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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행 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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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행 26:1-29)


"벼슬도 싫다 마는 명예도 싫소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기심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라는 가사의 옛날 가요가 있습니다.
시골 촌부에 지나지 않는 신세로 살고 있다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내용처럼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삶에 지극히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부귀영화가 오히려 다 싫고 귀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은 벼슬아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세상의 권력자를 향하여 자기처럼 되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던 바울은 이제 로마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및 고관들이 앉아 있는 자리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선 자기를 "유대인이 송사하는 일"을 두고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되어 "다행히" 여긴다고 의례적인 인사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이란 것은 무슨 구차한 자기변호가 아니라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당당히 선포하는 전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도가 끝날 무렵에 이 일개 죄수에 불과한 바울은 당대의 최고 벼슬아치들을 향하여 "당신네들 모두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아주 이상한 말로 그 변명을 마쳤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에 정말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지금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죄수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당신들도 나처럼 사시오.'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여 왜 우리 모두가 '가든지 아니면 보내는 전도자'로서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향하여 '당신도 나처럼 기독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전도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전도자는 상대방도 자기처럼 '죄 용서함 받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11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선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 즉 자기가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으로 살던 때를 간증했습니다.
물론 그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랬던 대로 "하나님이 조상에게 약속"하셨으며 자기네들이 "간절히 얻기를 바라던" 것 즉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소망"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곧 '메시아 소망'이었고,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심하기 전의 바울은 다른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로 오셨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의 그 유대교적인 열정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핍박하는 일에 더욱 부채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라는 그의 고백대로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을 아주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 꼭 해야만 할 옳은 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기독교 박해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빠짐없이 다 했었습니다. 
신자들을 잡아 투옥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에 대하여 "가편 투표" 즉 찬성표를 던졌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형벌"을 주었습니다. 
또한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도록 강요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플리니라는 비시니아의 로마 총독이 황제에게 보고한 글에 보면 "진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상 앞에 분향하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것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관원들은 기독신자의 혐의를 받고 잡혀 온 사람일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기만 하면 놓아 주었었는데, 바울 역시 그와 똑같은 일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여전히 "격분하여" 즉 성에 차지 않아서 아예 "외국 성까지" 그들을 쫓아가는,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도시락까지 싸들고 따라가는 원정 박해'를 단행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기의 과거사를 스스로 들추어내고 있는 이유는, 그처럼 최악의 죄를 저지른 '죄인 중의 괴수'까지도 용서받게 되었음을 간증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와 성도를 박해한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극악한 죄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만큼 바로 그런 죄를 사함 받게 된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기독교에 대하여 저지를 수 있는 제일 악한 죄를 지은 나까지 이렇게 용서받게 되었으니 그 예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에서 "당신들도 나처럼 죄 용서받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전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죄 사함 받은 기쁨을 자신이 먼저 누릴 줄 모르고는 절대로 남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게 된 이 감격적인 체험 없이는 결코 다른 죄인을 향하여 '나처럼 되십시오.'라는 말이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 역시 과거에는 부끄러운 죄인이었을 뿐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전도하려 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이야말로 지난날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생활이란 오직 죄와 악으로만 가득 차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체험이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추악한 죄를 용서받은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부하고 높은 사람들도 조금도 부럽지 않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들 역시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직 죄 사함의 은총을 맛보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부귀영화만 즐기고 있는 자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면서 '당신도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함 받는 기쁨을 누리십시오.'라고 전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전도자는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쓰임 받는 새 생활'을 살게 되기를 진정 바라기 때문입니다. 

12절 이하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12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16일어나 네 씜 나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4우리가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 나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에게서 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계속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건에 대하여 간증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이것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앞에서 했던 간증들에는 없는 내용이 조금 더 자세히 첨부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회상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은 당시 헬라 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속담을 인용하신 것으로서, '나를 핍박하는 것은 너 자신을 스스로 상하게 하는 부질없는 짓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의 과거 생애란 그야말로 '가시가 돋친 채찍에다 스스로 발질길을 하는',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죽일 일을 사서 했던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리석기 짝이 없던 생애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로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 직후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 중에서 '선지자 아니니아를 찾아가라'고 하셨던 지시는 여기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16절로 18절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하셨던 말씀과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말씀(행 22:17-21)을 종합하여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일어나 네 발로 서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곧 그가 이제부터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건에 대하여 "증인"이 되며 이방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사환"으로 쓰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바울의 남은 생애는 그 한 가지 사명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이 지극히 고귀한 구령사업에 전적으로 바쳐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처럼 뒤바뀐 자신의 새 인생이 너무나도 보람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총독이나 분봉왕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인생 같은 것들은 적어도 그런 바울에게는 조금도 부러울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당신들도 나처럼 예수님의 증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도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직장생활이나 사업이 재미있고 보람되면 다른 친구에게도 같은 일을 해 보라고 추천할 마음이 절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부터가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죽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을 리가 없습니다.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기 생애를 다 바치는 사람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것은 정말 고귀하고 값진 일이니 함께 참여해 주십시오.'라고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불법적이고 악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기 자식에게만큼은 절대로 자기처럼 살지는 말라고 막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애를 정말 값지게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남은 생명의 시간을 조금도 후회할 것 없이 알차게 사용할 수 있게 될 때 그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전에는 '죄인 중의 괴수' 노릇만 하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사환'으로 살 수 있도록 부름 받은 신자는 바로 그런 보람과 행복 때문에 아직도 '이전의 자기처럼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간절히 충고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딴에는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실상은 죄에 매이고 사단과 마귀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볼 때마다 '당신도 어서 나처럼 예수님의 종이 되어 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보람된 새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진심으로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도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자랑'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9절로부터 23절에 사도 바울은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20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고 자신의 변명을 끝맺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는 전도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앞서 6절과 7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라고, 자신은 부활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간증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와서는 바로 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늘에서 보이신" 계시를 받은 후에 자기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마다 "선전"한 것, 즉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오직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가 전도하는 내용은 '이미 성경 말씀에서 예언된 것'이며 '오직 성경과 일치하는 것'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 예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23절에서 바울이 확신에 가득 차서 증거하고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심" 즉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 이 두 가지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약속'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성취하신 분이라고 증거했던 것이었습니다.

회심한 이후에 사도 바울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바로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그 성경 말씀을 믿었던 까닭에 그 말씀대로 공생애를 사시고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시고 또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확실히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지식, 이 믿음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알게 된 까닭에 이전에 자기가 알던 다른 모든 세상 지식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나게 되는 상대방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인품이 좋다 하더라도, 그 사람 역시 자기처럼 일단 '예수 그리스도부터 알고 믿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전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확신 때문에 바울은 자기를 '유대교의 배반자'라고 생각하면서 "잡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온갖 핍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오신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에만 일로매진했습니다.
그처럼 줄기차게 전도자의 길만 달려오던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까지" 즉 이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 서는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내 인격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이 사실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영적 지식'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감화감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해 주실 때에만 확실히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고 믿게 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영지(靈知) 작용'인 동시에 '성령께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먼저 들은 뉴스, 아직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으면 당장 말해 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진정한 기독신자라면 그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주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확실히 믿는 신자라면 그야말로 만나는 사람마다 이 놀랍고도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증거를 대라.'고 하는 불신자들을 향하여 "당신도 나처럼 성경 말씀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4절 이하 29절까지의 말씀에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처럼 맞이한 기회에 자기변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바울을 보고 베스도 총독은 "너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쳤구나."라고 비웃었습니다.
사실 맞기는 맞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뿐 아니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자는 사실상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론 베스도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바울을 '진짜 미친 사람'처럼 취급한 말이었고 바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고 있음을 확증해 주기 위하여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한다"라고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건은 아그립바 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로 "한편 구석에서 행하여진" 일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다 잘 알려진 객관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라는 말은, '당신도 선지자를 믿는 유대인이라면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없습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아그립바 왕 역시 그 말이 바로 자기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말인 줄은 알아들었기 때문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비꼬듯이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거부반응에 기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즉 '당신을 전도하는 데에 짧은 말로 되든지 긴 말이 필요하든지 간에' 어찌하든지 "당신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라고 더욱 당당하게 전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라는 말은 자신의 언변으로써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기원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결코 전도자의 재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늘 기억하고 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당신들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이것은 재판정에 피고의 위치에 선 사람이 재판장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며, 더욱이 평민이 로마 총독과 왕과 고관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못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원합니다."라고 정말 바랐습니다.
그것은 결코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실로 '참되고 정신 차린' 전도자가 진정으로 증거하며 뜨겁게 권한 말이던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은 기독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 누가 이런 진심으로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남 앞에서 표도 못내는 사람, 예수님을 진정 고맙게 영접하고 날마다 기쁘게 교제하면서 살지 못하고 그저 신앙생활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교인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전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의 심령 속에 '죄 용서받은 기쁨'이 감격적으로 넘치고 있습니까?
'주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 교회를 중심으로 남은 인생의 최고와 전부를 바치면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진정 보람되게 여겨지십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신자'라는 사실이 정말 자기라는 존재에 대한 최고의 자랑거리로 고백되고 있습니까?
  
오직 그런 신자만이 '하나님께서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진심으로 권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처럼 세상의 그 어떤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도 '당신도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런 기쁨과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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