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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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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 5:6)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속사람’에 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하나는 겉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란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세상에 드러나고 사람들 눈에 비쳐진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외모, 능력, 성격, 삶의 태도, 소유 등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속사람이란 속에 감춰진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자신도 잘 알기 힘든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죄로 얼룩진 영혼, 일그러진 양심, 상처받고 억눌린 심령 등을 말합니다. 

이것을 나무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는 나무의 줄기, 가지, 잎사귀와 같은 땅위에 서 있는 부분이 있고, 또한 뿌리와 같은 땅 아래에 감춰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땅위에 서 있는 부분만 보이고, 땅 아래에 감춰진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의 땅 위에 서 있는 부분은 겉사람과 같고, 나무의 땅 아래 감춰진 부분은 속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속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겉사람에 몰두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속사람이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비로소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점점 믿음이 자라게 되면서 속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속사람을 우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복을 구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겉사람과 관련된 것에서 복을 찾습니다. 건강, 가족, 재물, 명예, 출세, 성공 등에서 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면 비로소 속사람과 관련된 것에서 복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팔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온유한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속사람에 대한 눈이 열린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속사람의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의”라는 말은 헬라어 “디카이오쉬네”(dikaiosuin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은 주로 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즉 디카이오쉬네는 법을 어기지 않아서 적법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은 관습적으로도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즉 디카이오쉬네는 사회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잘 지켜서 올바른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믿지 않아서 아직 속사람을 볼 수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의라는 말 앞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겉사람으로만 볼 때 법적인 잘못이 없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대체로 잘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고 남다르게 착한 일도 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하면 펄쩍 뜁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은근히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람의 의”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죄가 하나씩 둘씩 드러납니다. 자기의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유혹과 시험이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넘어져온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런 말씀 앞에서 눈물로 “아멘”하게 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인간의 의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전혀 죄가 없으시고, 불의와 무관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의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결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의요, 다가갈 수 없는 의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엡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기에 우리의 죄는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롬 5: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저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갈 3:13을 주해하면서 주목할 만한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즐거운 교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십자가 위에서 교환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받으시고, 대신 주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환이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복된 교환인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교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덧입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의이기도 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다음으로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한 마디로 먹지 못해 굶주리고 마시지 못해 갈증으로 목이 마른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탄탈러스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올림푸스 신들의 총애를 받아 신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교제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신들만이 마실 수 있는 음료 앰브로지아를 훔쳐마셨습니다. 그리고 신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제우스 신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탄탈러스를 지하 감방에 가두고 영원히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탄탈러스는 거의 턱까지 오는 물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도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숙이면 어느새 물도 따라 같이 내려가고, 몸을 일으키면 물이 다시 올라와 어깨와 턱 밑에서 찰랑거렸습니다. 눈앞에 먹음직스런 과일이 가득 열린 나무가 있습니다.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가지가 높이 올 리가 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목마르고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영어 “탠털라이즈”(tantaliz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감질난다. 애간장이 탄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이렇게 마시고 싶고 먹고 싶어서 애간장이 타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겉사람이 주리고 목말라하는 체험을 하며 삽니다.

우선 욕망(Lust)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적인 욕망 때문에 그리고 쾌락에 사로잡혀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박이나 약물과 같은 것에 중독되어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필요(Need)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전전근긍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 쫓겨서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Meaning)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자기 독선, 자기 과시 그리고 자기 교만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속사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주리고 목마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 42:1 이하를 보면 시인은 자신의 속사람의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속사람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은 속사람이 느끼는 전혀 새로운 주리고 목마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1500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매일 뜨거운 열정으로 말씀을 전해도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길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길목사님의 죄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옛날 친구가 사경을 헤맬 때 자신이 죽으면 유산을 정리하여 아내와 자식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다가 100원을 슬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그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길목사님이 너무 놀라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고, 설교 도중에 교우들 앞에서 눈물로 자기의 죄를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당장 친구 아내에게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마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힌 사람이 그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자기 안에 남아있는 작은 죄라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 6: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노아는 예외라는 말일까요? 도대체 노아를 의인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노아는 의롭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의롭게 살려고 애썼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변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120년 동안을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부를 것이요

본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시 여기서 배부르다는 것도 속사람 이야기입니다. 속사람이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속사람이 배부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속사람에 감사가 가득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롬 5:1을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롬 5:9를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찬 305장은 저 유명한 Amazing Grace라는 곡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가사를 보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바로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속사람의 배부름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칭찬으로 그 속사람에 기쁨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마 25:2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말씀은 장차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 의롭게 살고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저 종말에 하나님께 받을 칭찬을 소망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날의 주님의 칭찬을 바라보며 오늘도 기뻐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이런 기쁨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 그들이 속사람의 배부름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며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감사로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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