭에 심고 물을 주면 반드시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사람을 데리고 오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라게 하십니다. 내가 데리고 왔지만 나보다 더 믿음이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에 심고 물을 준 사람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물을 주기만 하면 하나님은 크게 하십니다. 왜 우리가 심고 물을 주는데 게을리 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회에 데리고 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크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텐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버섯은 6시간만에 다 자란다고 합니다. 호박은 6개월 만에 다 자란다고 합니다. 참나무는 6년이 걸려야 다 자란다고 합니다. 심는 데는 잠깐이지만, 물을 주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이 자라기 위하여 6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아니, 그 이상도 걸릴지 모릅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나님은 다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끈기와 오래 참으심은 우리가 심고 물을 준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힘입니다. 
  
영국 과학자 헉슬리는 영국 어느 곳이라도 땅 속 깊은 곳에 수 천개의 열대식물 씨앗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씨앗은 영국의 기후가 열대 기후로 변한다면 즉시 자라나서 새싹이 돋고 잎으로 무성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지금도 옛 무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어떤 무덤을 열었을 때 4천년동안 잠자던 밀을 발견하였습니다. 학자들이 그 밀을 땅에 심었더니 자라서 곡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4천년 만에 싹을 티우기도 하십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2천년동안 심고 물을 주어 이제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라게 하심을 기대하며 심고 물을 줍시다. 
  
골로새서 2:19에는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라게 하십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아무리 힘들어도 자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밭에 사람을 심읍시다. 심겨진 곳에 물을 줍시다. 밭이 풍성하도록 많이 뿌리고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은 친히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논두렁에도 콩을 심고, 조그마한 텃밭에도 호박도 심어 빈자리가 없게 알뜰하게 심습니다. 이런 농부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의 밭에 빈자리가 없게 심고 물을 줍시다. 그 때 하나님은 비로소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어느 날 달리던 69번 버스가 뒤집혀 타고 있던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탄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억울할까요? 첫째는 결혼식이 내일인 총각, 둘째는 졸다가 한 정거장 더 오는 바람에 죽은 사람, 셋째는 버스 출발하는데도 억지로 달려와 문 두드려 열고 탔던 사람, 넷째는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잘 못 보고 탄 사람 중의 누구일까요? 정답은 가장 억울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 지옥에 간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장 억울한 사람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가장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심지 않고 물을 주지 않은 그리스도인,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사람이 죽어가면서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억울한 그 사람이 지옥에 가서라도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밭에 많은 사람을 심고 물을 주어 자라게 합시다. 심지 않아, 물을 주지 않아 억울한 사람이 없게 부지런히 심고 물을 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라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