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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삼하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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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씀이 내 혀에 (삼하 23:1-7)


(삼하23:1-7)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

1. 본문은 다윗이 인생을 마감하면서 평생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때들을 성령에 감동되어(The oracle) 기록한 신앙고백적 시(詩)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The oracle of David son of Jesse)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호칭은 사울 왕이 다윗을 비꼬아 말할 때 사용했었습니다. 사울 왕이 날로 치솟는 다윗의 인기와 지지도에 권력 승계에 위기를 느껴 다윗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믿음이 일맥상통하여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다윗을 사랑하는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삼상18:1-3) 뿐만 아니라 요나단은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자신은 그 다음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울 왕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 왕이 만찬을 베풀어 다윗을 죽이려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빼돌린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며 요나단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 사생아 같은 자식아, 네가 그 천한 이새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아이와 단짝이 되다니, 너에게나 너를 낳은 네 어머니에게 욕이 될 뿐이다.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를 끌어오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삼상20:30-31) 

이처럼 ‘이새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천하고 비천한 사람과 그 가문을 가리키는 호칭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상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이어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 자신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이새의 아들’을, 미천하기 그지없는 양치는 목동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높이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자랑할 만한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삼하 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22: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삼하22: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이새의 아들’로 부르시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그러므로 ‘이새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비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존경과 부러움, 한없는 영광과 명예, 그리고 약속하신 축복을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이름입니다. 이 호칭을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럽게 말씀하시며 예언하신 곳이 이사야 11:1-2입니다. 

(사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 말씀을 현대역으로 읽으면, “다윗 왕족의 혈통은 잘라진 나무처럼 끊어질 것이지만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오듯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이다. 여호와의 성령께서 그에게 자기 백성을 다스릴 지혜와 지식과 재능을 주실 것이며 그는 여호와의 뜻을 알고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길 것이며”입니다. 여기 ‘나무’는 감람나무(올리브)를 말합니다.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감람나무에는 ‘줄기에서 나온 가지’와 ‘뿌리에서 나온 가지’가 있습니다. 

‘줄기에서 나온 가지’는 히브리어로 ‘호테르’라고 합니다. 보통 줄기와의 접촉 부위가 두툼한데, 이는 ‘목자의 막대기’로 사용됩니다. 목자는 양 떼를 인도할 때 ‘호테르’를 던져서 방향을 알려줍니다. 또한 ‘호테르’는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목자는 ‘호테르’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사자나 곰 같은 맹수가 양떼를 공격하려고 달려들면 ‘호테르’로 맹수를 때려잡습니다. 목자가 ‘호테르’의 두툼한 쪽으로 맹수의 머리를 가격하면 맹수는 한방에 곧 나가떨어집니다. 

‘뿌리에서 나온 가지’는 ‘네쩨르’라고 합니다. ‘네쩨르’는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원을 그리며 자라는데, 한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라 줍니다. 남은 한 두 개의 ‘네쩨르’를 어린 묘목으로 사용하는데, 이를 ‘어린 감람나무’라고 부릅니다.(시128:3)‘네쩨르’는 어린 묘목을 위해 한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라서 ‘목자의 지팡이’로 사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풍습이었습니다. ‘네째르’는 지팡이로서 허리에 차는 ‘막대기’(호테르)보다 길었습니다. 

줄기에서 나온 ‘호테르’는 ‘양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목자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뿌리에서 나온 ‘네쩨르’는 ‘어린 묘목’, ‘어린 감람나무’로서 죽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다시 살아남은 유다지파 출신의 다윗 왕조, 곧 메시아 왕조를 상징합니다. 특히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인 메시야는 밑동이 잘릴지라도 불사조와 같이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다윗의 왕가에서 나실 예수님은 감람나무의 ‘네쩨르’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돌감람나무의?‘네쩨르’에, 다윗을 참감람나무의 ‘네쩨르’에 비유했습니다. 

사울은 밑둥이 잘리면 죽고 마는 돌감람나무의 ‘네쩨르’처럼 하나님이 한번 치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밑둥이 잘리면 더 왕성히 자라나는 감람나무의 ‘네쩨르’처럼 어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의 ‘네쩨르’는 어려움을 당해도 심판을 당해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메시야의 왕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역에서 “다윗 왕족의 혈통은 잘라진 나무처럼 끊어질 것이지만,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오듯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호수아 당시, 기브온 거민들이 여리고성을 단숨에 정복한 이스라엘이 두려워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죽이지만 말아 달라 부탁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의 영원한 종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성전에서 나무패며 물을 긷는 사람들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수9장) 

그런데 사울 왕이 날로 추락하는 지지도를 만회하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는 기브온 거민들을 학살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죄를 사울의 때에 심판하지 않고 다윗의 때에 심판했습니다. 다윗 왕 시대에 연거푸 내리 3년 동안 기근이 발생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 원인이 사울 왕의 기브온 사람 학살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하 21:1)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문제 해결을 위해 소원을 묻자 사울 왕가의 남은 자손 일곱을 처형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삼하21:1-14) 다윗 왕이 그들 소원대로 시행하자 비로소 기근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가는 비록 왕가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는 돌감람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서 사울은 돌감람나무의 ‘네쩨르’로 심판을 받으면 감당할 수 없지만, 다윗은 참감람나무의 ‘네쩨르’로 심판을 받아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의 때에 이 죄를 심판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뿌리에서 자라나신 감람나무의 ‘네쩨르’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받아도, 시련을 받아도 더 왕성하게 자라는 ‘참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감람나무는 밑둥이부터 잘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더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나셔서 ‘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가 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역사는 ‘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의 역사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감람나무의 ‘네쩨르’로서 불사조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다윗 왕의 계보에 든 ‘이새의 뿌리’에 나오는 ‘네쩨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1-17에서 ‘이새가 다윗 왕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왕을 낳았다’는 계보는 오직 ‘이새’ 뿐입니다. 

오직 이새가 낳은 다윗 왕의 계보에 드는 사람만이 영원한 왕이 계보를 잇기 때문입니다. 이 계보에 드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 죽어도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이새의 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죽어도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네쩨르’입니다. 이 ‘네쩨르’는 세상에서 비록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 앞에 유명한 자요, 죽은 자가 같으나 영원히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9-10)들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성도 여러분,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 말씀이 그 혀에 있도다.’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시는 존귀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항상 함께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윗 왕이 미천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높이 올리운 것은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신앙생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 는 뜻입니다.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령께서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항상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과 성령을 떠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범한 죄악을 지적받았을 때, 그는 즉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통회 자복하며 용서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편51:10-11을 보겠습니다. 

(시51:10-11)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소서.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여기서 다윗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은 자신의 ‘영’이지만, 더욱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새 영을 넣어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어 그분의 은총과 얼굴의 빛을 받지도 못하게 되는 일이 없게끔 하소서라는 간구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는 형벌만은 내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바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지명되었을 때, 그 즉시 다윗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의 인격적 자질을 지닐 수 있게끔 그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 상 16:13을 보겠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다윗은 바로 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심령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겔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나 그는 이 ‘성령’의 감동을 무시한 채,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극악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이 지적되었을 때, 제일 먼저 사울 왕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성령’을 빼앗기고 대신 악령이 들어가 그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울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6:14-15)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사울도 그가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성령’이 크게 임하여 ‘새 마음’을 주셔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사무엘 상10:6-9을 보겠습니다. 

(삼상10:6-9)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이러했던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어 버리자 비참한 말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은 ‘성령’이 떠나간 인생, ‘성령’을 빼앗긴 삶이란 하나님의 버림받는 것으로 얼마나 비참한 가를 직접 목격했던 터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 왕이 인생 말년에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고백은 그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을 때 부어주신 성령이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고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로 피신했습니다. 이곳은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4km 지점으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할 듯한 동굴이었습니다. 다윗의 도피 사실을 듣고 그 형들과 온 집안이 그 곳으로 내려가, 함께 했습니다. 사울의 보복이 온 가족들에게 미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울의 학정(虐政)으로 인해 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환난 당한 모든 자),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稅政) 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 등으로 인하여 주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빚진 자들), 사울 왕국의 비도덕성 또는 비종교성 등으로 인해 심적, 영적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던 사람들(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志士)들이 있었습니다.(5절;대상 12:1-18).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는,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당하기를 기뻐하여 이처럼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추종자가 많아짐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다윗은 보다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들의 피신처로 모압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다윗의 증조 할머니 룻이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에(룻 1:22),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룻 4:13-22; 마 1:5, 6) 또한 모압은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의 경쟁자인 다윗 자신을 후원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삼상14:47).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거기에서 모압 왕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실 때까지, 나의 부모가 이 곳으로 들어와 왕과 함께 머물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사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고히 믿고 하나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부모는 모압 왕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갓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그 땅에 머물러 있지 말고 속히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그 땅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곳은 기근이 너무 심히 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사라를 돌려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애굽 땅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불러내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벗어난 다윗에게 속히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당연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지켜야 했듯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도 어떠한 위험과 역경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곧 바로 하나님 명령하신대로 유다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사울의 추격이 두렵다 해도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고 한 것입니다. 시편 119:10-11을 보겠습니다.

(시119:10-11)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진리의 말씀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119: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더 소중하나이다.’는 고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파숫군이 아침을 간절히 기다림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사모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130:5-6)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3. 다윗의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고백이 다윗 왕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비천한 ‘이새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가장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1) 다윗은 왕으로서 대성공했습니다. 다윗은 그가 왕으로 통치하는 40년 동안 변변하지 못한 약소국가에 지나지 않는 이스라엘을 부강한 통일왕국으로 건설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주변 국가들을 모두 완벽하게 제압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조공을 바치는 나라를 조공을 받는 나라로 그 위상을 높였습니다. 다윗 왕을 통해 나라의 명성이 애굽에까지 떨치게 함으로 나라 민족의 한을 풀었습니다.(대상 18:1-2) 다윗 왕은 과연 전쟁에 능한 용장, 뛰어난 무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는 고백에 있습니다.

2) 다윗 왕은 ‘시와 노래’에도 월등한 재능을 가진 문인이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73편이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재능이 선천적인 재능이나 남모르게 갈고 닦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시편45:1에 말씀처럼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는 다윗의 재능은 모두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3) 다윗의 이러한 시와 노래의 재능은 영적인 힘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 말씀을 버린 연고로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령이 들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악신이 들자 광기를 부리며 발작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으나 그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게 되면 악신은 물러가고 광기를 잠재웠습니다.(삼상 16:23) 참으로 다윗은 문무를 고르게 갖춘 위대한 왕이요 위대한 시인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가장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력까지 갖춘 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과 축복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다윗은 뛰어난 영감(靈感)으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다스리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모든 통치 행위를 하나님 말씀에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의 신앙적 인격이 나라 백성을 정의롭게 통치하게 했던 것입니다.(렘 23:5;33: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대 모든 왕들을 판단하실 때, 다윗의 이러한 통치 행위를 그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왕하14: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왕하18: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왕하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시며,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의 죄를 바르게 정죄합니다. 세상의 악인들에 대한 그의 말씀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합니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십니다. 

(사11:3-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오늘 지금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게 되면,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메시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고통과 죄악과 부패의 온갖 어두운 흑암의 밤은 물러가고, 기쁨과 번영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추이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또한 “구름 없는 아침”은 온갖 근심과 염려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청명한 하늘처럼, 곧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기쁨과 번영의 아침을 맞이하는 나라와 백성이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징입니다.

(사44: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비는 초목의 생장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후에 내리쬐는 광선은 더욱 더 초목을 싱싱하게 자라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의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는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로 말미암아 “움이 돋는 새 풀” 같이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 왕은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날’을 사모하며 ‘그 날’이 속히 임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고 한 말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집(후손)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은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사무엘 하 7:8-16에 있는 언약을 말합니다. 

1) 다윗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 
2)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누리게 하리라. 
3)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8-16) 

이러한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신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에 어떠한 말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시기 원하십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는 은혜로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은”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음으로 ‘이새의 아들’ 다윗의 자손이 되신 성도 여러분도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고백이 성도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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