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섬기며 살아가는 존재(2) (막 10:43-45)

첨부 1


섬기며 살아가는 존재(2) (막 10:43-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창조 때부터 의미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일할 때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김으로 삶의 의미를 얻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그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몫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책임있는 존재입니다. 사명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기여하는 존재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고 왔노라.”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이다음 주님이 성공했을 때 우리 형제를 주님 좌우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당부한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께 찾아와 이 다음 두 아들을 잘 돌봐달라고 청탁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노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뿐 아니고 직접 행동하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얹어 고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로 보면 아주 파격적인 발언이고 행동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생각이나 중심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에 예수님은 하고자 하시는 생각, 마음, 중심을 다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주 안에서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구원 그 이후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차별화된 삶이고 섬김의 삶이고 성결한 삶입니다. 

이 섬김의 삶은 성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강조하신 강조점의 중심도 이 섬김의 삶입니다. 10계명 가운데서 6가지 계명이 이웃을 섬기라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 섬김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법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법 중에 가장 많은 법은 섬김의 법입니다. 삶은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는 아주 숭고한 뜻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삶입니다.  그 섬김의 삶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뜻 이룸 

하나님 백성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는 삶이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후의 섬김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 섬김의 삶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삶입니다. 그 삶이 인간에게 부여된 본분입니다. 일반적인 섬김의 삶에도 향기가 있고 감동이 들어있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원봉사, 얼마나 신선하고 향기롭습니까. 

그런데 주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섬김의 삶에는 더 큰 영향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 놓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는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후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 섬김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함 

행복은 섬김의 삶에서, 나눔에서 주어집니다. 지난 설 때 많은 분들이 선물을 주셨습니다. 받으며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물 속에 마음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선물들을 다 모아 적절하게 나누어 이웃들에게 골고루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주니까 더 행복하였고 줄 것이 있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눌 때, 줄 때, 섬길 때 주어집니다. 그것이 역설의 행복입니다. 

우리 집 옆에 소방서가 하나 있습니다. TV를 보니까 소방서 직원들이 너무 수고를 많이 해서 지난 명절날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찾아 갔습니다. 당직 직원들이 설날에도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수고하냐, 과일 한 상자 사 왔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지 그 모습을 보니까 내가 더 행복했습니다. 조그만 것을 주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하였습니다. 더 잔잔한 행복은 줄 때 그리고 나눌 때 더 많이 주어집니다. 

조사에 의하면 여성의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섬김의 삶 즉 주는 삶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은 술과 담배와 업무에서 오는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운명적으로 생명이 짧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영국의 뉴 캐슬대학교 연구팀이 조사를 해 보니까 침팬지도, 바다사자도, 돌고래도, 심지어는 모기까지도 암컷이 수컷보다 장수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은 일생동안 끊임없이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 내 희생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여성은 번식을 위해서 세포가 남성보다 더 강력하고 스스로 치유하고 재생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창조의 원리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역할밖에 없기 때문에 생명이 짧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단순한 삶은 의미나 깊이나 길이가 짧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창조하고 번식하는 일의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혜를 입고 은혜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섬김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섬기는 삶에서 행복을, 건강을, 보람을, 장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게 되면 주려고 애를 씁니다. 섬기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행복감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미숙할 때는 얻을 때 행복해 하고 선물을 받을 때 행복해 하지만 사람이 성숙하게 되면 줌으로서 나눔으로서 행복해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연애를 하는데 연애는 뭔가를 줄 대상을 찾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찾게 되면 더 주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결혼할 때 보면 신랑이 색시를 감싸고 다닙니다. 그 모습이 보기에 참 좋습니다. 그것을 누가 시켜서 하겠습니까. 몇 달 후면 서로 원수가 되겠지만 그럴지라도 얼마나 행복한 모습입니까. 내가 보호자가 되므로 행복하고 누군가를 챙겨주고 돌보고 섬기고 나누며 행복해 하는 것 그것이 섬김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섬기려 왔노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일할 때, 섬길 때 기쁨을 얻습니다. 


위로  

위로받고 위로함은 모두 행복의 요소입니다. 사람은 위로받을 때 행복을 얻습니다. 그리고 위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로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선포하고 각종 병자들을 고치실 때 백성들은 한 가지 희망을 보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압제 때문에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나타나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그 시대를 향해 호령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고 한줄기 구원의 불빛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이 모두 기대를 걸고 예수께로 몰려온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위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그럴듯한 사람들도 외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자, 성자, 가난자, 병자 모두 그 수준에서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래 일본의 시바다 도요라는 99세 된 할머니가 처음으로 시집을 펴냈습니다. 그 시집의 제목이 “약해지지 마”입니다. 출판된 지 6개월 만에 70만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모두 위로와 격려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입니다.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리길래 안으로 들어오라 했지,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네, 나 말이야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면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외롭다고 느껴질 때 그걸 꺼내 힘을 내는 거야, 당신도 지금부터 저금해 봐 연금보다 나을테니까." 

시가 이런 식입니다. 1911년 부유한 집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10세 때 집이 망해서 어린 나이에 음식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20세 때 결혼을 했는데 곧 이혼당하고 33세에 재혼을 했는데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죽자 그 후 혼자서 살아왔는데 지금 99세입니다. 

처음에는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빨리 죽어야 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우연히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도 형식도 없이 마음 가는 그대로를 썼습니다. 그리고 시의 초점은 모두 위로와 격려에 맞추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 빨리 죽어야 해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 썼습니다. “나 말이야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어,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 사람들에게 격려 받으며 이제는 더 이상 우는 소리 하지 않아, 99세라도 사랑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고 싶은 걸." 이런 시로 시집을 냈는데 6개월 만에 70만부가 팔려나간 것입니다. 

이 현상을 보면서 오늘 현대인들의 공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일류국가입니다. 그런데 어느 무명의 할머니의 시로 인해서 일본 사람들이 모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류 속에 살고 있는 오늘 일본인들에게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또 오늘 일본인들은 외형으로는 그럴듯하게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모두 공허하고 위로받고 싶고 보듬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인들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공통점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의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모두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칭찬도 섬김의 삶입니다. 내 칭찬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젊은이도 어른도 모두 칭찬을 좋아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젊다“ ”예뻐졌다” 라는 칭찬의 말 한마디면 모든 여성들은 깜빡 죽습니다. 그 칭찬의 말한 마디는 보약보다 효과가 더 좋습니다. 

미용 제품을 판매하는 판매원이 다른 사원들이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판매실적 1위를 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어떻게 하길래 그럴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때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길래 판매를 잘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특별한 방법은 없구요, 나는 주로 방문판매를 하는데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주부들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밉니다, 그 얼굴이 40대건 50대건 불문하고 “‘아가씨 어머니 계세요’ 하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려 합니다. 칭찬도  이웃을 기쁘게 하는 섬김의 삶입니다. 

이 같은 섬김의 삶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삶의 원리입니다. 협동의 삶은 내가 살고 네가 사는 지혜의 삶입니다. 오늘 삶에 절대 필요한 것이 이 협동의 삶입니다. 오늘 구제역이 퍼져가는 것을 보면서 협동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됩니다. 

안동에 사는 세 사람이 베트남으로 골프 여행을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축산업자들로 구제역에 민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소독에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소독하자고 강조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감각했습니다. 설마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고 온 나라가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축을 살처분하면 보상을 받으니까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살처분 하는 어미 소가 되려면 3년을 키워야 그렇게 됩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사료를 먹이며 키워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2조원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런 이치로 들여다보면 앞으로 살처분한 300만 마리를 그 정도로 키우자면 3년이라는 시간과 3년 동안 먹여야 하는 사료 값만도 10조원이라는 돈이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10조원이면 한강다리 30개를 놓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미숙한 사회입니다. 협동심이 부족하고 섬김의 삶이 부족합니다. 

정현천의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책을 보면 2009년도 최초 미국 다트머스 대학 총장이 된 김용씨가 한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한국학생들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가난한 나라에 봉사하러 가려는 마음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그 아이들의 정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학생들은 지역사회나 후진국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부모들이 공부와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반대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쏟으며 끼리끼리 어울리는 인생관이 만들어진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에서 포용만이 살길이라고 지적합니다. 

포용은 차이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포용력은 결국 나의 존재를 오래 지속하는 일이고 협동의 세계를 이루는 삶입니다. 이 포용력이 없으면 마침내 도태되고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공룡은 지구상에서 이미 멸종했는데 곤충이나 포유류는 아직도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가 포용력 때문입니다. 초식 거대동물인 공룡은 식물에 돌려주는 것이 없이 마구 먹어 치우기만 해서 숲을 황폐화시켜 결국 자신의 소멸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은 몸에 꽃가루를 묻혀 공중에 날림으로서 식물들을 계속 번식 시켜나갑니다. 그리고 포유류는 속씨 있는 식물들만 골라 따 먹고 그 씨를 밷거나 배설하여 퍼트리므로 서로 주고 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함께 공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섬김의 삶은 결국 모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삶이 주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써 강조하신 것이 이 섬김의 삶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섬길 때 주어집니다. 사람은 내게 소명으로 주어진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섬길 때 거기서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스스로에게는 행복을 만들고 이 세상에는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섬김의 삶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요소이고 이 세상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고 이바지 하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