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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신 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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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신 30:1-10)


신명기는 출애굽 제40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머무고 있을 때 광야의 신세대들을 대상으로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듣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고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오래도록 복을 받을 것이다’는 내용으로 요약이 됩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은 저주와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특별히 신명기 28장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과 불순종할 때 받을 저주에 대하여 대조적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잊지 말라.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양식으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기 살며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풍성하게 될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두렵다. 내 능력과 손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얻었다 할까 두렵다’고 경고합니다.

40년 광야여행을 함께 하며 자기 백성의 목이 곧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세는 그들의 장래를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얼마 못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것은 너희가 의롭거나 너희 마음이 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신 것이다.그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시기 위함이니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세가 앞서 예언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하나님을 잊고 배반하여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징계하여 각종 질병을 재앙으로 내리실 것이고, 이방 민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결국은 땅을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만민 중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신28장).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의 길이 있음 또한 알렸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날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1-3절)

오늘 본문의 주제는 ‘돌아옴’이며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명령입니다.‘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너희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처럼 너희를 기뻐하여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약속하십니다.‘돌아옴’은 앞으로 우리가 읽어나갈 여러 선지서들의 공통 주제가 됩니다.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간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게 하십니다. 심판에 앞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시며 돌아오라 부르셨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고 경고의 말씀도 무시하여 멸망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심이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땅에 오셨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도리어 그를 핍박하였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행7:52).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의 설교 중심 메시지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행3:19).‘돌아옴’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간절한 사랑 고백입니다.‘돌아옴’은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또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문화비평가이며 전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가 늦은 나이에 예수를 믿고 78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2년이 되었을 때 그의 회심기라고 할 수 있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통해 영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 실렸던 대담 내용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그에게 ''한 인간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물었을 때 "기독교의 목적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처럼 되어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 땅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생명의 떡,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그 길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돌이키는 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은 이후 네 가지 유형의 크리스천이 있음을 발견했답니다. 첫째, 발로 믿는 사람입니다.교회에 가면 제일 눈에 많이 띄는 부류인데,교회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많더랍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그들은 기도나 봉사에 언제나 열심을 냅니다. 마르다와 같은 유형인데이런 분들은 행위를 중시하는 교인들입니다.

다음으로는 가슴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른바 ''마리아 유형''입니다.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동하는 사람도 교회에 많습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그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할렐루야''와 ''아멘''을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머리로 믿는 사람입니다.그는 이 유형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발로 걸어보지도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거듭하는 사람입니다.물론 지성의 작용은 중요하지만 머리로만 믿을 경우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몸으로 믿는 사람입니다.발로만, 가슴으로만, 머리로만 믿어서는 부족하고 모든 것이 합쳐져 온전한 몸을 이뤄야 합니다."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온전한 신자라고 봅니다.예수님이 전형이시지요. (교회에 대한) 여러 부정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희망인 것은 이런 몸으로 믿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유형의 크리스천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세례 이후에 경험하고 있는 일들을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고 오히려 내 외적인 상황은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례 받고 나서 일일이 외부에 말 못할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남들은 나보고 ''이제 세례까지 받았으니 더 행복해 질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거꾸로 박해가 시작된 것 같았습니다.”문화 비평가로 평생 무언가를 비평하며 살아온 자신이 이제 거꾸로 비평을 받는 자리에 섰다는 고백입니다. 그의 회심과 세례를 축하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온갖 비난과 비웃음으로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은 세속적 의미의 평화를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오히려 자신의 해체를 기대했습니다."생각해보니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좁은 문 아닙니까? 그분이 가신 길은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예수님이 말하시는 행복과 성공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지 모릅니다.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진실로 그분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약속의 성취는 바로 내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 성취됩니다. 내일 성취되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입니다.''오늘 믿으면 내일 잘 된다''는 것은 자판기지 종교가 아닙니다. 자판기 같은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 일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습니다. 기승결(起承結)이 아닙니다.과학은 기승결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문학이나 문화, 종교는 기승전(起承轉)이 있어야 결(結)이 나옵니다. 반드시 그 프로세스 가운데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있고 바로 결과가 나오면 믿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행로에는 반드시 전(轉), 즉 전환이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지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결(結)로 갑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요."(이상 국민일보에서 발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돌아온 작은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가운데 시문학이나 소설에 사용되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 요청하여 모든 재물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아버지를 떠남,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기(起, introduction)에 해당한다면, 승(承, development)은 그 아들의 방탕생활과 실패의 부분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에서 마음껏 즐기며 자유를 누렸습니다. 가진 돈으로 허랑방탕하며 얼마 가지 못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붙여 살며 겨우 돼지 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어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돼지우리에서 처참한 신세가 되어 돼지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자신을 본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났고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가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죄를 깨닫고 돌아감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轉, turn)에 해당합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리 떨어졌음에 불구하고 멀리서 상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아들은 아버지께 제가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 하였지만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하고 이웃들과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뻔뻔하게 돌아온 동생이 싫었던 형은 극진히 환영하는 아버지의 처사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아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말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아버지의 환영과 용서가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방탕한 작은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죄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 즉 소설의 구조에서 ‘전(轉, turn)’의 과정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환영과 용서, 기쁨이라는 결과(結, conclusion)도 나오지 못하였을 겁니다.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 아버지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순간 이전에 행하였던 나의 모든 잘못이 아버지와 하늘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기억하고 깨달았으면 이제 돌아옴이 따라와야 합니다.

모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어 거기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때에 비로소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게 될겁니다. 모세는 말합니다.‘이 일이 네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그들이 남의 나라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거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이켜 너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너희를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며 너를 흩으셨던 모든 백성 중에서 다시 모으실 것이라. 쫓겨난 내 백성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너희를 모을 것이며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거기 살면서 너희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돌아옴과 돌아섬이 없이 현재의 삶, 나 중심의 삶,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지금의 방식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절대 편하고 재미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의 길입니다. 그 결과는 생명입니다.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과물이 없고 변화가 없는 것은 ‘돌아옴’ 이라는 전환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전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단절과 고립됨, 잃는 것이 두려워 돌아서지 못합니다.잃어야 얻고, 죽어야 사는데 그 결단이 어렵습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해체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존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예수가 구주로 믿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전환, 사고의 전환은 신앙생활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돌아섬이 없이 참 신앙은 불가능합니다.흔히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종교를 기독교로 바꾼 것이 하나님께 돌아옴은 아닙니다. 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던 삶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양으로 숨김없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었습니다.하늘 높이 있고 바다 밖에 있어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거기로 가서 가져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실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30장11절-20절에 하신 말씀처럼, ‘그 말씀은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네가 이것을 행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그를 가까이 하며 의지하고 따르라.그는 네 생명이시며 너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그 땅에서 너희가 오래도록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약속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생명을 얻을 것인지 그 결말은 분명합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잊고 그 말씀을 떠나 하나님보다 다른 신들을 더 사랑하다가 세상의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고민하며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살 길이며 복된 길입니다.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집을 나간 자식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십니다.아버지 집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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