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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믿음을 가지라! (요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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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을 가지라!  (요 4:43-54)
 

1. 참 믿음은?

백금산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행복 여행』이라는 책에 “신앙의 진품 명품”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진품 명품>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전문가들이 출연해 골동품의 진위와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해 주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연예인들도 감정 평가단으로 나온다. 출연자들이 집에 있는 골동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감정을 받을 수 있어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골동품 소장가들에게 그 물건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들어 보고, 연예인들이 나름대로 가격을 정해 본다. 한번은 어떤 중년 신사가 오래 되어 보이는 붓글씨 한 점을 들고 나왔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직접 쓴 글이라고 했다. 

그 소장자는 애국자의 붓글씨를 소장한 것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연예인 감정가들도 감탄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을 매겼다. 소장자도 감정가를 1억원이 넘게 써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평가만 남았다.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지켜보는데, 전문가의 감정가는 단돈 500원이었다. 소장자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은 가짜였던 것이다. 소장자는 지금까지 가짜를 보고 기뻐했고, 가짜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다녔던 것이다. 우리 신앙도 자주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귀한 것일수록 복제품이 많기 때문이다.” 여러분, 백목사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도 가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신앙인데도 모르고 마치 잘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고 믿음이 전부인 줄 아는 성도는 항상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믿음이 잘못되기 쉽고, 믿음이 잘못되면 자신의 삶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믿음에 대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2. 본문의 배경과 정황

1) 참 믿음의 전제

유다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몰려들고, 이것을 본 유대 지도자들이 시샘하여 뜻하지 않은 충돌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셔서 잠시 갈릴리 지방으로 피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셨고, 그 지방에 있는 ‘수가’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셨고, 그 여인으로 말미암아 수가 市 全體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 이후에 된 일입니다만, 오늘 본문을 살피기 위하여 좀 더 앞선 상황으로 잠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유다 지방에서 사역하실 때 만나셨던 니고데모 사건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 사건”의 의미를 아는 것이 오늘 본문과 나아가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주의 깊게 살핀 후에 주님께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곰곰이 따져본 후 내린 결론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죠. 니고데모의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3장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즉 니고데모 식으로 예수님을 아는 척해도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않고 머리로 이해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서 그것은 참 믿음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참 믿음의 결과

요한복음은 이렇게 믿음의 전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결과가 어떠하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0장 10절이 말하는 대로 성도로 하여금 永生을 얻게 하고 그것을 豊盛히 누리도록, 즉 풍성한 삶을 살게 합니다(10:10). 즉 성도가 그리스도를 만나 바로 믿고 참으로 거듭났다면 그 삶이 풍성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차고 넘치는 기쁨, 무한한 자유, 태산과도 같은 평안, 신나는 만족 등으로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참 믿음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즐거움이 늘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신령한 은혜와 복을 누리는 즐거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가운데 행하는 기쁨 등이 넘쳐나시냐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바른 믿음 위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3. 기적 신앙에서 말씀 신앙으로

1) 뜻하지 않은 환영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에서 이틀을 머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로 가셨습니다(43). 그런데 그 가시는 길에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은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도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거나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부모, 아니 그 윗대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어릴 적부터 성장한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라, 알 것 다 아는 처지에 선지자라고 해봐야 자꾸 옛날 생각나고 어릴 적 생각나서 존경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45절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때 ‘영접하다’는 말은 고전 헬라 문헌에서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거나, ‘제물이 신들에 의해 열납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영접하다”는 극진히 ‘환영하다, 환대하다’는 의미로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여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그렇게 환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45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즉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에서 행하신 표적들(2:23)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틀 전, 수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표적을 보았거나 그 소문 때문에 예수님께 모여들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단지 주님을 만나 변화된 한 여인의 전도로 모여들었고, 그렇게 모여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결국 갈릴리 사람들의 환영은 참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환영 받으신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 수가처럼 말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말씀이 아닌 기적

갈릴리 가버나움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의 궁정 내 신하로 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는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어떤 지역은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고, 어떤 지역은 분봉 왕을 세워 다스리게 했는데요. 헤롯 안티파스는 그 분봉왕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맡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본부인과 아들을 살해했으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은 부도덕한 왕이었고, 이러한 패역이 이스라엘 안에서 이뤄지는 것에 분노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그의 목을 효수함으로 되갚은 포악하고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이 안티파스는 갈릴리 백성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기 위해 가난한 백성을 착취해 수많은 세금과 재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릴리 백성들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빚을 져 땅을 빼앗기고 자신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종이 되거나, 그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리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산으로 올라가서 도적떼와 합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왕의 신하이니 이 사람도 인생을 선하고 착하게 산 사람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왕의 신하”라고 했는데, 이 “신하”라는 말은 성경 원어로 ‘바실리코스’입니다. 이 말은 혈연적으로 또는 공적인 관계로 ‘바실류스’, 즉 왕과 관련된 사람을 의미합니다(A. T. Robertson). 그러니까 이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의 형제간이거나, 혹은 의형제인 마나엔이거나(행13:1), 아니면 가장 최측근 신하였던 ‘구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눅8:3). 아무튼 이렇게 높은 고관대작이 그 당시 여러 가지 정서를 보아 그 먼 거리를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그의 사정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자신의 체면과 남들의 이목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병든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47절,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의 아들은 병이 들었고, 지금은 거의 죽기 직전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權力이나 財力이나 知名度로 보아 그는 할 수 노력 그 이상을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들의 병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37km 내지 40km 정도의 거리입니다. 거기다가 경사가 심한 험한 길이기 때문에 아마도 약 7시간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즉 왕의 신하는 해 뜨자마자 출발해서, 7시, 즉 오후 1시경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아들의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찾은 그 고위 관리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48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전에는 예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정작 자신의 사정이 다급해지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만을 바라며 예수님을 찾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47절에서 예수님에게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한 것이나, 49절에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청한 것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은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주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면서 겸손하고 간절하게 매달리는 그를 보시고 그가 가자는 대로 가버나움으로 직접 가시지는 않고 단지 말씀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절).” 

그러자 그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여기서 “믿고”는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았다고 선포하신 그 말씀을 즉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가더니”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의 결단과 행동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긴박한 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주님의 거듭된 말씀을 통하여 단지 기적만 행하시는 기계적인 주님이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른 믿음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하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에 의한 행위였습니다. 더 이상 표적을 구하는 연약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 믿음을 가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던 길에 맞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자기 종들을 만났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아들의 예상 밖의 회복에 놀라서 그 소식을 주인에게 전하려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길에서 주인을 만나 ‘아이가 살아있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종들의 말은 들은 그 사람은 생각한 바가 있어서 아이가 나은 시간을 물었습니다. 종들은 “어제 일곱 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하는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씀하신 시점과 40km 가까이 떨어진 가버나움에 있던 아들이 나은 시간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은 예수님은 시간이나 장소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

성도 여러분, 이 왕의 신하가 주님을 찾을 때, 그때 그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그에게 무엇을 구하려고 나옵니까? 아니 여러분들은 주님께 무엇을 구하거나 얻으려고 이렇게 와 계십니까? 어쩌면 여러분도 이 신하가 “내려 오셔서 내 자식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요구한 것처럼, 어떤 요구사항, 바라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니고데모처럼 기독교 밖에 없어서, 기독교가 필요해서, 때로는 교회가 필요해서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도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48). 

이 말씀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야 믿음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기적을 행한 후에야 그 기적의 결과를 분명히 목격하고 나서 ‘아, 이 분이 누구시구나!’하고 믿음을 가질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기적을 보고 그 결과가 인간의 능력과 현실을 초월하다는 것을 목격하면 “아, 저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뭔가가 있구나!”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사람이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병 고치는 자, 형제간의 재산 분쟁을 중재하는 자(눅12:13-21), 왕이나 새로운 지도자, 혹은 세상의 복과 물질적인 복을 주시는 분, 집안과 자녀를 잘되게 해주는 분, 이생을 안정되게 해주고 성공을 보장해 주는 분으로 알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 증진을 위해 예수님이나 그의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뜻을 가진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믿었던 사마리아인과 기적을 요구하고 그것을 경험하면서도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대조하신 것입니다. 

4) 믿음의 변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이 신하의 변화입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➀ 우선 병이 나아 살게 된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는 믿음의 발전과정을 봅니다. 그의 믿음의 첫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권능이 있음을 알고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려고 왔습니다. 오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자신의 위치나 체면 등을 고려해 볼 때 쉽지 않은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들었던 말씀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였는데, 그것마저 싫은 내색하지 않고 다 받아들였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예수님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두 번째 들은 예수님의 말씀, 즉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에 아무런 의문이나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믿고 순종했을 때, 그는 그 즉시 아들의 병이 낫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즉 그의 믿음이 자란 것이죠. 처음에는 어떤 기적이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병을 고치는 문제 그 이상의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고 가버나움과 가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➁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야 할 두번째는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는 왕의 신하의 간구에 응해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씀으로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며 그를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이 멀고 귀찮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내려가다 보면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그러다가는 아이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은 말씀만으로도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살리는 분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참 믿음은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임을,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라”하실 때, 그 자리에서 기적이나 어떤 확증을 얻지 못했어도 순종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신앙이 싹튼 것이죠. 표적이나, 어떤 물리적인 변화나, 그 뭔가를 얻으려는 신앙에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이고 참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계신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믿는 자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참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테네의 한 언덕에 있는 고대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성채에는 예전부터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은 그 언덕에서 아주 오래된 대리석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주워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째서 그 대리석 조각들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테네 당국은 정기적으로 채석장에서 대리석 조각을 트럭으로 가득 실어와 아크로폴리스 근처에 뿌려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그것이 고대의 대리석 조각들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즉 고대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왔다가 이 아테네 관광객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이라고 주워담고 가는 것들이 사실은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진정한 믿음, 참 믿음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다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합니다만, 그들이 내놓는 예수는 다 다릅니다. 교단마다 다르고, 교회마다 다르고, 교인들마다 다 다릅니다. 사업 잘 되게 해 주는 예수! 병 고쳐 주는 예수! 귀신 쫓아내는 예수! 자녀 대학 붙여 주는 예수! 고부간의 갈등을 해결 해 주는 예수! 주식 대박 나게 해 주는 예수! 교회 부흥시켜주는 예수! 사회를 평등케 해 주는 예수 …. 어떤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일까요? 아무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은데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단순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 어떤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 기능적인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과 참된 신뢰,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지라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기도가 응답되도 문제가 해결되어야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2차, 3차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이 예수님이기에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또 하나 주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어떤 문제로 주님을 찾기보다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주님 자신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는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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