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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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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롬 15:1-7)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하버드대학을 나와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윌슨행정부의 해군 차관보를 지낸 후 민주당 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39살 때 어린이들이 주로 걸리기에 소아마비라고 부르는 병에 걸려 대통령이 되는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소아마비에 걸려 7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루즈벨트가 정계에 복귀하기 전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때 그는 헬렌 켈러(Helen A. Keller)를 모델로 삼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는 시각장애자로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청각장애자로 소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언어장애자로 말까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비참한 삼중고를 격고 있었지만, 그녀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성공적 인생을 살아간 여성이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생각합니다. “나는 양다리가 마비된 것뿐이니 헬렌 켈러의 정신만 가지면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다” 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헬렌 켈러가 해냈다고 하면 나도 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을 살펴보면 주변에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성품과 인격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인생을 가르쳐주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격려해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바르게 세워주고, 격려하며, 좋은 의견을 주는 사람을 멘토(mentor)라고 부릅니다. 멘토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의 오디세우스 왕이 트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르치고 돌보아 달라고 맡긴 친구의 이름이 멘토입니다. 멘토는 왕자의 선생으로 친구처럼, 때로는 상담자로, 아들처럼 생각하고 돌보며 가르쳤습니다. 전쟁을 끝내고 왕이 돌아오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왕자는 훌륭한 왕으로 손색없이 자랐습니다. 왕이 돌아오며 보니 백성들이 풍요롭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존경을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들이 훌륭한 왕이 되기까지 친구 멘토가 잘 키워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멘토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이 되기 위해 우리도 멘토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멘토는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단에 드려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로 믿음이 강하다고 약한 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도리어 배려해야 한다고 교훈하였습니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옳다하더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본받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첫째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영국 여왕이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추장 여러 명을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지만 추장 한 사람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있던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하는데 여왕은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갑자기 손으로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모든 만찬객들도 할 수 없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추장들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일 여왕이 추장들에게 무례하다고 책망을 했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웃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줄 아는 모습이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모습입니다. 함께 지는 모습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의 ‘약점’ 은 ‘타 아스데네마타’ 인데 연약함을 뜻합니다. ‘담당한다’ 는 단어는 ‘바스타제인’으로 ‘무거운 것을 짊어지다’ 라는 뜻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신 분이며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분입니다. 넉넉하게 이해해주는 것이 바로 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고 슬픔을 대신 담당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다면 연약한 자의 약함을 도와주고 보완하라고 주셨습니다. 물질의 복을 받았다면 사치하고 낭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로 생명을 살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녀의 형통함을 주셨다면 그것은 자녀들을 통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사명입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약한 자를 담당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인내로 소망을 가져야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 목사의 친구는 어려서부터 산간지방에서 자라났기에 산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쉬운 것을 아는 그 사람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던 중 다행스럽게도 산속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인이 남겨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 사람들은 길을 찾아야 한다고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죽는 길이라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 된다오. 

위로 올라가 자기 위치를 발견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마을이 있는지 분명히 방향을 확인하고 내려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으로 급히 내려갈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위를 사모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해결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고난 중에도 위로 향하며 인내함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주님이 인내로써 거역한 자를 참으시고 기다리신 것처럼 인내로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여기의 ‘인내’ 는 ‘휘포모네’ 로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내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가 우리로 환난을 능히 견디는 소망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앞을 가려도 인내로 소망을 가l지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대개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때에 응답을 주시며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인내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인내하며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 뜻을 같이 해야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경계 문제로 장기간 분쟁을 계속했습니다. 급기야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1900년 부활절 아침 아르헨티나의 한 사제가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사이에 화해와 우정을 맺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강론했습니다. 그는 강론을 아르헨티나에서만 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칠레에 가서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그의 노력으로 두 나라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군함은 상선으로 개조되었으며 무기를 만들던 공장은 공업학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나라 국민 사이에 신뢰가 생겼습니다. 

대포를 녹여 예수상 (Christ the Redeemer of the Andes)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04년 3월 13일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전에는 적이었으나 두 나라 국민은 사랑을 교감하였습니다. 동상이 제막되고 태양이 질 무렵 양 국가의 국민들은 무릎을 끊고 기도했습니다. 동상 밑에 다음 같은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구주 예수의 발밑에서 끝까지 유지하기로 서약한 평화를 만약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깬다면 즉시 이 상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라.” 당시 모세나쟈라 사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들은 이 기념상을 세계에 봉헌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세계는 확실히 인류에게 미칠 평화에 관해서 큰 교훈을 배울 것입니다.” 그 후 90년의 세월이 흘렸으나 예수상은 지금도 여전히 무언의 설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서로 뜻을 같이 해야만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뜻을 같이 한다고 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도가 성도와 뜻이 같이 하는 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목회자와 성도들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뜻을 같이 하기를 원하셨고, 바울사도 역시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귀는 분열을 조장합니다. 말이 많아집니다. 삐치는 게 많아집니다. 상처를 받게 합니다. 죄의 사슬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성도들은 서로 뜻을 같이 하여 하나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일(doing)이 아니라 존재(being) 입니다. 우리의 직업보다 성품을 더 중요시 여기십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만족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신앙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안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만지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받아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부디 옛 습관을 끊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워도 인내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분열되지 아니하고 뜻을 같이하는 일에 서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날마다 본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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