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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왕비 (에 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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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왕비 (에 4:10-16)

  
영국에서 세기의 결혼이라고 불렸던 지금은 고인이 된 다이에나 왕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다이에나와 같이 무명에서 왕비가 된 사람이 성경에 있습니다. 최근에는 찰스 황제의 아들 윌리엄의 약혼녀 Kate Middleton이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평범한 집안 출신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루아침에 무명에서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은 에스더입니다. 고아로 자라서 왕의 아내가 되기까지의 그녀의 삶은 오늘날이라면 신문의 cover story를 장식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여성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브를 파트너로 주셨을 때 아담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그중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에스더서는 그녀를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2:7)라고 묘사합니다. 

그녀는 미모 때문에 아하수에로 왕의 부인으로 간택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전국에서 미스 페르시아를 뽑기 위한 대회를 개최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왕비가 되기 위해서 응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한 후 이곳에 잡혀온 이스라엘 이민자의 가정에서 자란 에스더에게도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에스더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의 왕비로 간택하였습니다. 

2장 17절은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외모 때문에 갑자기 인생 역전이 되었습니다. 신데렐라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동화같은, 영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분명히 수려한 외모 때문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모가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기사 중에 외모와 신입사원을 채용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사에서 상당수는 외모가 취업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www.saramin.co.kr)은 인사담당자 341명을 대상으로 '채용 시 외모가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 75.7%가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미지를 바꾸어주는 포토샵이 발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외모에 대한 편견은 한국에서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력서를 쓸 때 꼭 사진을 붙이게 되어있지만, 미국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이 없습니다. 사진뿐만 아니라 나이도 인종도 쓰지 않습니다. 이력서는 말 그대로 이력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외모는 사람을 평가하는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초등학교까지는 남녀 학생들 사이에서 우울증을 겪는 아동들의 숫자가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십대에 들어서면 남녀 사이에 2배 이상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왜 그럴까요? 소녀들에게 증가하는 여성 호르몬과 우울증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원인은 소녀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민감하게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낮은 자존감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우울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많은 십대 소녀들이 우울증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나” 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어지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누가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에스더의 이야기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사람은 바로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그의 눈에 들면 왕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현대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미디어 산업과 자본주의입니다. 아름다움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만들어지고 판매됩니다. 아름다움을 판매하는 시장은 끊임없는 성장을 거듭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딸들은 자신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전에 세상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옆에 있는 친구와 있으면서 자신의 외모를 비교하고 콤플렉스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외적인 모습 때문에 내면세계가 상처를 입고 뒤틀어지게 됩니다. 성형수술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자기 관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외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7)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외적인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자체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 자체를 섬기는 외모지상주의라는 우상 숭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숭배하다가는 자신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소스처럼 되기 싶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답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에스더의 아름다움

에스더의 아름다움은 단지 외모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친척 모르드개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외적, 내적으로 모두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더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하만이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하수에로 왕을 돈으로 매수해서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 같은 정치꾼이었습니다. 그는 성정이 못된 사람으로서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 절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이런 모르드개의 행동은 하만이 품고 있던 반유대주의를 자극했고,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을 설득했고 결국 아하수에로 왕은 유대인들을 모두 숙청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왕은 아직 왕비인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졌습니다. 조만간에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목숨이 하만의 손에 달려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나눈 편지의 내용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을 알현할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당시 법에 의하면 누구도 왕의 허락 없이 왕을 알현할 수 없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왕을 뵙지 못한 기간이 이미 30일이 되었고, 설령 왕에게 나아가려한다 해도 왕을 뵙기 전에 죽게 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절)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소명이 아름다운 왕비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에스더는 정말 난감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모든 유대인의 운명이 에스더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스더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립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고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어떻게 어린 왕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는지 놀랄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외국에 끌려와서 이민자로, 부모 없이 고아로 자란 어린 소녀의 입에서 놀라운 믿음의 말이 선포되었습니다. 당시의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여성스럽고,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편하게 아름다운 왕비로 살아가는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규례를 어기고 죽을 각오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세상의 법을 지키기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에스더의 결연한 모습입니다. 에스더의 아름다움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동족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나아가는 믿음의 당당함에 있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당당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당당함입니다. 요즘 모 프로그램에 2인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남성은 남하당 즉 “남성이 하늘이다” 고 구호를 외치는 반면, 여성은 여당당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살 수 있다“고 외칩니다. 한국의 가부장제적인 사회구조를 희극적인 소재로 사용한 프로그램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웃음을 자아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잘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여자가 당당해야 교회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여성이 외모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위하여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모르드개 같은 양육
  
제 딸의 이름을 류한비입니다. 한국의 왕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딸이 당당하게 믿음을 지키고, 민족을 구원하는 아름다운 왕비 에스더처럼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류철랑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우리의 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공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공주가 아닌,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공주여야만 합니다. 새장에 갇혀 있는 아름다운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로 자신과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움이란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형상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딸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모르드개를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에스더를 양육하였기에 민족의 위기 앞에서 에스더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법령을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가는 믿음과 담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에스더의 뒤에는 그녀를 키운 모르드개가 있습니다. 그는 에스더를 단지 겉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으로 양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스더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딸로, 민족의 위기 앞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딸로, 궁정의 편안한 삶이 아닌 옳은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딸로 양육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님을 잘 만나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덕분에 왕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모가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왕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왕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왕비가 되는 길은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옳은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여성들에게 우울증과 화병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못하고 어떤 주어진 삶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비로서의 주어진 삶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서 강사에 대한 신상명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혼/미혼 칸이 기혼/비혼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ㅁ” 이 “ㅂ” 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미혼과 비혼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미혼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 이고, 비혼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결혼의 문제에서 “아직” 이라는 말은 “아직도 하지 않았다” 는 가치 평가를 지닙니다. 

반면에 비혼이란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상태”(not married)를 뜻하는 가지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여성 지도자를 기르는 학교이기 때문인지 단어 하나의 선택에도 신중을 기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신부/수녀님을 미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개인에게는 아주 큰 차이입니다. 이 단어는 세상이 나에 대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을 선택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여성들에게 주어진 삶이 아닌 선택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딸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어진 운명을 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인가요? 세상의 아름다움 좇아가는 사람인가요, 자신 안에 이미 있는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발산하고 사는 삶인가요? 교회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세상에 빼앗겼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 아름다움에 손상을 가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이기에 아름답다” 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인 아름다움을 세상에 영원히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여성은 모두 아름다운 왕비로 태어났습니다. 혹시 자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빼앗겼다면 다시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대비마마입니다. 아내는 아름다운 왕비입니다. 딸은 아름다운 공주입니다. 


기도 요청
  
여성은 아름답습니다. 어머니가 아름답습니다.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딸이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팔등신 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할 때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너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딸이란다” 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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