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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대로 행하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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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대로 행하십시오 (고린도전서 7장 16-24절)


<가정의식의 중요성>

 요새 두 딸과 결혼문제로 얘기할 때마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외모를 보고 결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때 대화 코드에 외모, 국적, 인종, 재산, 학력, 심지어는 능력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보지 말고 대신 신실한 믿음과 의리, 책임감, 나눔과 선교 비전 등을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보라는 코드를 심어놓습니다.

 또한 요새 사람들은 자녀의 결혼문제와 관련해 “상대 집안도 보라!”고 많이 하지만 저는 “상대 교회도 보라!”고 합니다. 즉 사윗감이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를 상당히 중시합니다. 이단 교회, 싸우는 교회, 무속주의와 기복주의와 외형주의 등으로 소문난 교회, 목회자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교회에 다닌다면 사윗감으로 적극 말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다른 것은 다 이해되지만 싸우는 교회에 다니는 청년은 자기 잘못도 없고 교회리더들이 싸우는 것인데 왜 말립니까?” 물론 청년 잘못은 없어도 교회 싸움을 보고 자란 청년들은 교회관과 교회상이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나중에 폭력을 쉽게 휘두르듯이 교회싸움을 보고 자란 청년들은 나중에 교회싸움을 벌이기 쉽고 그런 삶의 틀로 인해 가정싸움도 쉽게 벌일 가능성이 아무래도 많기에 말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은 대화중에 딸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아빠는 대형교회를 설렁설렁 다니는 청년은 결혼대상으로 가급적 말리고 싶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약간은 진심이 담긴 말입니다. 물론 두 딸의 선택을 거의 존중하겠지만 대형교회를 설렁설렁 다니는 청년은 대개 ‘내 교회 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와 ‘내 교회’는 다릅니다. 내 교회 의식이 없으면 교회의 신실한 성도로서 신실하고 애틋한 헌신도 하기 힘듭니다. 혹시 헌신해도 ‘무대 위의 헌신’은 즐기지만 ‘소리 없는 헌신’은 대개 부족한 편입니다.

 교회에 가정의식이 없으면 아론의 종교가 되고 심지어는 ‘다산과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는 바알리즘의 모습이 스며들면서 점차 기복적인 교회가 됩니다. 또한 담임목사와 찬란한 꿈과 비전도 나눌 수 없고 심지어는 말을 섞을 기회조차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구역이나 셀 시스템으로 가정의식과 내 교회의식을 심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편법입니다. 재정권과 인사권이 없는 소그룹 모임의 구성원은 비전의 객체이지 비전의 주체가 될 수 없고 객체의 모임에서는 교회개념 대신 교제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한때 성행했던 제자훈련 프로그램도 ‘참된 제자를 키우는 목적’보다는 ‘교회성장을 위한 목적’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때 제자훈련으로 큰 교회를 이룬 B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왜 우리교회는 이렇게 제자훈련을 잘하는데 교인이 만 명에서 십여 년째 정체되어 몇 만 명 교회가 안 될까?” 예수님은 12제자를 남기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 개념’과 ‘초대형 교회 개념’은 본질적으로 모순인데 ‘제자훈련’이란 타이틀을 내세워 초대형 교회를 만들지 못해 염려하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제자양성의 도구’가 아닌 ‘교회성장의 도구’가 되면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제자’라는 말 자체가 이미 ‘소수의 제자’란 뜻을 내포한 개념이기에 만약 그 프로그램이 기대한 대로 교회가 성장하면 ‘다수의 대형교회’와 ‘소수의 제자’라는 개념상의 모순이 생깁니다. 어떤 주장이든지 그 주장에 내적인 모순이 생기면 결코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국 제자훈련의 성행으로 잠시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듯 하다가 본질적인 모순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한국교회의 성장이 역풍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초대형화는 교회의 본질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커지면 그 다음에는 더 커지려고 애쓰지 말고 더 나누려고 애써서 교회에서 가정의식이 상실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서로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커지거나 담임목사와 전혀 말을 섞지 못할 정도로 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르신 세대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3대가 함께 어우러져 삶을 나누고 기도하고 격려하는 큰 가정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너무 커서 여러 학년 및 연령그룹으로 나뉘어 예배하고 교제하니까 몇 년이 지나도 위아래 연령층의 교인들을 거의 모릅니다. 요새 세대단절이 큰 사회문제인데 교회에서조차 세대단절이 있다면 어떻게 건강한 내 교회의식과 가정의식이 생기겠습니까? 교회에서 가정의식이 없으면 교회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생기기 힘들고 교회와 함께 찬란한 꿈과 비전을 공유하겠다는 마음도 생기기 힘듭니다. 또한 아래로는 유아를 섬겨주고 위로는 어르신들을 섬겨주는 삶이 없으니까 사랑과 섬김도 약해지고 효심과 충성심도 약해집니다.

 가정이 어려워지면 가정의식이 있는 자녀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어떻게 하면 부모를 도와 가정을 일으킬까를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정의식이 없으면 어려움이 생길 때 오히려 외면하고 불평합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의식이 있는 성도는 교회가 어려워지면 도망칠 생각보다는 더 애틋한 사랑을 가지고 “내가 나중에 꼭 인물이 되어 교회에 보탬이 되리라!”고 다짐하면서 인물의 꿈과 비전이 더욱 찬란해지고 책임감이 커집니다. 결국 가정의식을 품고 교회생활을 하면 사랑, 헌신, 긍휼, 효심, 충성심, 책임감 등 수많은 덕목들이 형성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 덕목들을 가진 청년이 나중에 가정을 이루면 어떻게 될까요? 배우자를 놔두고 한눈파는 모습은 아무래도 적을 것이고 가정이 어려워질 때 가정을 뛰쳐나갈 마음보다는 더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가정의식을 잘 배우면 책임감과 충성심과 의리와 효심이 아무래도 더 있게 되고, 더 따뜻하고 가정적이 되고, 어려울 때는 더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외형주의를 따르지 않으니까 더 나누고 선교할 줄 알게 되고 인물이 되어도 무대보다는 무대 뒤의 음지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함도 잃지 않으니까 가정의 행복도 잃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들을 목회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목회자로서 또한 두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빠로서 결혼문제로 대화중에 저도 모르게 “아빠는 대형교회 설렁설렁 다니는 청년은 결혼대상으로 가급적 말리고 싶다.”는 말이 농담처럼 진심을 담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가정의식의 상실이고 가장 우선적인 해결과제는 가정의식의 회복입니다. 물론 사회 전체에 가정의식이 회복되면 좋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기에 일단 자기와 자기 자녀부터라도 가정의식을 잃지 않게 해야 행복의 꿈도 잃지 않고 인물 비전도 잃지 않으면서 인생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2가지 신적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는 내적인 속성이 유사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 되고 가정은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행복과 교회의 행복은 직결됩니다. 결국 교회생활에서 가정의식을 가지는 것과 더불어 복된 교회를 만드는 전초기지로서 가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인생에서 어떤 사명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명을 잘 완수하려면 결혼문제부터 지혜롭게 잘 풀어가야 합니다.

< 부르심대로 행하는 삶의 의미 >

 오늘날 미혼 성도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불신자와 결혼해도 좋으냐?”는 문제입니다. 그 질문에는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대답보다는 “최대한 믿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대답이 좋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면 부부간에 신앙문제로 힘든 일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신자가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절대원리는 아닙니다. 그것을 절대원리로 삼으면 현실적으로 믿는 처녀 중에서 꽤 많은 처녀는 독신으로 지내야 합니다. 대개 믿는 처녀가 믿는 총각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는 믿는 처녀와 믿는 총각의 비율의 3대 1 이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드시 신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3명의 믿는 처녀 중 2명은 독신으로 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되 본문 17절, 20절, 24절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대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결혼문제를 선택하면 됩니다. 본문은 특별히 “부르심대로 행하라!”는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사도 바울이 “부르심대로 행하라!”고 한 것은 자기 생각과 경험과 처지를 고집하면서 자기만이 절대원리와 절대해답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결혼 및 이혼 문제와 관련해서 제일 중요한 행동양식은 자기 신앙양심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갈등하는 부부에게 자기 경험을 살려 조언해줄 수는 있지만 자기주장을 절대원리로 내세워 그 부부에게 죄책감을 심지는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이나 이혼 문제도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기본원리가 절대원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본원리에 충실하되 그 기본원리를 절대원리로 따르기보다는 각자의 부르심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한 말씀은 본문의 문맥과 관련된 결혼과 이혼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삶의 전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부르심대로 행하라!”는 한 말씀은 남을 자기 기준대로 맞추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를 남처럼 꾸미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남을 나처럼 만들 필요도 없지만 나를 남처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소중한 것은 보지 못하고 남에게 있는 것만 부러워하면서 욕심을 부리면 죄에 빠지고 결국 패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셨다고 생각하십시오. 지금 자신이 가진 은사만으로도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열심히 살 때 점차 능력과 성공과 행복을 키워가며 살 수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에게 마음이 들지 않는 점이 있어도 장점을 발견하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배우자와 자녀를 주신 것도 감사하며 열심히 살면 조만간 시련의 때가 지나고 행복의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없습니다. 부족한 상황에서도 가정생활과 교회생활과 부부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크기와 성숙성이 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를 이 땅의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 부르심 안에서 신실하십시오 >

 특히 복된 가정의 일원으로서 복된 인물이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고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을 통해 자기 사명을 인식하면서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부터 아브라함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그 전까지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은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없는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람이 사명감이 없이 자신과 가족의 의식주만 위해 살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처럼 남에게 복을 주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사명을 늘 인식하며 사십시오. 위대한 인물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있는 공통점은 그들이 확고한 사명과 비전 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사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사명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시로 자기 사명을 새롭게 하십시오. “나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리라! 나는 내가 섬기는 교회가 나눔과 선교의 모델이 되는데 일조하고 <월새기(월간 새벽기도)>와 <월새기 영어판> 등의 문서선교를 통해 전 세계 영혼들에게 구원과 참된 복의 길을 제시하는 일에도 일조하리라!” 명예욕 때문에 그런 꿈과 비전과 사명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대한 사명감은 삶의 기본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터를 주고 믿음의 축복을 전하는 것도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이고, 자녀를 잘 키워서 교회와 사회에 공헌하게 하는 것도 복의 근원이 되는 삶입니다. 교회를 잘 섬겨서 교회가 내 사랑의 손길을 통해 교회가 멋진 선교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도 복의 근원이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신 분입니다.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도 끝내주게 밀어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가 버밍햄의 한 학교교실에서 그날 밤에 말씀을 전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심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 성도가 테일러에게 오늘 밤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모임을 취소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도 자신은 그 모임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10명이 모였습니다. 그 모임은 테일러의 일생 선교사역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때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5명은 선교사가 되거나 그들의 자녀들이 선교사가 되었고 나머지 5명은 그 후 오랫동안 테일러가 조직한 선교단체인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신실한 후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작은 일을 맡아도 그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꾸준히 하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반드시 멋지게 쓰임 받는 위치에 세워주시고 많은 열매도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인천에서 분당으로 와서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분당은 이미 오래 전에 입주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생소한 기독교 선교연맹(미국 성결교) 교회였기에 외적인 성장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매일 새벽예배 설교를 주일설교를 준비하듯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참석인원이 별로 없어도 새벽말씀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동료 목회자들이 그것은 교회부흥에 거의 도움이 안 되니까 주일예배 설교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매일 새벽마다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 설교들이 하나씩 모여 마침내 <성경 66권 전권 강해>의 비전이 점점 구체화되었고 그 비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비전도 이뤄졌고 더 나아가 <월새기 영어판> 비전도 새롭게 품게 된 것입니다.

 자기 부르심 안에서 맡겨진 일이 작은 일이라도 충실하게 이행하십시오. 그 모습은 축복의 통로가 될 사람도 지켜보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십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동역자와 후원자도 생기고 그 작은 일들이 보다 큰일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늘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비전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인물 비전이 성공주의와 바알리즘이 되지 않도록 가정의식을 잃지 않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마침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이 되어 천국가정과 천국교회의 초석 역할을 잘 감당하는 복된 인물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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