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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 뿌리는 비유를 깊게 읽으면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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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3장 1절~9절

설교제목 : 씨 뿌리는 비유를 깊게 읽으면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다.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이르셨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 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1~9절)】

 

  <성경을 읽는 불편한 마음>

  이 성경을 읽는 마음은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구절이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다른 견해(異見)이나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데 유용하게 쓰여 왔고, 특히나 교회성장주의자들의 이념과 교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한심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서 제시된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서 비판이나 딴지 없이 ‘착한 마음’으로 그냥 수용해야 한다는 이념과, 그렇게 하느님의 진리를 빠르게 수용한 사람에게는 ‘폭발적 성장이나 이익’이 있다는 이념을, 이 성경구절이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이 성경을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의 해석에 대한 이야기>

  성경해석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성경의 모든 문자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즉자적(卽自的)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반대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 성경이란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선생(先生, 먼저 산 인생)들의 기록입니다. 그것은 토론이나 비판이 전혀 없어야 되는 ‘완결판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생각거리 혹은 고민거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고, 후생(後生)인 우리는 선생들의 거룩한 문서를 앞에 놓고 이런 저린 비평과 고민, 탐구와 논쟁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란 닫혀진 문서가 아니라 열려져 있어야 하는 문서인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으로 이 성경을 읽고자 합니다.

 

  <두 사람 이야기 :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이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데 필요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고건혁 씨(붕가붕가레코드 대표)라는 분이 신문에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 ‘회색, 성찰의 색깔’이었습니다. 그 글의 핵심적 이야기는, 어떤 생각이나 일, 이념이나 철학 등에 대해서 빠르게 판단해서 분명한 색깔을 쉽게 갖는 상황보다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나름대로 궁리해보는 사람, 즉 ‘회색분자’가 사실은 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추구하는 자이며, 그런 회색형 인간이 결국 그런 이념이나 사상, 철학에 대해서 더 오랫동안 충실한 수용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쉽고 빠르게 공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쉽고 빠르게 - 아무런 내면적 저항 없이 - 부담 없이 읽혀질 수 있는 말씀일까요?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했던 예수의 말씀은, 다른 생각이 우리 내면 가운데 일어나서 거부되기도 하고, 환란과 핍박의 상황이 오면 그 말씀이 자의반 타의 반으로 거절되기도 하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이익 때문에 간혹 무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 없이 순백색(純白色)이나 순적색(純赤色)으로 수용되는 것은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이러 저러한 점은 참 공감이 되는데, 이러저러한 점은 아무래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는 식의 회색(灰色)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오히려 신뢰가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동강의 비오리에서 보길도의 갯벌, 가을 억새, 인사동 골목길, 새만금 갯벌의 백합, 지리산 물봉선, 지렁이, 자전거, 논, 간이역, 비무장지대, 우리씨앗 앉은뱅이밀, 정자나무, 칡소, 맹꽁이’까지 1999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새나 돌, 지렁이’ 등에게 상을 주고 있는 신기하고 이상한(?) 환경단체. 거기 그대로 존재했지만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작은 생명체를 존경하자는 단체, 그 희한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하 ‘풀꽃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이재용 씨(사무국장) 이야기입니다.

  그분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해 이재용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가 ‘사용가치보다 존재가치가 우선 한다’라는 건데요, 사람도 학벌이나 능력, 집안 같은 것보다는 그 사람의 고유한 존재가치가 중요하잖아요. 간혹 “너희 뭐해?”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전 “어, 우리 존재해.” 하거든요. 이 자연세계에서 사람은 우월하다기보다는 각기 주어진 몫이 있고, 몫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데 존재가치가 있는 거죠. 큰 사업적 계획을 가진 건 특별히 없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일들을 어떻게 더 표현하고 펼쳐내느냐가 제일 중요한 일이고 계획입니다.】

  저는 이재용 씨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사용가치보다 존재가치’가 더 우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더 위대한 것은, 우리가 한 사람으로 그냥 존재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람이 능력이 있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유명하다거나 … 그런 사용가치보다는 그냥 그 사람이 존재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며, 위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이 땅에 뿌려져서 30배 60배 100배로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롭고 위대한 일은, 하느님의 진리로 성장한 나무 한 그루가 그 수명이 다하는 동안 이 땅에 뚝심 있게 서 있는 그 사실 자체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씨 뿌리는 비유를 깊게 읽으면’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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