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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사 5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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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사 51:17-23)


[깨어라, 깨어라. 일어나거라, 예루살렘아! 너, 주의 손에서 그 진노의 잔을 받아 마신 예루살렘아! 비틀거리게 하는 잔을, 네가 바닥까지 다 들이마셨다. 네가 낳은 모든 아들 가운데 너를 인도하여 줄 아들이 없을 것이며, 네가 기른 모든 아들 가운데 너의 손을 이끌어 줄 아들이 없을 것이다. 전쟁으로 땅은 황폐해지고 백성은 굶주려 죽었다. 이 두 가지 재난이 너에게 닥쳤으나, 누가 너를 두고 슬퍼하겠느냐? 폐허와 파괴, 기근과 칼뿐이니, 누가 너를 위로하겠느냐? 

너의 자녀들은, 주의 진노와 하나님의 책망을 하도 많이 받아서, 그물에 걸려 있는 영양처럼, 거리 모퉁이 모퉁이마다 쓰러져 있다. 고통받는 자야, 마치 포도주라도 마신 듯이 비틀거리는 자야, 이 말을 들어라. 너의 주, 그의 백성을 지키려고 싸우는 너의 하나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그 잔을 너를 괴롭힌 자들의 손에 쥐어 주겠다. 그들은, 바로 너에게 ‘엎드려라, 우리가 딛고 건너가겠다’ 하고 말한 자들이다. 그래서 너는 그들더러 밟고 지나가라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길을 만들고, 허리를 펴고 엎드려서 그들이 너의 등을 밟고 다니게 하였다.”]

• 위로조차 없는 땅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샬롬이 없는 세상인 줄 알면서도 샬롬의 인사를 건네는 것은 우리가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일꾼은 스스로 평화로워야 합니다. 눈을 감고 산다면 모를까 세상에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신문과 T.V와 인터넷과 전화가 없는 곳에 가서 한동안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현실은 우리 마음의 평화를 뒤흔들어놓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삶은 좋든 싫든 환경이나 조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 얽힘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환경이나 조건을 벗어버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평화 없는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 멀지만 반드시 가야만 할 길입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이집트로 번진 아랍 민주화의 불길은 지금 리비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철권통치를 해왔던 가다피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학살했습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자유, 그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거리로 달려 나가는 것일까요? 무릎이 바깥으로 접히는 까닭은 무릎을 꿇기 위해서이지만 때로는 솟구쳐 일어서기 위해서라지요? 순한 백성들은 마치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몸을 눕히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기도 합니다. 리비아의 민주화 항쟁이 더 이상의 피를 부르지 않고 평화로운 결말을 보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벨론 제국의 그늘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낙담하고 지친 백성들을 찾아와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격려하십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잊었다.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을 펴시고 땅을 세우신 주님을 잊었다. 압박자들이 너희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해서, 압박자들의 그 분노가 두려워서, 너희는 날마다 떨고 있다. 그러나 압박자들의 분노가 어디에 있느냐?”(사51:13)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백성들에게 포로생활을 청산할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고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만군의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내고 손 그늘 아래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전쟁으로 말미암아 땅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려 죽었습니다. 폐허와 파괴, 기근과 칼뿐이니 위로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포도주라도 마신 듯 비틀거립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백성들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이 이제 바닥까지 비워졌다고 말합니다. 

• 압제를 물리치시는 하나님

현실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다른 곳에서 옵니다. 인간의 희망이 끝난 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키려고 싸워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4: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창18:20)며 직접 울부짖음의 현장에 내려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자라는 동안에 늘 그 아이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습니다(창21:17, 20).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출3:7)고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바로 이런 소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부르짖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사크(sa'aq)는 아이들이 다쳤을 때 내는 ‘아야’ 소리 같은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입니다. 그런데 ‘사크’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 울부짖음, 비명 소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는 촉매입니다. 땅에서 부르짖는 이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강자들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들, 가난하다고 멸시 당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무시당하고, 뒤를 봐 줄 사람이 없다고 외면당하는 사람들…. 세상은 마치 그런 이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투명인간처럼 취급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시고, 그들을 압제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서의 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과 부활사건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빌어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마리아는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1:51-53) 

하나님은 땅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북돋우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북돋우다’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북’은 식물의 뿌리를 에워싸고 있는 흙을 일컫는 말인데, 북돋는다는 말은 호미로 흙을 끌어올려 뿌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북돋워주십니다. 삶의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힘은 세상에 없습니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릴 수는 있지만, 해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 진노의 잔

그러나 구름의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우리는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도처에서 ‘일어나소서’라는 탄원을 듣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시3:7a)
“주님, 일어나셔서 진노하시고, 내 대적들의 야만을 꺾어 주십시오.”(시7:6a)
“주님, 일어나십시오. 사람이 주께 맞서지 못하게 하십시오. 주께서 저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십시오. 주님,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며, 자신들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하여 주십시오.”(시9:19-20)

이런 사람들의 탄식에 대해 하나님은 오히려 “깨어라, 깨어라, 일어나거라, 예루살렘아!”(사51:17a) 하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은 이제 그 무기력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비틀거리게 하는 진노의 잔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 있는 베드자다(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삼십팔 년이나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요5:8). 

성경은 이 말씀이 떨어지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고 전합니다. 참 간단합니다. 삼십팔 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다니요? 저는 기적을 행하는 자인 예수님에게 놀라기보다는 그 말씀에 따라 몸을 일으킨 그 환자에게 감동합니다. 숙명을 거역하는 그 일어섬에 화들짝 놀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어나라는 명령을 듣고도 일어서지 않습니다. 봄이 이미 왔는데도 겨울옷을 벗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시절 진리에 목말랐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수도자들의 땅인 아토스 산에 40일을 머물렀습니다. 순례를 끝내고 성탄절 전야에 다프니로 돌아갔을 때 그는 예기치 못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도 초라하고 작은 어느 과수원에 있던 아몬드나무에 꽃이 피었던 것입니다. 그의 친구인 앙겔로스는 그 기적을 짧은 시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아몬드나무에게 말했노라.
‘누이여, 신의 얘기를 해다오.’
아몬드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1>, 열린책들, 320쪽)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도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뜻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랍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평화롭던 어느 마을에 도망자 한 사람이 숨어 들어왔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숨겨주었습니다. 곧 이어 들이닥친 군인들이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도망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을 수상쩍게 여긴 군인들은 내일 아침까지 도망자를 넘겨주지 않으면 마을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주민들은 랍비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걱정거리를 떠맡은 랍비는 답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여기저기 들춰보았습니다.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막 해가 떠오를 무렵 그의 눈에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18:14)는 가야바의 말이었습니다. 랍비는 그것이 답이라고 확신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마침내 군인들이 와서 도망자를 잡아갔습니다. 주민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왠지 마음이 심란해 집에서 성경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더니 무엇 때문에 그리 고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자기가 도망자를 넘겨준 것이 잘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가 메시야라는 걸 몰랐소?” 랍비는 미심쩍어 하며 물었습니다.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천사가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젊은이를 찾아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더라면 그가 바로 메시야임을 알아보았을 것이오.”(Richard Rohr, <>, 17-18)

마을의 안전을 위해 랍비는 무고한 사람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참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 랍비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 예수가 마신 잔

주님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제단 위에 남을 희생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세상의 폭력과 미움을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도 그 쓴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마26:39b)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의 잔, 진노의 잔을 누군들 마시고 싶겠습니까? 저는 예수님도 평범한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침묵에 잠기고, 나뭇잎을 뒤채게 하는 바람에 마음이 설레고, 정겨운 이들과 차를 나누며 담소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흐뭇해하는 그런 행복 말입니다. 하지만 평화 없는 세상이었기에 주님은 세상의 모든 폭력과 증오와 죄를 당신의 몸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없애려 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국의 그늘 아래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희망을 북돋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엎드리게 한 후 밟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고난의 쓴 잔을 넘겨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또 한 번 뒤집고 계십니다. 고난의 잔 돌리기는 누군가에게서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그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자신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에 주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3.1절이 다가옵니다. 벌써 92주년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났던 이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겨울추위가 아무리 혹독해도 봄은 오게 마련입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봄을 앞당기는 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압제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혼에 지핀 사람들, 성령 충만한 사람들, 바로 그들이 세상에 봄소식을 알리는 제비들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이 땅에, 그리고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여러 나라에, 그리고 온 땅에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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