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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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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10-12)  

 
이해인 수녀의 ‘가을노래’란 시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기도는 깊어가네’

아주 감미로운 시입니다.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모든 사람에게는 천국을 향한 그리움이 있는데 그 천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 대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천국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왜 핍박을 받습니까?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자기 잘못 때문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1) 자기 잘못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도 있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이럴 때 그것은 핍박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처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핍박이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나쁜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닌 것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① 우리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벧전 2: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이어서 벧전 4:15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행을 하거나,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처벌이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끔씩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집안 망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그 집안에 복덩어리가 들어오는 것인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답인즉, 예수 믿는다고 제삿날에도 안 오고,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에도 도대체 발걸음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태도가 더 현명할까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이니까 아예 발걸음을 딱 끊어버리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집안 어른들의 양해를 구하여 절을 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화목을 위하여 애쓰는 것이 좋을까요? 
후자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가족을 구원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찮기도 하고, 조상숭배는 우상숭배라는 신앙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발걸음을 딱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집안 어른들이 야단을 치지요? 
이것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롭지 못한 행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② 그리스도인이 집단적인 이기주의로 받는 비난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그린벨트 안에 기도원을 몰래 지었는데 발각되어 행정당국에 의해 철거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교인들이 산 위에 떼로 몰려가서 철야기도하면서 고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법을 지켜야지요! 
그리스도인의 이기주의로 반사회적이고 초법적인 행동 때문에 받는 비난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③ 맹신적이고, 미신적이고, 광신적인 신앙행위로 비난받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맹신적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미신적이란 바르고 옳은 삶보다는 복 받는 것에만 치우치는 믿음을 말합니다. 
광신적이란 미칠 정도로 지나치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테이프 설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가서 낮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한 아이가 바짓가랑이에다 오줌을 누어 흘러내리는 바지를 두 손으로 추켜올리면서 이 강단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아빠!” 하고 그 교회 담임목사한테 안기는데 목사님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랍니다. 

성경공부를 끝내고 그 교회 담임목사가 사정 얘기를 하는데 그 교회 사모님이 “나도 사명 받은 사람인데 집안에서 가정살림만 할 수 없다. 은혜 받고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고 밤낮 산 기도를 다닌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하소연 하더랍니다. 
광신적이지요! 
하나님께서 주부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가정천국을 이루라는 것인데 주부가 다른 일 때문에 가정을 팽개친다면 이미 엉터리이지요! 
이런 광신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핍박이라고 합니다.

마 5:11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타협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갈등도 충돌도 핍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분명히 거기에는 갈등과 출동과 핍박이 있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고기가 물의 흐름을 따라 헤엄쳐 갈 때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을 역류하여 헤엄쳐 갈 때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입니다! 

빛은 필경 어두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필경 부패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일러두었습니다. 
딤후 3: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성주 인터내셔날’을 운영하는 ‘김성주 집사’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세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을 하려면 세 가지를 해야 한답니다.

첫째는 술자리입니다. 
술을 안 먹으면 사업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얼마나 일반적인 일이면 ‘술상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돈 봉투입니다.
뇌물 없이는 사업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정직해서는 성공하지 못한 답니다.
그래서 분식회계를 하고, 이중장부를 만듭니다.
김성주 집사는 ‘나는 이런 식으로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1년 동안 철저하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여자가 사업을 한다고 웃기지 마라’ 여자라고 왕따 당하고, 뇌물 안 준다고 왕따 당하고, 술 안 먹는다고 왕따 당하고, 세금 정직히 내니까 ‘너 잘 났다.’고 왕따 당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렇게 왕따 당한 김성주 집사는 1년 뒤에 사업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렸습니다.
세상도 ‘진국’은 알아봅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제일 취업하고 싶은 기업이 되었습니다.

2. 그러면 왜 핍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이 됩니까?

1)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소유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만났을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렇지 않아 보입니까? 
교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을 다 주고픈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도 행복한데 주님을 사랑하기에 핍박을 받을 정도에 이른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P. Shaff) 서머나 교회의 목사님이셨던 폴리캅의 최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다. 신체의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한 신체의 일부분을 창끝으로 야수의 밥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화형을 당하기 직전에 ‘네가 만일 로마의 시저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이 박해를 끝내고 특별히 대우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다. ‘86년간 나에게 성실했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 분을 지금 이 나이에 부인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의 고백을 하고 순교당한 폴리캅 목사님이 불행했겠어요? 아니면 행복했겠어요? 
생명을 바쳐 그리스도를 사랑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2) 핍박은 거짓 성도와 참 성도를 구별합니다. 

핍박을 견디어 참 성도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입니다.
핍박은 참 성도와 거짓성도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봐야 알듯이 참 성도와 거짓성도는 핍박을 받아봐야 알게 됩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란 설교자는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자리)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자리)까지는 갈 수가 없다.’

목회를 해보면 처음 믿는 분들의 기도가 잘 응답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제 막 움 돋는 믿음의 새싹을 귀히 여겨서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심으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 같아요! 
시골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니까 목사가 하나님 반쯤 되는 줄 아는가 봐요. 
한번은 송아지가 감기 들었다고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겁니다. 

초신자가 상처받을까봐 ‘내가 목사지 수의사냐?’라고 얘기할 수 있나요! 
퀴퀴한 외양간에 들어가서 콧물이 흐르는 송아지 귀를 잡고 ‘주여!’ 기도하는데 옆에서 ‘믿습니다. 아멘!’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진짜 송아지의 감기가 나았어요. 
하나님께서 그 작은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초신자는 신이 납니다. 
“목사님, 이렇게 좋은걸 왜 진작 믿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때 쯤 그 믿음이 뿌리를 깊게 하기 위하여, 그 믿음의 줄기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시련의 바람이 슬쩍 붑니다. 
물질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건강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구별이 됩니다. 
한 단계 올라가지 못하고 주르르 미끄러지는 사람이 많아요!
팽개치는 사람이 많아요. 
기도도 팽개치고, 봉사도 팽개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핍박을 받아 참 성도로 인정받는다면 행복하겠지요.

3)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 1: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믿음의 시련은 성도의 인격을 금보다 귀하게 만듭니다. 
믿음의 시련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거룩한 인격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자존심과 혈기가 녹아지고, 욕망의 찌꺼기가 타버리고, 어리석음이 걸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양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을 연단시키고 성숙시키는 데에 고난과 시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지요! 
고난을 통하여 그 성품이 거룩해집니다.

4) 핍박은 주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우리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숭배를 강요했을 때 이를 거절하여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그때 왕을 풀무불에서 네 사람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 네 번째 존재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에 처한 것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 현장을 찾아오셨습니다. 
고난은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만일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평안했더라면, 어떻게 그들이 주님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고난이 없다고 약속하신 적은 한 번도 없으십니다. 
주님이 약속한 것은 고난 중에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제3의 세례라고 합니다. 
물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듯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듯이, 고난세례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 어두움과 충돌하듯이…. 
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행복합니까?
그들을 위하여 천국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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