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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 (마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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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 (마 5:1-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 평안, 평화란 말이 필요치 않은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서 계셨던 중동 땅만큼 평화를 갈망하는 곳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여러 제국의 각축장이었던 중동지역은 정복자의 말발굽자국마다 무고한 백성들의 피가 고였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애굽 제국, 그리스 제국, 로마 제국, 사라센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할 때마다 그리고 근래에 일어난 이스라엘-아랍전쟁, 이란-이라크전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 그곳에는 전쟁, 죽음, 노예, 약탈, 파괴, 분쟁의 소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평화가 없었기에 평화스러운 삶을 갈망했습니다.
보통 주고받는 인사말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함축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경우,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배고픈 시절의 인사말은 ‘밥 먹었느냐?’ ‘진지 드셨어요?’ 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만날 때마다 ‘밥 먹었느냐?’라고 안부를 물었을까요? 
아랍인들의 인사말에는 ‘쌀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평안이란 뜻이지요. 
‘마아 쌀라마’(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에도 ‘샬롬(평안)’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말이 아닙니까? 
평화의 도성이 고래로부터 가장 불안한 도성이었습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익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를 소리 높여 외칠 때마다 평화는 점점 더 멀어지고, 전쟁의 소문만 무성해갔습니다.

1. 화평케 하는 자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에이레노 포이오스’란 말인데 합성어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 즉 영적으로, 육적으로 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포이오스’는 행하는 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말을 합하면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이지요
평화를 만드는 자란 아주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평화를 무심히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애타게 갈망하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가족관계가 서먹서먹해졌으면 ‘회복해야 할 텐데… ’하고 넋두리만 늘어놓지 말고 적극적으로 화목한 가정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면 ‘안보겠다면 말라지 뭐!’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11C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지탈환을 소리 높여 외치며 십자방패와 칼을 들고 설칠 때, 아시스의 성자 프렌체스코는 이렇게 조용히 평화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얻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peace maker도 있지만 trouble maker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는 데마다 문제를 일으켜요! 
평안하던 마을에, 평안하던 교회에, 평안하던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 오고 나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집니다. 
상처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네 편 내 편이란 편 가름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을 trouble maker라고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 복’을 많이 받았어요. 
‘인복’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복스럽게 하려면 교인들은 좋은 목사를 만나야 되고요, 목사는 좋은 교인들을 만나야 합니다. 
저가 여러 교우들에게 좋은 목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이제까지 참 좋은 교인들을 만났습니다. 
3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소위 trouble maker 때문에 힘들어 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이 점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어느 장소, 어느 모임, 어느 직장, 어느 단체에 가더라고 peace maker가 되길 바랍니다.

2. 화평케 하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먼저, 자기 자신이 평안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평안하지 않고서는 남을 화평케 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얘기지요!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데 다른 사람을, 그가 속한 공동체를 평안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복한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우울한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자가를 진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된다.’, ‘날마다 죽는다.’라고 하니까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모든 행복을, 모든 기쁨을, 모든 즐거움을 반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순교도 행복한 순간이었지 절망과 자포자기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이렇게 순교의 영광을 주시니 이 어찌 망극하신 은혜입니까!” 
이렇고 고백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요 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20: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평안해야 합니다. 
상황이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내 믿음의 눈이 주님께 고정되어 있으면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을 잃었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이 흐트러졌다는 것입니다.
마 14장에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밤 4경에(4-6시) 칠흑같이 어두운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고난당함을 아시고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성격 급한 베드로가 이 음성을 듣고 물 위로 뛰어내려 주님께 걸어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의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었을 때에는 칠흑 같은 어두움도, 성난 파도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 14:30절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니까 바람도 보이고, 성난 파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흐트러짐 없는 믿음의 시선으로 참 평안을 누리길 축원합니다.

2)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의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잠 17: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대우 김우중 회장께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하고 더 이상 읽지 않고 덮어버렸습니다. 
‘회사의 중역이 되려면 가정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적과 수단을 크게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가정은 목적이고, 직업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셔서 가정을 이루신 것은 창조의 위대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직업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냥하다가 사냥감이 없으면 양을 키웠고, 양을 끌고 다니기 힘들면 물이 있는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직업은 변천해왔고 앞으로도 변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을 위하여 가정생활을 포기하라는 것은 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가정은 영원할 것이지만 기업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 정도입니다.

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결혼의 원리인 양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 2: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둘이 한 몸을 이루려면 반씩 잘라내야 합니다. 
1+1=1이 되려면 어떻게 하든지 1을 1/2로 만들어야 됩니다. 

상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면 양보는커녕 남의 것까지 보태서 200%를 차지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화목하겠습니까! 
‘지금 내 형편이 어려운데 어디 돈 많은 외동딸 없을까?’ 
‘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어디 직장 생활하는 처녀 없을까?’
‘나는 이 직업을 버리고 싶지 않는데 어디 나를 이해해줄 남자가 없을까?’ 
‘나는 술친구가 좋은데 나를 이해하고 늦게까지 기다려줄 여자는 없을까?’ 
결혼을 남의 것까지 보태서 200% 되는 기회로 생각하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싸움밖에 할 게 뭐 있겠어요? 
양보 없는 가정은 결코 화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지는 희생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하길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이웃과 화목을 위한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고후 5: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① 교우 여러분, 문제와 싸우되 사람과는 싸우지 마십시오. 

우리는 종종 싸울 때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합니다. 
문제와는 싸우되 사람과는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복수한다.’는 말을 하는데, 복수한다는 것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는 싸워도 복수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사람까지 잡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사람을 살리려 하다가 문제까지 덮어버립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사람까지 잡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한다고 하다가 문제를 덮어버리면 그 또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문제와 싸우되 사람과는 싸우지 마십시오.

② 또한, 공의와 사랑의 조화가 평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가지신 두 가지 성품은 공의와 사랑으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이 있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함께하는 공의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평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공의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공의가 모든 불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정의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옳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정의파들이 좋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와 같은 정의파들이 좋아하고 자주 쓰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는 말입니다.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며 매사에 바른 말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아주 훌륭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 짧은 경험을 통하여 보면 그들이 교회나 직장과 가정에서 종종 트러블메이커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사랑으로 감싸지 않으면 또 다른 불화를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가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더 심각한 트러블메이커가 되기도 합니다.

③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입에 먹을 것이 있도록 힘쓰십시오. 

‘평화(平和)’라는 말의 한문 글자의 뜻은 참 깊습니다. 
그 뜻은 모든 사람의 입(口)에 곡식(禾)을 공평(平)하게 넣어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를 지어 평생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평화의 가장 큰 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조선 최고 부잣집인 경주 최부자 가문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과 경륜이 있답니다.

. 과거시험을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 길손들을 후하게 대접하라.
.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 최씨 집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사방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뜻이 있잖아요?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 분을 깔고 앉아 혼자 먹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전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후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어떤 사람이 복 받는 삶을 사는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① 자기 자신의 마음이 평안한 삶 ② 가정 화목을 이룬 삶 ③ 이웃과 화목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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