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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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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14절-23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환난에 대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환난, 성도로서의 환난은, 일반사람들의 주식은 음식, 먹는 것이고, 성도들의 주식은 영의 말씀인데 성도가 이 영의 말씀을 어떤 이유로 건 먹을 수 없는 것이 환난이다.


성도라면 항상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옳음을 찾아라. 그러면 눈이 열린다. 성도의 환난이란 영의 말씀을 먹을 수 없고 찾을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것. 개인적으로는 진리말씀이 있기는 있는데 자기가 몸이 아파서 받을 수도 없고 받으러 갈 수도 없는 것. 이건 개인적인 환난이다.


성도로서 육의 양식은 하루 이틀 굶을 수 있지만 성도의 주식인 영의 양식을 안 먹으면 그만큼 영인성장 면에서 힘이 없다. 그렇게 되면 육의 생각이 힘을 써서 자기를 사망 길로 몰고 간다. 100% 시험에 들게 돼 있다.


그래서 인간 자기는 하나님을 알고 공경하는 게 절대다. 우상 귀신은 안 섬겨도 된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면 안 된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기 존재가치는 그만큼 없어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간으로 만든 자기의 존재목적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 건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시간이 있으면 믿고 없으면 안 믿고는 안 된다. 절대적인 목적을 붙잡아야 한다.


성도의 환난이라는 면에서 이 면을 발견을 못하게 했거나, 온 교회가 육신적으로 세상 목적적으로 돌아가거나, 인도자가 옳은 걸 못 주면 교회 자기는 환난에 접어든 것이다. 육신적으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환난이다.


영, 진리는 실상이요, 사건은 현상이다. 불신자들의 환난은 이면을 모르고 잘 먹고 잘 살면 평화요 행복이요 부흥이요 발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환난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거꾸로 된 거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기가 어느 쪽으로 환난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시험에 들게도 돼 있고 안 들게도 돼 있다. 이 사람은 성령님의 감화성의 사람이고, 이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100% 넘어가게 되는 거다. 무슨 사건이 오면 그걸 이길 수도 있고 넘어질 사람으로 돼 있기도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는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환난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걸 못 보면 성경해석을 못하게 된다. 볼 줄을 알면 성경해석이 나오는 거다. 원리원칙 즉, 절대적인 것을 알면 모든 성경이 풀린다. 안 풀리는 것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마다의 깨달음이나 앎에 차등이 있어서 그 나름대로 된 것이 오늘날 현실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자기다.


일반적으로 보면 학교 배움의 터에서 선생의 실력이 학생들의 실력을 좌우한다. 유능한 선생을 만나면 학생들의 실력이 많이 올라간다. 교회적으로도 보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못 만나면 불행이다.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병고치고’ 하는 건 불행이다. 그런 경우 육신은 어느 정도 사람으로서 고칠 수 있는 게 허용이 돼 있으나 영적인 면에서는 못 고친다. 안 된다. 그 범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따지면 ‘자기가 어느 정도의 성장성을 가졌는지’ 하는 그 면이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 면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 속에 살게 해서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게 해서 연관관계성으로 깨닫게 해서 알게 하는 거다. 성경에서 이걸 이치로 바로 가르쳐 줘야 한다.


이건 없이 물질적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온전은 없는 거다. 이러면 예수 믿다가 부자가 되면 믿음 좋다고 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보고 ‘다 팔고 날 따르라’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부자만 되려고 하니 어떻게 부자청년이 해석이 바로 되겠느냐?


이건 우리보고 ‘부자로 살아라. 가난하게 살아라’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제일 첫째, 먼저, 으뜸적으로 네가 어디에’ 이게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나마 순서도 없는 거고, 세상 속화된 교회는 물질이 우선적으로 들어있다.


이건 마귀의 시험에 100% 빠진 거다. 이건 하나님의 온전은 안 된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수천 수백만 명이 모여도 하나님의 온전은 없다. 너도 온전 나도 온전, 개별적으로 온전이면서 전체적 온전으로 자라나야 하는 게 지상교회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거다. 그렇게 살다가 부르면 가는 거고.


세상 이방인들은 물질이 어려워지면 환난이라고 한다. 지진 해일 전쟁 등이 일어나면 물질적으로 먹을 수 없게 되고 병이 퍼지고 죽게 되니 이런 걸 환난이라고 한다. 이건 다 눈으로 보이는 거고 누구나 다 아는 거다. 이건 일반적인 환난이다. 그러니 물질만 풍부하면 환난인 줄을 모른다. 그런데 성도는 영적 환난에 대해 이해타산적으로 먼저 들어가는 거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육신보다는 마음 정신이다. 사람이 아무리 건강해도 정신이 돌면 뭘 하겠느냐? 몸이 좀 불편해도 정신이 바로 들어가면 다 한다. 성도로서 일반사람들이 보는 이런 차원의 눈을 가지고 보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눈, 성령님이 보시는 눈, 주님이 보시는 눈을 자기가 가지고 사람을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신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누가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냐?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령한 분이시고 우리를 만드신 실상적 존재이시니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관계성으로 하는 말이고, 그리고 진리로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에서 표현적으로 쓰는 용어인 ‘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빌려서 인간이 알아듣도록 표현을 하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아버지’라고 할 때 이건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겠고, 그리고 ‘양육자,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이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게 있는 거다. 이건 관계성적인 면에서의 말이다. 가령 자기 아버지가 학교선생일 때 아버지가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선생님’이라고 할 때는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그 아버지가 집에 오면 ‘아버지’라고 한다. 용어는 달라도 그러나 사람은 같다. 관계성적인 면에서 다른 표현이 되는 거다.


하나님은 인격자로서 영원히 신령한 분이신데,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시간에 속하는 것, 물질에 속하는 것,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하나님 자리에 세워놓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표현으로 말하자면 시기 질투를 하신다.


그런데 멸망의 가증한 것을 역사적으로는 에티파네스가 돼지를 성전의 번제단에 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도 개인적으로 볼 때 기도로 물질을 올려놓은 것은 그 물질이 하나님 자리에 앉은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짓는 것을 목표로 세워서 교인들의 총 정신이 그것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것도 가증한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모형제 처와 자식 간의 인인관계에서 물질이 끼어있으면 이건 가증한 것이다. 이건 사람을 뒤로 하고 물질 이해타산부터 먼저 따지는 사상이다. 이렇게 되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물질 때문이다.


이처럼 가증한 것을 하나님처럼 세워놓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자로서 그걸 치워버리면 꼼짝을 못하는 거다. 자식을 ‘세상에서 제일’ 하고 세워놓으면 그건 우상이다. 이건 구약성경의 산 자식을 몰렉에게 드려서 불에 태워 죽이는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 때문에 돈 벌고 일하고 공부하는 거다. 일반적으로라도 사람을 위한 중심으로 들어가 있으면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그런데 일반세상은 그렇지를 않고 사람보다도 물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탐을 낸다.


물질성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 가견적인 것, 시간 속에 속하는 것, 썩는 것, 불에 타는 것, 변질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쳐버리면 끝난다. 자기가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일반 자연은총으로 사는 거고, 진리말씀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특수은총으로 사는 거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이 선 것을 보거든.’ 부모자리에 돈이 턱 서 있으면 부모를 죽이게 된다. 돈이 기준으로 서 있으니 사람은 눈에 안 보인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는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유대는 관할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관할, 그 관할에서 통치를 받으면서 그게 보이거들랑 도의 봉우리로, 말씀의 봉우리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이 도피성으로 도망을 간다. 도망을 가야 산다. 그런데 억지로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여 놓고 ‘거기 가면 산다’ 하고 도피성으로 도망을 가면 하나님은 그를 가만 안 두고 끄집어내서 찾아서 죽인다. 도피성은 은연중에 실수로 죽인 자들을 보호를 하는 거다.


‘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에’란 ‘배우고 듣고 하며 신앙인격 면이 성장하는 동안’을 말하는 거다. 제사장과 같이 있으면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게 있고 자라고 한다. 제사장과 같이 있다면 담배 피는 걸 배우겠느냐, 술 먹는 것을 배우겠느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지붕 위는 집 꼭대기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의식주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위에, 집을 통치하는 그 위에 즉, 살림살이에 목적이 아닌 그 가정을 잘 다스리는 인격의 차원 높은 가장자리를 말한다.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가지도 말고.’ 그것에 대한 보호혜택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멸망의 가증한 것, 즉 안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히 교회적으로 전부가 물질이 하나님 자리에 들어가게 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급하다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나서 워낙 급하면 장롱 속의 것을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밭에 있는 자는.’ 밭에 있는 자는 일을 하는 자다. 일을 하게 되면 소출을 낸다.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 이건 일을 안 하겠다는 신호다. 뒤로 간다는 것은 물질을 가지러 가는 것.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밭에서 일을 하는 자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도 세상 것에 대한 마음으로 보는 것은 뒤쪽으로 보는 거다. 성경을 볼 때는 앞으로 나가려는 것이고, 하나님 쪽으로 가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는 생명의 보화 진리가 다 들어있다. 그 마음 정신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가지고 자기 밭을 갈고 돌도 걷어내면 그 자는 옥토가 된다. 이게 밭에서 일을 하는 자이다.


‘뒤로 돌이키지 말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이걸 육신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아이 밴 자에게 화가 있다는 걸 보니 배지 말았어야 할 죄악적인 것, 비진리적인 것,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그 마음에 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학을 하는 자에게 이게 많이 있고, 신학교 교수들은 세상적인 목적의 젖을 먹이고 그 사상을 배게 하는 게 많다. 이건 화가 있다. 안에 들어있는 소원 목적을 말하는 거다.


부모님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도 세상 소원 목적을 품게 해서 가르치면 그 자녀 속에서 그게 자라면서 그게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러면 믿음 다 팔아먹고 사람을 사람만큼 모르게 된다. 사람이 인격이 온전한 성품으로 자란 후에 돈이던 뭐든 다 적지적소에 관계성적으로 바로 쓸 수가 있는 거지 인격적 성품적으로 바로 못된 자는 돈이 많으면 그 돈을 가지고 죄를 짓게 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화나 재앙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일 재앙이 겨울에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6. 25 전쟁이 겨울에 났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아마도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 얼어 죽는 자가 더 많을 것이다. 사건도 힘이 드는데 날씨마저 안 좋다면 그건 하나님의 마음을 말하는 거다.


인격을 가진 세계에서는 괘씸죄라는 게 있는 것이다. 재판장도 ‘여러 정황을 볼 때  이건 몇 년을 때려야 하겠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죄인의 말을 들고서 괘씸죄가 들어가면 죄가 더 커지는 거다. 우리도 하나님이 마음을 그렇게 해 놓으면 인간 자기가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영적 전쟁도 육적 전쟁도 하나님께 속한 거다. 재판도 다 하나님께 속한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로 해야 하는 건지’ 이게 있는 거다. 설교도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재판을 하는 거다. 설교를 통해 흑백을 나누고, 임시성과 영원을 나누고, 하나님의 의사와 세상 생각을 나누는 구별 분별력이 들어있는 거다. 이게 재판의 성격이다.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러니까 마지막이 된다. 시간적으로 보면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 거고,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인생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시간적 시대적으로는 교회의 전체성적인 면이 들어있고, 개인적으로는 딴 사람은 안 그런데 자기 개인이 하나님 앞에 형벌의 대상으로 드는 것이다. 이건 전무후무한 것이다.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것이다. 이런 면을 생각을 해 보면 된다.


그런데 20절에 ‘만일 주께서 그 날들 감하지 않았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하셨는데 이건 개인적으로도 볼 수 있고 시대적으로도 볼 수 있다.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 했는데 이게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믿는 사람이 육체로 살기 때문이냐, 영으로 살기 때문이냐? 그러면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 구원을 얻게 하려니까 그 날을 줄인다는 말로 들린다. ‘너를 구원을 얻게 하려니 너에게 속한 그 날을 줄인다’ 이 말이다. ‘이만큼 살 건데 이만큼을 줄여야 되겠다’ 그 말이다. 더 썩기 전에 도려내야만 되는 것. 그대로 두면 다 썩고 목숨까지 위험하다. 그런 경우 수술을 해서 장기를 잘라낸다. 발이 못에 찔려서 파상풍이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자르고 한다. 안 자르면 목숨이 죽는다. 감염이 되면 다 죽는다. 그래서 감염이 안 된 것을 살리려고 감염이 된 것은 죽인다.


닭이 감기에 들리면 다 죽인다. 아깝지만 아직 걸리지 않은 닭도 다 죽인다. 그런 것처럼 그대로 두면 다른 사람을 자꾸 해코자 하니 더 이상 둘 수가 없어서 잡아서 죽여야 하는 것도 있다. 이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 심판의 길을 가는 교회들은 세상에 깔려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활동을 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단일성과는 전혀 반대다. 반대되는 이 신앙은 자기 개인적 신념적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들어와서 자기 것과 하나님의 것을 비교해서 자기 것은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절대 옳은 것으로 자기 자체화 인격화 시켜야 하는 건데 이건 없고 하나의 종교인으로서 자기가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 앞에 몸 바쳐 하는 건 신념적 신앙이다.


이 신념적 신앙은 객관의 것 즉, 하나님의 것이 자기 것으로 안 된 데서 나오는 인간 자기의 주관적 신념적 신앙이다. 이 신앙이 많이 있다. 그리고 무조건 믿는다는 건 신뢰적 신앙인데, 이건 맹종이다. 그런데 신념이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니 그 분의 것이 좋아서 내가 그 분의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신념은 옳은 거다.


그 다음에 신뢰적 신앙이 있는데 그 분이 나에게 다 좋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나가는 신앙이다.


신앙이라고 할 때 글자 용어는 같아도 그 용어를 쓰는 사람의 안에서 느낌에 따라서 객관일 수도 있고 주관일 수도 있다. 이건 다른 거다. 하나님의 본질을 잡고 나가는 신의적 신앙이 아닌 세상 사상적 물질적 신앙인 이런 비진리적 신앙들이 직접 간접으로 천국복음, 예수님의 일에 즉,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면에서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룰구원으로 나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본질에 적중성의 신앙인데 오늘날 기독교가 그게 아니라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하며 세상위주로 기독교 문화예술이나 안 믿는 사람들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반적 사상으로 나가고 있다. 이방종교도 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온전이 없는 것은 다 인간기준으로 떨어지는 거다. 이건 하나님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해석적으로 들어간다면 예수 믿으면서 일반재간을 달란트라고 하며 그 일반재간을 교회에서 써먹으라고 하니 교회가 자동적으로 콩쿨대회장이 되는 거다.


일반적인 정신과 사상으로는 하나님을 못 섬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섬기는 거다. 사람이 성질 성격 성분적으로 거룩성을 입지 못한 채 ‘내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면 그건 안 되는 거다.


우리가 구약에서 보면 시내산 가까이에 짐승이나 일반백성들이 근접할 수 있느냐? 가까이 가면 죽는 거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거다.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가 아니라 그 속의 질이 그런 거다.


모세도 사람이고 일반백성들도 다 사람인데 왜 모세는 올라가고 일반백성은 못 올라가느냐? 사람 속의 질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으로 이 사상을 가지고 보면 육에 속한 정신 사상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와지는 거냐? 그건 안 된다. 왜냐?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은 영 위주로 나가는 고로 육 위주로 나가는 사상은 다 죽여 버린다.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세상 끝은 하나님 당신이 정하는 거다. 때가 다 되면 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으니 죽여서라도 더 이상 자기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한다 그 말이다. 성경에 ‘육신은 멸하고 영은 살리려 함이로다’ 라고 했다. 영적인 면에서 영인성장 면을 살리기 위해서 육신을 고통으로 넣는다. 그게 삭감을 시키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정신의 물을 빼고 데리고 가는 거다.


농사짓는 사람은 타작이 꼭 필요하다. 사람의 손으로 하던 기계로 하던 모든 곡식은 타작을 한다. 잘 여문 콩은 스스로 껍데기를 까고 나온다. 그런데 제 때 안 익고 덜 익은 콩알은 햇빛에 말리고 도리깨로 타작을 해야 나온다. 얻어맞고 나온다. 그 중에도 눈치 빠른 놈은 햇빛을 받으면 스스로 튀면서 껍질을 벗고 탈출을 한다. 잘 여문 것은 값도 올라간다.


미련한 놈은 꼭 얻어맞고 콩에 멍이 들어야 나오더라. 멍이 든 콩은 콩나물이 안 된다. 어떤 놈은 도리깨질에 짓이겨진다. 어떤 놈은 벌레를 앉고 키우고 있다. 이런 것은 가치가 없고 씨도 안 되고 해서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건 짐승의 밥이 된다.


예수 믿는 이치가 그 안에 들어있다. 그런 면을 보면 자기는 어떤 자기가 되고 싶으냐? 세상정신으로 벌레를 먹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세상정신이 들어가면 그건 벌써 벌레가 먹은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걸 잘 모른다. 정신적으로 먹는 벌레를 모른다.


21절-23절: ‘그 때’라고 하심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무당 점쟁이들이 많이 나오듯이 교회들이 진리이치가 혼돈스러울 때, 바른 교회를 찾기 힘들 때, 모든 교회들이 세상에서 자랑스런 것 눈에 보이는 것 이방인들과 똑같은 소원 목적으로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때, 말하자면 여기저기서 세상적 요소를 가지고, 자기 재간을 가지고 붕붕 뜨는 목사들이 많이 나올 때, ‘아이고, 저 사람 유명하다’ 하는 사람이 많을 대를 말한다.


이런 것들이 물론 신천지 같은 것도 있고, 하늘의 어머니도 있고, 하늘아씨도 있는 거지만 그런 것들이 판을 칠 때는 특히 진리를 배우는 목사님들 입장에서는 정신 사상이나 소원 목적 취미적 모든 면에서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부터 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진리를 배운다고 해서 이단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해석은 자기의 모든 삶의 면에서 적용을 하도록 돼 있다. 적용을 못하는 것은 안 된다. 영적인 정신 사상이 있으면 그 실상을 가지고 모든 상황이나 사건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막론하고 다 그 정신 사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성경은 적지적소에서 사용하게 돼 있다. 알면서 사용을 하지 않고 안 써먹어서 세상에 살면서 불행으로 살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성경에 대해 무식하면 남을 따라가게 된다. ‘우’ 하고 몰린다. 소문을 내는 바람잡이도 있지만 무슨 신비스러움을 체험하면 그걸 떠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거짓 그리스도란 이건 거짓이니까 세상 종교적인 제도를 가지고 세상에 속한 자랑으로 유명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 안의 인도자들을 볼 때 제도로 된 거냐, 아니면 제도로 되기는 했으나 또는 제도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 안에 살아있는 생명적 신앙이냐를 보는 거다. 이스마엘은 육적 제도로서 된 거고, 이삭은 생명적으로 된 거다. 제도로 됐다고 해도 생명적 신앙화로 돼야 한다.


예수님은 천국복은, 하늘나라의 본질을 말씀하심인데 거짓 그리스도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 자랑을 한다. 거짓 선지자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예언하는 교회 인도자들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말대로 이뤄진다고 하면서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하는 자들이다. 함부로 저주하는 것에는 협박과 공갈이 들어있다. 이런 신앙은 ‘꿈을 꾸었네. 음성을 들었네. 환상을 보았네’ 하는 자랑을 한다. 이건 모두 악령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이들 모두는 귀신의 영들이 들어있어서 용처럼 말한다. 즉 엄청나게 큰 자처럼, 세상에서 아주 큰 자처럼 말을 한다는 것이다. 왕처럼 말한다. 그런 사상이 정신이, 그런 영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뿔이 돋아있다. 뿔이 있다는 건 교인들을 쥐어박는다는 것이다. 뿔은 힘을 의미한다. 코뿔소의 힘이 무섭다.


그리고 왕들은 세상 주관자들을 말한다. 거기에 주관자들이 모아져 있고.


땅에 거하는 자들 즉, 소원 목적을 세상에 둔 자들이다.


세상에 속한 취미 그런 면이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이런 자들에게 금방 유혹이 된다. 잘 넘어간다. 그런 데 가서 그런 사람들 세상에서 크다고 하는 쪽의 사람에게 붙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하나님의 본질로 나가야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구별 분별을 해서 이런 자들에게 넘어가지를 않는 거다. 그런 자들에게 넘어가면 그만 그 바람을 타게 되고, 그 사람의 결과는 비참이다. 유혹자들은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을 걸었던 방법을 다 쓰는 거다. 여기에 모두 넘어간다. 오늘날 자기는 어떤 시험에도 안 넘어간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시험은 사람의 차원에 따라 오는 게 다르다. 물질을 갖고 오기도 하고, 조금 영리하다 싶으면 정신적으로 들어온다. 자기는 어느 쪽 시험에 잘 넘어가느냐? 자기의 수준이 있는 거다. 우리는 그 어떠한 데도 넘어가면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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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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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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