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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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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7-15)


이 시대는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합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거꾸로 되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짓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식품을 만들어 팔고, 노동을 착취하기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인신매매를 하기도 합니다. 이는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정작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하찮은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정상적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이 전도되고 도착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이야기를 하면 다 아는 것이라고 시시하게 여기니까, 비정상적인 이야기, 소위 엽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참으로 괴이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비정상적이 되어 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정상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처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이처럼 귀히 여기시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 존중의 귀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는 돈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정반대입니다. 

생명 경시의 사고방식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도적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마귀는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멸망 길로 미혹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영원히 멸망당할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복음을 믿을 때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영광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며, 질그릇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보배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지난날 우리는 지옥 백성으로서 비천했지만, 이제는 복음 때문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들의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복음이 보배인 이유는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배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값을 매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귀히 여기는 금은보석도 값으로 셈할 수 있고, 대가가 만든 예술품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이 영광의 복음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의 존재를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질그릇이란 진흙으로 그릇을 빚고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로 구운 그릇을 말합니다. 질그릇의 특색은 모양이 소박하고 작은 충격에도 잘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자기를 질그릇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존귀한 존재지만 동시에 연약한 존재입니다. 파스칼의 말과 같이, 인간을 없애는 데는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고, 한 번의 바람이나 한 방울의 물로 충분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환난을 당했으나 그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겨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그는 이 같이 간증합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가 당한 고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기의 능력으로 그 같은 고난을 감당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난관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인간 승리라고 칭송하고, 인간들이 이룩한 과학적인 성과를 자화자찬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성취에 도취되어서 마치 인간이 신이라도 된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힘은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함을 자랑할지라도 결국 병들고 늙고 죽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왕년에 박치기로 유명한 프로 레슬러 김일 선수를 보세요. 그의 박치기 한 방이면 아무리 강한 선수도 다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그는 박치기 후유증으로 생긴 뇌질환으로 인해서 20년이 넘도록 병고를 겪었습니다. 

최영의 씨는 가라데의 달인으로서 세계를 돌면서 당대 최고의 격투기 선수들과 겨루어 이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맨 손으로 무려 47마리의 황소의 뿔을 쳐서 부러뜨렸고, 그 중 네 마리는 즉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무인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72세에 폐암으로 별세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실은 언제 깨어질는지 알 수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암세포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나운서, 배우 등으로 일하였고, 70세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이어 재선되었습니다. 이 같은 이력을 보면 그가 참으로 강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퇴임 5년 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10년간 투병하다가 93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한 사람도 질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만 질그릇이 아니라 정신도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몸만 약한 것이 아니고 심령도 약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을 당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이 질그릇 같음을 실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신을 강한 자로 여기지 말고 질그릇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후에,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다니면서 우상숭배에 젖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라 숱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는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된 지경에서 어떻게 자기의 강함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홀로 들판에서 사자를 만난다면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고 겁에 질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귀중한 영적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였더니 큰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할 때마다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자기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했습니다. 

사도는 그가 숱한 난관을 이겨낸 것은 그의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신 결과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한 사도는 8절과 9절에서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말합니다.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가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에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보배인 복음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역설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 어려운 문제가 우리를 압박하고 도무지 피할 길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 사도는 고린도교회로 인해서 많은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고린도교인들이 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완고해 진다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고린도교회에 파송한 디도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 보면, 당시 사도 바울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면 몸도 편치 못한 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앓고 있던 안질이 도져서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이 사도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을 때, 그는 그 같은 시련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파악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큰 사망에서 건져주셨듯이 이후에라도 건져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은 사도 베드로를 삼중의 철문으로 된 감옥에 넣어서 지키되 잠잘 때에도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묶어 두었습니다. 안팎으로 파수꾼들을 세워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군병들과 감옥의 벽과 철문이 사방으로 사도를 에워싸였으나 그의 심령의 평안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밤에 사도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누워서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처형하려던 전날 밤에 주의 천사가 베드로를 구해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들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과 문제에 의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 가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바로가 변심하여 애굽의 마병과 병거들을 총동원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로잡기 위해 추격해 왔습니다. 앞은 넘실대는 바다요, 뒤는 적군입니다. 어디로 피할 데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백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망해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백성에게 이르기를 “13)…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고 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염려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해결책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또는 복음을 전할 때, 불신 세력으로부터 핍박이 다가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 같은 핍박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 있는 교회들이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월 14일, 국제선교단체인 '순교자의 소리‘가 북한 지하교회 교인 대여섯 명이 좁은 방에 앉아 희미한 손전등으로 성경을 비추면서 읽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그 단체가 밝힌 바에 의하면, 북한에는 지하교회 신자가 약 40만 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7만 명 이상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인인 것이 발각되어 공개처형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들에게서는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순교를 감당할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할 때 어떤 핍박에도 버린바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핍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회개하고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핍박하던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때로 패배할 때도 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둡니다.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23)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24)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고, 잠언 24장에 보니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16)고 했습니다.

마귀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을 거꾸러뜨리려고 여러 방법으로 시험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넘어지기도 하고, 믿음에 손상을 입고 힘들어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는 완전히 거꾸러져 망하는 법이 없으며 하나님을 힘입어 다시 일어섭니다.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듣기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체험을 통해서 확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이 없다는 말과 같이,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영광의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후서 2장에 이르기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고난이 영광이 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변합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교회들을 위해 당하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2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고린도교인들이 바른 믿음에 섬으로써 주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질그릇 같이 연약하지만,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보배 곧 복음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질그릇 같은 우리가 날마다 영적 승리를 경험하는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노라면 핍박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럴 때 질그릇 같은 나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님들의 삶속에 역사하셔서 능히 모든 일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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