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래 참으라 (약 5:7-12)

첨부 1


오래 참으라 (약 5:7-12)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꼭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훌륭한 학자, 아끼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서 일하는 중에 주인집 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그 집 주인 딸과 같이 쫓겨 나와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끼바의 부인은 남편의 무식을 한탄하면서 지금부터라도 학교에 다니도록 권하였으나 아끼바는 이미 나이 40이 넘어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계속 양을 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에 어느 날 목이 말라 개울에 가서 엎드려 물을 마시는데 눈앞에 있는 바위를 바라보니 물이 흘러 떨어진 곳이 움푹 패여 있었습니다. 아끼바는 깨달았습니다. 물 한 방울은 약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흐르니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나도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하고 배우면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어서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믿음의 눈은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매사에 의욕을 가지고 “하면 된다”라는 믿음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반드시 가능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길이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가을 끝자락에 비가 조금 오기를 시작하면서 우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 처음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이 비가 오게 됨으로 가을철 열매들이 더 풍성해집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때 보리나 밀을 파종을 한다는 겁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에 씨를 뿌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이 참습니다. 언제까지 참느냐 하면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다시 말해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길이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농부의 삶을 정의한다면 바라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가 올 때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가을 끝자락이 되어 첫 비 다시 말해서 이른 비가 내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씨앗을 심을 때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바로 그날을 농부들은 기다립니다. 

그래야 그들이 심는 씨가 옥토에 심겨진 씨가 될 수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야 아무리 씨를 심는다고 한들 싹이 나지를 않습니다. 뭐 물을 줘서 억지로 싹을 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디서 물을 가져다 그 농장에 싹이 자라고 열매를 맺도록 물을 댈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날이야 요단강물을 끌어들여 스프링클러로 날마다 물을 주어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강가도 아닌 유다 산지에서 무슨 수로 날마다 밭에 물을 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농부는 길이 참고 기다립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바로 이른 비입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땅이 촉촉하게 적셔지고 따라서 이제 씨를 심으면 싹이 나서 자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씨 뿌림으로 끝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김을 매주면서 열매를 맺기를 바라면서 이번에는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봄에 내리는 마지막 비 늦은 비야말로 곡식이 알차게 열매 맺도록 하는 알곡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쭉정이로 끝나지 않고 알곡이 되도록 바라는 까닭에 늦은 비를 또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강림하시는 그날 다시 오시는 그날은 비록 우리 눈에는 더디게 느껴져도 곧 우리들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강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길이 참는 것이냐 하면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농부의 길이 참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농부의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길이 참음 역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고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하는 칭찬과 더불어 주어지는 상급과 면류관입니다. 이 바람이 있기에 길이 참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 하면 곧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습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단지 농부가 기다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다소 차이는 있을망정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가을의 이른 비와 봄의 늦은 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을과 봄이 그 때입니다. 그리고 늦은 비야말로 그토록 바라던 귀한 열매를 거둘 때가 가까움을 알려주는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이 강림이 가깝다는 신호입니다. 눅 18:7~8에서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갈수록 쉽지가 않습니다. 

아니 믿음 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 같이 자기 말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듬어줄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빌 2:1~5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성령으로 교제하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기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내 생각대로 권면하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권면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같이 하게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바로 쉽게 흔들리고 쓰러지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길이 참으라는 것은 단순히 오래 참는 것이 아닌 끝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한데 내 힘으로 됩디까? 안 됩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오래 참고 길이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서 길이 참고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은 하나 됨을 깨는 아주 무서운 사탄의 도구입니다. 왜 원망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바라는 만큼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내가 바라는 것을 얻을 만큼의 수준에 내가 올라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만큼 수고하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받았음에도 불구하도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새벽 같이 인력 시장에 가서 오만 원을 주기로 하고 일꾼을 불러 모았습니다. 9시에도 12시에도 오후 세시에도 오만 원을 주기로 하고 일꾼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퇴근 시간 가까운 오후 다섯 시에도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여섯 시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주인이 일당을 계산해주는데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사람에게 오만 원을 줍니다. 그러나 보다 일찍 온 사람들 마음에는 옳거니 그렇다면 나는 더 받을 수 있겠네 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인이 약속한 것은 오만 원입니다. 당연히 오만 원을 주었겠죠? 그랬더니 불평을 하면서 욕을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더 일찍 왔는데 왜 똑같이 오만 원이냐? 주인이 말합니다. 불평할 것 없다. 내가 약속한 것은 오만 원이야. 그러니 네가 받을 당연한 몫을 네가 받은 것이다. 우리가 이와 똑같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보잘 것이 없으면서도 기대는 얼마나 큰지 몰라요. 아니 심지어 욕먹을 일을 해 놓고도 오히려 칭찬을 기대하는 착각 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원망하는 겁니다. 투덜거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투덜거림으로는 사람 앞에서는 될 일이 있기도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얻어터질 일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있는 것으로 먼저 족한 줄 알아라 먼저 내게 있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보다 많고 좋은 것으로 채움 받는 마중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사가 없이는 은혜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이는 복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아무런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족한 줄 알라 먼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겁니다. 사실 원망을 하기로 한다면 욥이 더했겠죠? 하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던 욥입니다. 그런데 욥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니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던 욥이라면 당연히 사탄이 시험한다고 해도 안 돼 하고 한 마디로 딱 자르셔야지 그렇다면 너 한 번 해 봐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 재산 다 빼앗겨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다 무너진 집에 깔려죽어, 몸에는 심한 병이 들어서 몸도 마음도 다 괴로운데 거기다 대로 사랑하는 아내는 당신이 그토록 믿던 그 잘난 하나님 원망하고 나가 죽으라고 악담까지 해대는데도 그는 별다른 흔들림이 없습니다. 기껏 한다는 말이 어쩜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구려 하고 맙니다. 멀리서 온 세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찾아와서는 네가 무슨 숨겨진 잘못이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냐고 속을 박박 긁어대는데도 욥은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고 입술로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단지 너무 속상하다 보니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한 번 왜 이런 일이 있는지나 한 번 따져보아야겠다고 하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곤경에서 회복시키시고 갑절로 복을 주시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단지 욥에게 있어서의 아쉬움이 있다면 친구들의 독설에도 여전히 그가 침묵을 지키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나는 그런 놈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려고 하다 보니 조금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기도 하였지만 곧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엎드립니다. 

그런 욥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고 저로 하여금 회개함으로 엎드릴 수 있도록 하신 다음 갑절로 복을 주셨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건 바로 주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주로 서실 때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원망할 때입니다. 원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지금의 처한 입장이 어떠하든지 환경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온통 불평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그럼에도 여전히 감사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이요 그래서 더욱 복되고 은혜로 가득한 삶이 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불평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맹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보다 좋은 것은 차라리 침묵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으니 맹세를 해서라도 믿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대방이 내 말을 더 믿어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자기 말을 믿어달라고 할까 해서 상대방이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을 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차라리 침묵하십시오. 단지 나는 분명히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여야 정죄 받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맹세하며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더 신뢰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더 믿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라도 믿게 만들려고 하는 그 사람이 어찌 보면 불쌍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아니 아무리 말을 해도 믿어주지를 않으니 맹세라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참으로 딱한 말씀입니다. 평상시 어떻게 살았기에 그 하는 말조차 믿어주질 않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믿어주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줄 정도가 되어야지 이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는데도 흥 흥 한다면 이거야 어찌 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말이 일관성이 있어야 됩니다. 어제는 이 말 했다가 오늘은 저 말 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고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영 헷갈리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는 말에 마음을 담아야지 성질을 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해도 성질을 내며 하는 말은 듣기도 싫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다 대고 맹세한다고 해서 그 말을 누구라 믿어주겠습니까? 아울러서 인간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라면 맹세한다고 한들 믿어주겠습니까? 

조선시대 효종·숙종 때에 명의(名醫)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과 유명한 학자요 정치가인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당파로 인해 서로 원수같이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중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정적(政敵)이지만 허목이 아니면 내 병을 고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허목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허목은 미소를 띠며 약 처방을 써주었는데, 극약들을 섞어서 달여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허목은 송시열이 극약들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게 혹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아냐 하며 의심하고는 먹지 않아 결국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방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사람들은 허목을 욕하였지만, 송시열은 허목의 지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송시열이 완쾌하자 허목은 송시열의 대담성을 찬탄했고, 송시열은 허목의 도량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인간적인 면에서의 차이로 인해 반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인은 자신의 신념과 감정과는 별개로 상대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갈라질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면 거기에는 아무런 맹세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십시오. 항상 서로를 축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눈빛으로 만으로도 상대방의 사랑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나가게 되면 그땐 맹세할 이유도 없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내가 맹세하는 것 때문에 내가 정죄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돈이 거짓말을 하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서 언제까지 꼭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약속대로 지키지 못하게 될 때도 혹시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모든 것이 내 생각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다음이 다시 돈을 빌린다고 할 때 거기에 선뜻 그러라고 하며 빌려주겠습니까? 뭐 다른 약속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약속을 왜 합니까?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마음을 먹고 약속을 어긴다면 당신 말이야 약속을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약속을 안 지키는 거냐고 하면서 책망을 듣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약속한 것으로 인애서 정죄를 받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약속을 했으면 내게 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약속대로 이루시는 주님 한 번도 약속한 것을 어긴 적이 없으신 주님 앞에서 우리의 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힘쓰고 수고함으로 주 성령 안에서 이런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나가는 축복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남미의 이구아수 폭포는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들 폭포는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의 폭과 높이가 세계적인 폭포입니다. 아마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한 해 수백만 명은 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물줄기의 폭이 넓지 않고 낙차가 없이 고요히 흐르기만 한다면 구경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굽이치고 물줄기가 곤두박질쳐 폭포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기 때문에 보고 싶어 합니다. 

텔레비전이 방영하는 인생극장의 주인공들은 모두 거친 삶을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부딪치고, 꺾이고, 떨어지고, 망가진 곳에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고통은 인간에게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덕을 주는 것입니다. 고통은 또 다른 은혜입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그의 책에서 “고통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고통을 통한 영혼의 정화는 인내를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언제까지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밝은 면을, 그리고 저 미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주님 오시기까지 길이 참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