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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화로운 세상 (창 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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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세상 (창 1:20-25)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우수 절기

우수 절기에 내리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포근해져 봄이 멀지 않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제 마음은 양가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영동지역에 내린 폭설이 속히 녹아 주민들의 불편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봄소식은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형제자매들에게도 좋은 소식일 겁니다. 하지만 구제역으로 매몰된 짐승들의 사체에서 나오는 침출수 문제를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하수까지 오염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봄은 또 집 없는 세입자들에게 고통의 계절이 될 전망입니다. 천정부지로 솟는 전셋값 때문입니다. 인간살이의 풍경이 어떠하든 봄은 오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우수 절기가 되면 얼었던 물이 풀리고 물고기가 올라와 수달이 먹이를 잡아 늘어놓고, 기러기는 다시 추운 지방을 찾아 떠나고, 풀과 나무에도 싹이 트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흥겨운 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실이 어둡기 때문일까요? 발랄하고 경쾌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오 푸른 바람 불어와/푸른 빛 물결 일으킨다네/오 온통 푸른 이 목장/수풀은 잘도 자랐네//눈 녹아 골짜기 개울을 이루고/평지에 흘러서 강물이 되었네/들판을 흘러서 논밭을 적시며/노래를 부르네 풍년가를”. 보헤미아 민요라지요? 삶이 어렵다고 우울한 노래만 부를 이유가 있나요. 저는 이 노래를 혼자 흥얼거리면서 자꾸 어두워지려는 제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엊그제부터 저의 교회 정원 산책이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올라오는 새싹과 눈맞춤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른지 아직은 푸른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좀 유난을 떠는 것 같지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꾸만 자연과 교감해야만 우리 마음에 질서가 생깁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들어 아담 앞에 끌어오신 것은 함께 경탄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어디 짐승뿐이겠습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래 한 알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시가 떠오릅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의 시간에서 영원을 보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셨던 예수님이 보셨던 세계가 이런 것일 겁니다. 우리가 세계를 심드렁하게 바라볼 수 없는 까닭은 그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창조의 날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매우 독창적입니다. 오늘은 창조 이야기가 형성된 배경에 대해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다른 민족의 창조 신화와 다른 것을 하나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른 민족의 창조 신화는 신들의 싸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창조 신화는 마르둑이라는 신이 티아맛이라는 혼돈의 괴물을 죽여 그 몸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티아맛의 몸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그 위에 사는 사람과 동물들에게 적대적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것도 일꾼으로 부려먹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는 어디를 보아도 신들의 폭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타락 이전의 자연 세계는 인간에게 결코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창조 이야기를 통해 일깨우려는 것은 이 세상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창조되었다는 것과,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는 신비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삼가는 마음과 정성스러운 마음이 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파괴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자연세계에 최소한의 변형만 가하는 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닷샛날과 엿샛날에 일어난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간과 공간에 이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은, 닷샛날 물과 공중에 물고기와 새들을 풀어놓으십니다. 엿샛날에는 땅에서 살아갈 동물들을 만드십니다. 물과 땅을 오가는 양서류나 파충류는 언제 만드셨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는 목사를 곤경에 몰아넣었다고 득의의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다’입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실증적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다른 데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창조 이야기를 일정한 패턴 속에 담아 전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빛이 생겨라’,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2)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는 성취의 선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3)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며 흐뭇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이 전혀 없는 날도 있고, 두 번씩 반복되는 날도 있습니다. 
4) 마치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 지났다”고 선언합니다. 

이 패턴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런 세상이 하나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원복原福(original blessing) 속에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물의 창조를 전하고 있는 닷샛날과 엿샛날의 창조 이야기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등장합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축원입니다. 참 가슴 벅찬 축원입니다. 

오늘 평안한 사람들에게 이 축원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을지 몰라도,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고 있던 사람들,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구어야 했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친 몸을 붙들어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이 축원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주어졌고, 야곱과 기근을 피해 세상을 떠돌던 그의 후손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동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1)

•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

삶이 힘겨울수록 우리가 창조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덴 이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된 생명들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실 때에는 그럴 수 있는 능력까지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축원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를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으로 재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숨을 받아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살아 있음의 놀라운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야말로 타락한 마음입니다. 

저는 가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효창 공원을 산책합니다. 날이 좀 풀리면서 새들의 지저귐이 대단합니다. 어느 날 낯선 새 여러 마리를 목격했는데 도무지 이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조류도감을 찾아보니 직박구리였습니다. 참새, 까치, 까마귀, 기러기, 갈매기, 비둘기, 꿩 말고 여러분이 모양과 이름을 일치시킬 수 있는 새가 얼마나 되나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 이름도 잘 모릅니다. 

멧새, 딱새, 박새, 직박구리…. 이 새들도 우리의 이웃들인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모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그 영속적인 기적과 생명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왠지 요즘은 죄스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다이앤 디 프리마의 시를 기도처럼 읊조리기도 합니다. 

아침잠을 깨우는 수다스런 새들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못생긴 언덕에 핀 끈적끈적한 꽈리꽃
일찍부터 웃자란 맛이 쓴 상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거대한 열대 우림의 침묵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물을 튀기는 바닷새들의 서투른 날갯짓
우주 공간의 무수히 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인간의 경이에 찬 눈동자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새들 이름만 모르는 게 아니라, 물고기 이름도 모르고, 꽃 이름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우리는 다른 데서 기적을 찾습니다. 우리가 폭력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면 자연 세계도 우리를 적대하지 않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 가운데는 사나운 늑대를 길들인 이야기도 있고 새들에게 설교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인물과 동물세계가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성 게라시무스에게는 아주 충직한 사자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사자는 나중에 성인의 무덤에 엎드려 슬퍼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5세기의 주교 성 시오란은 골방 옆에 멧돼지, 오소리, 여우, 늑대, 사슴 등 친근한 동물 형제들의 우리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우 형제가 순전히 배고픔 때문에 수도사의 샌들을 먹어치웠을 때 그 가엾은 동물은 참회의 뜻으로 사흘간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여우가 참 딱하지요?

• 파괴된 세계

그런데 이런 멋진 세계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기후변화가 야기하는 재앙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빙하는 녹아내리고, 숲은 사라지고, 사막이 늘어나고, 수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지고 있고, 바다는 죽음의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큰 걱정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매몰된 짐승들 사체가 썩으면서 흘러나오는 침출수가 식수원을 위협하고 있고, 동물의 내장에서 발생한 가스가 터지면서 동물의 사체가 땅으로 솟아오르고, 그런 곳마다 독수리 떼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마치 계시록이 전하고 있는 일곱 봉인이 열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계6:7-8)

묵시록적 세계가 바야흐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사람들은 삼겹살 일인분 가격이 1만 2천원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지금은 우리 삶의 방식을 철저하게 재검토해야 할 때입니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 복이 아니라, 남보다 덜 가지고 살면서도 기뻐할 줄 아는 것이 복입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희귀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온 세계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는 것이 복입니다.

지금 우리는 벼랑 끝에 서있는 형국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 세상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그 흐름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묻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었다는 복음서의 보도는 믿으십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작고 미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가능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균형과 조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을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후년에도 아니 수백 년 후에도 우리의 후손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앞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눈 녹아 골짜기 개울을 이르고/평지에 흘러서 강물이 되었네’. 역사의 우수雨水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의 얼음을 녹여 스스로 물이 된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봄바람이 되어 다가가는 이들을 통해 열립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의 파수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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