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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성의 인연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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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5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2장 46절~50절

설교제목 : 영성의 인연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2:46~50)】

 

  <혈연의 끈 : 그 장점과 단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혈연(血緣)의 끈은 세상의 어떤 인연보다 강력합니다. 피붙이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즉 죽기를 각오한 채 달려드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 인간의 본능적 정서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 긍적적인 기능을 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기능이란, 혈연의 정서가 고독한 인간의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격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인간의 운명,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 세상의 각박한 인심, 그저 제 몸 하나 돌보기에도 벅찬 삶의 현실 속에서 피붙이만큼 끈끈한 지원군은 없습니다. 피를 나눴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한 지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혈연의 긍정적 기능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이,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인연의 강도(强度)가 너무 강하면 문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인연이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한 인간의 도리나 세상의 이치를 넘어서 버린다면 그 혈연은 인간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인연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혈연의 부정적 기능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2:46~50)】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무렵에, 그의 피붙이들은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즉 확대된 피붙이들인 그의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피를 나눈 인연’의 정서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의 혈연공동체들은 예수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고, 놀라운 하느님의 사역에 대해서 비웃게 되었습니다. 혈연의 부정적 기능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단호한 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인가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하늘의 인연 : 영연(靈緣>

  예수께서 선포하신 인연은 곧 영성의 인연이었습니다. 육체의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인연들을 잘 아시지요? 피로 맺어진 혈연(血緣), 고향이 같다는 것에서 오는 지연(地緣),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학연(學緣), 요즘에는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교연(敎緣), 또 때로는 같은 군대를 졸업했다는 군연(軍緣) … 이런 것들이 육체의 인연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체의 인연들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영성의 인연을 제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인연은 일시적이고 허탈한 것이고, 또 진리의 섭리에서 이탈해 있는 것인데 반해 영성의 인연은 영원한 것이고 보람있는 것이고, 또 진리의 섭리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성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영성의 인연은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총이나 칼로, 핵무기나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연결시키고 있는 영성의 인연은 태초부터 세상 끝까지 영원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의 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연결되어 있는 영성의 인연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육체의 인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교연(敎緣), 군연(軍緣) 등등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육체의 인연들이란 아침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 곧 사라져 버릴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성의 인연은 다르죠. 영성의 인연은 영원한 것이고, 강력한 것이고, 따뜻한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인연은 육체의 인연이 아니라 영성의 인연인 것입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

  천도교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그렇지 아니하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다는 뜻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것은 긍정하는 것임을 이르는 말)이라는 말을 빌려서 제가 만들어 본 말이 있는데, 그것은 불연기연(不緣其緣)입니다. 즉 제 나름으로 풀어보자면, “육체의 인연들을 끊고 영성의 인연을 가꿔나가자, 혹은 육체의 인연들을 끊어야 영성의 인연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되겠지요.

  목회를 시작하면서, 아니 소위 영성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그나마 시원치 않았던 육체의 인연들을 다 끊어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성의 인연들’을 가꿔왔는데, 그 결실이 그다지 대단치는 않네요. 물론 현재 제가 가꾼 영성의 인연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과분하고 따뜻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상처도 많았고, 진전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영성의 인연인가 싶었는데, 결국 육체의 인연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지요! 물론 그런 서투른 농사에는 제 잘못도 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연기연(不緣其緣)의 메시지를 끝까지 품고 갈 예정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그 메시지의 결실이 미약하기만 하지만, 언젠가 육체의 인연을 넘어서는 영성의 인연들이 아름답게 꽃피울 날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영성의 인연’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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