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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잃지 말자 (에 4:12-14, 딤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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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잃지 말자 (에스더 4:12-14, 딤후 4:1-2)


최근 몇 주간 안에 튀니지에 시민혁명으로 알리 대통령이 물러났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두 손을 들고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현재 리비아에서는 시민들의 폭동이 수도 트리폴리까지 번져 카다피 국가원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철권통치를 서슴치 않던 권력자들이 국민들에 의해 쫓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재스민 혁명’으로 일려진 중동 발 시민의 혁명은 이제 예멘과 수단까지 번지고 있고 중국과 북한까지도 떨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21세기는 세계 혁명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재스민 혁명으로 권좌를 버린 지도자들은 한 결 같이 수십 년 동안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시민혁명에 의해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날 때를 판단했어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물러나기만 했어도 국가의 영원한 영웅이 되었을 지도자들이 조금 더 버티고 가족들과 가신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때를 잃은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지금 우리가 확실히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기한이 있습니다. 권력을 잡을 때가 있고 놓을 때가 있습니다. 장기집권자, 독재자의 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때를 잃으면 그 자체가 욕이 되고 한 없이 후회할 일이 닥치게 되는 법입니다. 전도서 3:1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는데 그 때를 잘 얻으면 성공자가 될 것이고, 그 때를 잃으면 고통과 비극과 후회를 만나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도 치료를 제 때에 하면 쉽게 낫기도 하고 그렇게 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병을 치료하는 그 때를 놓치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흔히 병을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병 치료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건강을 검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를 잃지만 않으면 치료의 효과도 클 것입니다. 
 
‘동정불실기시 기도광명’(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이란 말이 장자전서(張子全書) 제10권에 있습니다. ‘동과 정이 그 때를 잃지 않으면 그 도는 빛나고 밝은 것이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행동해야 할 때가 있고, 고요하고 침묵해야 하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를 잃지 않고 때를 잘 타면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는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려고 작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나와 함께 이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유다에게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나는 아니지요?”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경고에 유다는 돌이킬 수 있는 때를 잃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총독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라고 할 때에 아내의 말을 잘 듣고 때를 잃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들어 손해 본 사람이 없는데 빌라도는 그 좋은 때를 놓친 것입니다. 
  
5세기 초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너무 뒤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오, 오랫동안 계속된 당신의 아름다움이여, 하지만 항상 새롭나니! 나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당신은 내 안에 계셨고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늦었다고 할 때가 늦지 않은 때입니다. 
  
카를로 메노티라는 사람은 “내게 지옥의 의미는 ‘너무 늦었어’라는 두 단어에 담겨 있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때를 놓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때를 놓친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도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 전에 우리가 그 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모든 시간이 말씀을 전파할 때입니다. 

2절에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모순입니다. “때를 못 얻든지”라는 말은 기회가 없었다는 말인데 기회가 없었는데 어떻게 말씀을 전파합니까? 때를 못 얻었는데 어떻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말씀 전파의 강열한 의지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기적을 베푸실 때에 아무 것도 없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선생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뭔가 있어야 주지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려고 하는 의지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때를 얻지 못한 자에게 “때를 못 얻든지” 전하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못 얻었는데 어떻게 전파합니까?”라고 할 것이 아니라 말씀 전파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주려고 하는 의지,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기뻐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감사하는 일은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가 기뻐할 시간입니까? 모든 시간입니다. 언제가 기도할 시간입니까? 모든 시간입니다. 언제가 감사할 시간입니까? 모든 시간입니다. 언제가 말씀을 전할 시간입니까? 모든 시간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시간을 정해놓고 할 일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해야 할 일입니다. 
  
1절에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합니다. 말씀 전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 모두 다를 걸고 해야 할 엄중한 명령입니다. 말씀 전파가 얼마나 소중하길래 이 모든 것을 걸고 하라고 했겠습니까? 
  
“항상 힘쓰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테디”라는 말인데 ‘끈질기게 권고하라’는 뜻입니다. 말씀 전파는 끈기와 확신을 가지고 하라는 말입니다. 말씀 전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끈기 있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신대로 요즘은 전도가 잘 안됩니다. 잘 안되기 때문에 안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안되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힘들기 때문에 더 끈기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최후의 한 사람까지 기다리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방주에 타야 할 모든 동물들이 다 타기까지는 절대로 문을 닫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주의 문을 노아가 열었지만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찬송가에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소식은 어느 누구나 오라”고 합니다. 복음의 소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도 듣지 못하여 복음을 받지 못하는 자가 없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사람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다소에 가려면 타우루스산맥이라는 높은 산을 넘어야 합니다. 이 산은 매우 험하고 독수리 서식지입니다. 바울은 이 길을 수없이 넘어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루스드라라는 곳에 갔을 때에는 그 지방에서 돌에 맞았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그를 성 밖에 끌고나가 버렸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이 간증한 것을 보면 옥에 갇히고, 마흔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세 번 파선 당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때문에 당한 고통과,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전파하는데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과 그의 멈춤이 없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끈기 있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바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끈기 있는 전도 전략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도대상자가 논쟁하면 물러서고, 둘째는 전도대상자가 잠잠하면 전도를 시작하고, 셋째는 전도대상자가 느슨하면 기회를 잡아야 하며, 넷째는 전도대상자가 물러서면 끈기 있게 따라가 결신을 받아내야 합니다. 끈기 있는 전도전략은 반복한다, 강약을 조절한다, 방법을 바꾼다, 장소를 바꾼다, 냉각기간을 갖는다, 이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전도란 끝까지 진돗개처럼 한 번 물었다 하면 놓지 않는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영화를 보러갈 기회가 좀처럼 없는데 지난 번 캐나다에 집회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컨빅션’(Conviction)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있었던 베티 워터스라는 여성이 자신의 오빠를 구하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오빠가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베티는 오빠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녀는 오빠를 구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합니다. 남편과 이 문제로 다투어 이혼을 하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면서 공부하여 변호사가 됩니다. 집요한 추적 끝에 죽은 여인의 침대에서 혈흔을 발견하여 DNA 검사 결과 그 피가 오빠나 피살자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습니다. 오빠의 옛 여자 친구들이 경찰의 협박으로 위증한 사실도 알아냅니다. 마침내 오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을 밝혀내고 올케의 위증도 밝혀냅니다. 베티가 오빠의 결백을 밝히는데 무려 18년이 걸렸습니다. 베티에게 어떻게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올 수 있었습니까? 혈육이기 때문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다 맞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힘은 영화의 제목처럼 ‘확신’ 때문입니다. 오빠가 무죄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끈기 있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이 18년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반드시 복음을 전파하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게 하고, 결신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전파할 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고 성경은 권합니다. 이 말은 때를 잃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어느 때가 가장 말씀을 전파하기 좋을까요? 바로 지금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이로스 아카이로스’입니다. 이 말은 ‘네가 말씀을 전하고 싶든지 그렇지 않든지’라는 뜻입니다. 어떤 번역에는 ‘기회가 좋든지 좋지 않든지’라고 합니다. 군인은 언제든지 어떠한 상황이든지 명령만 떨어지면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군인이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출정할 준비된 모습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가장 적당한 시간입니다. 모든 일은 늦은 때가 없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 모든 동물에게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다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복음을 받지 못할 만큼 죄인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복음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의인이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의 강도는 평생 못된 일만 골라서 했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데 제일 앞장섰던 제사장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로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할 사람을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후에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하며 하루에 3천명이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모의하던 자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에게 돌팔매질을 하던 이기풍목사임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처음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갔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창으로 살해했던 빨갱이 안재선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손양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악하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못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는 말은 ‘케뤽손’이란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크게 외치고 선포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장사꾼이 자기 상품을 ‘사세요!’라고 외치는 말이랍니다. 자기 상품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크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상품이 있는데 가만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정말 좋은 상품입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크게 외칠 만큼 좋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8:9에는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가는 데마다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가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외쳤습니다. 아덴에 가서는 온갖 잡된 신들이 우글거리고 신전이 있는 곳이지만 복음을 담대히 외쳤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복음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오래 참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오래 참음’이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을 말합니다. 로마서 9:22에는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하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1:16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전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오래 참으로 복음을 끈기 있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자녀가 돌아올까 기다리며 밤마다 대문을 잠그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을 아십니까? 전쟁에 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는 아들이 돌아올 때 집을 못 찾을까 이사를 못가는 부모의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이런 것입니다. 절대로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잠을 잘 수 없으며 문을 잠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오래 참음으로 때를 못 얻더라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애절한 부탁입니다. 우리가 복음성가의 가사에 있는대로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섬기게 하소서”라는 말이 절실하게 들립니다. ‘심장’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에스더는 포로민의 후예이지만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만이란 왕의 신하가 유대인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께 가서 얘기하라고 하지만 에스더는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법이 왕이 부르기 전에 왕께 나아가면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 모르드개는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고 합니다. 때를 절대로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때를 잃으면 그 자체가 이미 벌을 받은 것입니다. 
  
지난 2월 11일에 KTX 탈선사고가 있었습니다. 광명역에 들어오면서 서행 중이던 기차가 탈선한 것입니다. 선로를 바꾸는 컨트롤 박스를 정비하면서 너트 하나를 빠트려 난 사고라고 합니다. 사고 직전 세 차례니 오류 신호가 울렸다고 합니다. 너트 한 개가 최첨단 KTX로 하여금 궤도에서 이탈하는 탈선을 일으켰습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사고였습니다. 신호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오류 신호가 울릴 때 미리 대처했으면 이런 일을 없었을 것입니다. 때가 늦어지거나 작은 일에 방관하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4에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 일해야 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 빛을 주어야 합니다. 
  
저의 머리카락이 이제 거의 흰머리가 되었지요? 염색이 거의 다 빠지고 희어졌습니다. TV 화면에 보면 거의 백발처럼 보입니다. 아직도 저의 머리카락은 흰 것과 검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명 빛을 받으면 완전히 희게 보입니다. 빛이 있으면 검은 것이 감추어지고, 흰 것이 드러납니다. 빛이 있는 곳에 가면 선이 드러납니다. 어두움에 사는 사람에게 빛을 주어 빛 가운데 살게 해야 합니다. 이제 시간이 그리 많지 못합니다. 힘써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고 합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옵니다. 우리가 아직도 젊은 줄 알지만 늙음이 금방 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느긋한 것 같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눈앞에 닥칩니다. ‘속히 오리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속히 오십니다. 그 때를 대비하여 때를 잃지 말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밥 먹는 걸 깜빡 잊었네’, ‘오늘 종일 화장실 가는 걸 잊었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밥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은 잊지 않고 때를 맞춰 잘도 갑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아버지 일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장을 가집시다. 주님께서 얻기 원하는 영혼을 내 눈으로 봅시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를 잃지 맙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 말고 꼭 전파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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