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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주님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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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주님 (마 3:13-17)
   

지난주간에는 우리 총회 국내선교부에서 주최하는 기도학교 3차 과정, 영성지도 워크숍에 다녀왔습니다.  강사는 호남신학대학의 영성학교수이신 최승기 박사였고, 장신대 영성지도재가수도원 엠마오의 집 원장인 이원형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번 기도훈련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사탄의 미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권사님이, 오늘 예배당에 가서 한 시간 기도하겠다고 집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전화하자고 약속한 것이 생각이 나서, 먼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전화한다고 하였는데, 10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 기도하러 가는 중이야, 다음에 전화하자”고 끊었습니다.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도시가스를 켜놓고 나온 것 같아서, 집에 다시 들어가 보니 밸브는 제대로 잠겨 있었습니다.  공연히 시간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이 보이는 언덕에 이르렀는데, 날씨가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조금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 가서 두터운 스웨터를 꺼내보았습니다.   꺼내보니 별로 두터운 것도 아닌데, 어쨌든 집에 왔으니 갈아입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30분이 지나갔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려고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여, 기도가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하여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경읽고 있는데, 핸드폰에 전화가 울립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옛날 헤어진 동창으로 잊어버린 친구였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밖에 나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물리쳐야합니다.

저녁에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습니다.  

1) 감사입니다.  먼저 하루를 성찰하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선 하루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보다 구체적인 감사의 제목을 발견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이때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2)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바른 성찰을 위해 성령의 빛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도 나의 몸과 마음, 나의 삶과 생애를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역사하셔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밝은 조명을 구합니다. 

3) 성찰입니다.  성령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런 성찰을 통하여 내면의 흐름을 살펴봅니다.  아침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어려운 순간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참게 하셨습니다.  거친 말투가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나의 입술에 재갈을 먹여주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잘 나가다가 오후에 좋지 못한 언사로 그리스도인으로  품위를 잃어버린 것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없는 것은 아닌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를 외면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깊은 내면의 흐름을 성찰해야 합니다. 

4) 용서를 구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루 동안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며, 감사를 드리고 바르게 살지 못한 부분을 놓고 마음 아파하면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합니다.  

5) 결심입니다. 내일을 잘 준비하고 보다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은총을 구하며, 주의 기도로 마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영성지도 훈련한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으로 기도하고, 그 방법으로 지도를 받고, 또 지도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으로 기도하기’, ‘거룩한 독서’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초기시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함께 순수한 마음으로 읽고 그 말씀을 통하여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과 우정을 깊게 하고, 성도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독서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독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 읽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 만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으로 다가오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과 침묵을 적용해야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의 4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독서(렉시오 Lectio, Reading)  2) 묵상(메디타치오 Meditatio, Meditation)  3) 기도 (오라치오 Oratio, Prayer)  4) 관상, 말씀에 잠김(컨템플라치오 Contemplatio, contemplation)입니다.  관상이라고 하는 말이 어색하기에 ‘안식’, ‘말씀에 잠김’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네 단계가 있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묵상과 기도와 관상이 자연스럽게 넘나 들 수 있습니다. 

1.  독서

먼저 성경을 읽습니다.   읽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읽습니다.   먼저 성령님의 밝은 조명을 간구하면서 성령님이 말씀을 읽게 하시고, 성령님이 도움을 받지 않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 전 존재로 읽어야 합니다.  

어떤 본문을 선택했다면 여러 번 읽어야 합니다.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장을 넘기며, 눈으로는 그 본문을 보시고, 입으로는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습니다.  귀로는 그 말씀을 들으며, 그 모든 내용과 문맥을 통하여 말씀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의 기억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며 읽습니다.   여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부딪쳐 오는 것을 말합니다. 읽는 동안에 그 말씀, 그 단어, 그 사건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 때 그곳에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 이곳의 나에게 말씀하시는 똑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면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반복하여 깊이 읽다보면 관심이 집중되는 단어나 문맥이나 문장이 크게 보이고 큰 소리를 들려옵니다.  지금 하나님은 바로 그 본문을 가지고, 그 문장을 가지고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깊은 내면의 영혼에게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2.  묵상

묵상의 단계가 있습니다.   읽기를 통하여 성경 말씀을 깊이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오늘 받은 그 말씀, 그 단어, 그 문장, 그 본문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왜 내게 소중한 말씀으로 다가왔는지 되새김질 합니다.  말씀을 음미하면서 되씹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왜 나에게 부딪쳐왔는지,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은 누구신지, 어떤 심정으로 나에게 주시고 있는지 상상하면서, 주님 앞에서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그 말씀, 그 문맥, 본문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어떤 영상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에 해결되지 아니한 어떤 사건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아야 하는 사건, 아직도 해결되지 아니한 사건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은 후에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고, 말씀이 상황이 나의 상황과 만나면서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때에 주님,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무슨 뜻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묵상을 통하여 말씀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하여 우리 깊은 내면의 자신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3.  기도

이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기도를 정의할 때에 기도는 대화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우리가 들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요,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말씀을 읽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은 것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나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 나를 위해 간구하시고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주님 앞에 이제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아뢰어야 합니다. 마음의 감격과 감동을 가지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나에게 내어주셨고,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에게 말씀드리고, 다시 듣는 자세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다시 응답하면서 말씀드리고, 다시 말씀을 들으면, 다시 말씀을 드리며, 기도는 대화여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독백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기도하라고 하면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서 가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조금의 시간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그만 해야 합니다.


4. 관상(안식, 말씀 안에 잠기기)  

이것은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것은 말씀 안에 잠기는 순간이요 안식의 시간입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전 존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아멘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관상이라고 하였는데, 어감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면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쉴 때에는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어떤 추리도 다 쉬어야 합니다.   이제 상상의 기능이 멈추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 맡깁니다. 우리는 관상의 시간으로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우리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러한 안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제는 나의 차례가 되었다고 내어맡기게 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면서 결단하고, 전존재를 하나님께 기꺼이 내어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관상이라는 단계를 안식으로 번역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제 거룩한 독서의 기도는 종결되고 아름답게 끝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서 한동안 안식하며 쉼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합니다. 

저는 마태복음3:13-17절의 말씀을 가지고 거룩한 독서, 말씀으로 기도하기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정성스럽게 노트에 쓰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는가?  갈릴리에서부터 여리고 유대 광야의 요단강으로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와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습니까?  라고 질문하면서 읽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하면서 말렸습니다.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허락하라, 거절하시는데 왜 굳이 허락하라고 하시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습니까?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가 되어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시는데, 그 의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렇게 자꾸 반복하면서 말씀을 읽어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본문을 깊이 보면서, 예수님을 따라 세례요한에게 나아가고 세례를 받은 자리에 함께 들어가 봅니다.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예수님과 함께 지금 요단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당신 위에 임하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때, 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새”라는 말씀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지나치는 본문이었습니다.  물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저도 물에 잠겨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기고, 물에 푹 젖고 예수님과 함께 밖으로 올라옵니다.  지금 주님과 함께 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 주님은 왜 차가운 물에 들어가셔야 합니까?  물에 오래 잠기면 질식하게 되고, 물을 먹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습니까?  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코를 막아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온 몸이 물에 젖었습니다.  조금만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그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는 동안 그 순간에 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초등학생 때에 툼벙에 빠져서 물을 먹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아마 조금만 지났으면 완전히 죽었을 것입니다.  의식은 없고 물에 떠올라 있는 것을 삼촌이 발견하고는 툼벙에 들어와 건져 인공호흡을 하여 살려내고 따뜻한 언덕에 눕혀놓았습니다.  툼벙이란 논 옆에 샘물이 나오고 물을 가두어 놓은 아주 작은 저수지요, 좀 큰 연못이었습니다.  툼벙 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졌습니다. 물에 빠진 순간 아무리 무엇을 잡아도 미끄러지면서 잡을 수가 없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잡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데,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 저도 물속에 있었는데, 주님도 물속에 잠기셨습니다.   주님, 제가 그 물속에 있을 때에 주님,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순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홍모야 너와 함께 물속에 있었다.  그리고 너를 건져 물에서 올라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주님 저를 살리신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그 때 그 물에 버리실 수도 있었는데, 저를 살려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그 물 속에 계셨다는 말씀, 그리고 나를 건져 물에서 올라오셨다는 말씀에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살려주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것은 모든 죄인과 동일시하면서 죄인들을 다 끌어안으시고 그 죄를 씻기 위하여 주님이 대신 세례를 받은 것이요, 장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기도의 사귐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를 통하여 하시려는 일들, 저를 통하여 받으시려는 영광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죽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주님이 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말은 사치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이런 말도 사실 고급단어입니다.  우리는 죄로 응고된 죄의 뭉치요, 죄 덩어리입니다.  이 죄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예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아까운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제자되기 원합니다.” 날마다 고백해도, 모자라기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좋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요, 주님이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요,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과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존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혼자 내버려두시지 않고 함께 있어주시는 주님, 주님이 나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어디든지 가야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로 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목회 여정도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도 나 중심이 아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죽도록 충성할 뿐입니다. 

주님은 저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저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은 저의 사는 이유, 죽을 이유가 되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와 허물을 다 씻어주신 주님과 함께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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